본문 바로가기
회복하는 글쓰기

해변이 남긴 무늬_이별례(7)

by 종업원 2016. 1. 16.


_대마도의 어느 해변 2015. 5




전날 밤 태풍이 왔다고 했다. 사람들은 염려스러운 목소리로 간밤에 별일 없었냐고 물었지만 우린 괜찮았다.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게 태풍이라고 생각하진 못했다. 유난히 거세었던 그날의 비바람을 4인용 텐트가 막아주고 있었고 그 아래에서 우리는 깊은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 해변을 걸었다. 해변에 남겨진 거대한 무늬 위를 걷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건 간밤에 휘몰아친 태풍이 남긴 무늬일 것이다. 그리고 휩쓸려갔다가 다시 휩쓸려오기를 반복하며 끝내 휩쓸려가지 않고 남아 있는 해변에 모여 있는 모래들의 무늬일 것이다. 어딘가로부터 떠밀려온 작은 자갈의 무늬이기도 할 것이다.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흔적을 남기는 바람의 무늬이면서 저 멀리 달의 중력이 남긴 무늬이기도 하다. 

  

해변은 육지의 끝이면서 바다의 시작이다. 끝과 시작이 교차하는 곳, 어쩌면 오직 그런 곳만이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는 장소인지도 모른다. 언제라도 휩쓸려 가버릴지 모르는 이 위태로운 경계에서 누군가가 만났(었)다. 해변에 남아 있는 저 무늬는 저마다가 남기고간 만남의 증표일 것이다. 참지 못하고 던져버린 모난 말로 남겨진 상처 자국이기도 할 것이고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약속의 부표이기도 할 것이다. 그 무엇도 온전하게 지켜지지 않는 가장자리에 만남의 증표가, 끝내 남겨진 상처와 약속의 부표가, 새겨지면서 지워지고, 지워지면서 새겨지고 있다. 세상의 모든 무늬엔 만남에 관한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누구라도 만남에 대해 이야기 하며 또 헤어짐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해변에 버려진 텅 빈 소라껍질을 주워 귀 기울여 바다 속에서의 이력을 들어보려고 하는 이는 드물다. 해변에 남겨진 저 무늬는 오직 그 해변을 걸었던 이만이 볼 수 있다. 해변을 걷고 있는 이, 상처받았기에 걸어야만 했던 이는 해변에 남겨진 연약한 무늬가 파도의 것만이 아님을 안다.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밀려올 수밖에 없고 그렇게 밀려갈 수밖에 없는 숱한 이들이 남긴 관계의 자연스러운 이치의 드러냄이라는 것을 안다. 자국, 물듦, 상흔이 처음 보는 지도처럼 펼쳐져 있는 해변의 무늬. 고작 무늬로만 남았으며 기어코 무늬로 남았다. 그건 각자의 옆에 누군가가 있었다는 곁의 역사이기도 하다. 

  

모임은 기꺼이 ‘손해’를 감내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만남이다. 우리는 무언가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가능하다면 돌이킬 수 없이 헤어지기 위해 손해를 감내하고 또 무릅쓰며 만난다. 그러니 모든 만남은 결별이라는 비용 없이는 성사될 수 없다. 그 어떤 결별도 없이 이루어지는 만남이란 두 손에 한가득 무언가를 쥐고서 또 다른 것을 향해 손 뻗는 어리석은 쾌락에 불과하다. 모임이라는 손해의 장소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값진 가치는 ‘결별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모임 속에서 빚어지는 갖은 손해를 감수하는 이유는 ‘결별’이야말로 ‘자아’가 홀로 수행하기 가장 어려운 일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모임’은 중독자를 치료하는 격리병동처럼 한시적으로 구성원들을 옭아매기도 한다. 모임이라는 ‘틀’이 끝없이 같은 모습으로 번성하기만 하는 ‘꼴’에 다른 무늬를 새길 수 있는 가능성의 자리를 허락한다. 모임이라는 제 몸에 맞지 않는 틀에 번성하는 ‘자아’(꼴)를 담금질 해보는 일, 그렇게 자아를 죽이는 일. 그리하여 돌이킬 수 없는 자리에 서게 될 때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결별’이다. 

  

우리가 기필코 만나야 하는 이유는 역설적이지만 헤어지기 위해서다. 무언가와 헤어졌기 때문에 만날 수 있고 또 기꺼이 헤어지고자 하기 때문에 만난다. 여기서 말하는 헤어짐이나 결별은 대상을 바꾸거나 대체하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끝없이 돌아보며 가닿을 수 없는 일들을 원망하고 자책하며 스스로를 위무하는 일을 중단하고 그 자아로부터의 결별을 위한 병동에 입소하는 일. 모임이라는 병동. 그곳에서 우리가 정성을 다해 서로를 보살피는 것은 ‘결별’ 하기 위해서다. 내일이라도 결별하기 위해서, 오늘 당장 결별하기 위해서, 어제의 결별을 지켜내기 위해서 우리는 만난다. 모임의 무늬란 결국 무엇과 결별했는가라는 물음을 통해서만 새겨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매일매일 헤어질 수 있는가, 그렇게 영원히 헤어질 수 있는가, 헤어짐을 통해 만남의 실(thread/loss)을 이어갈 수 있겠는가. 

 

 

_<생활-글-쓰기 모임> 2기 7회 여는 글 / 2016. 1. 6 / 광복동 '딱봐도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