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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글쓰기

대피소 : 떠나온 이들의 주소지

by 종업원 2016. 1. 19.

2015. 11. 13



망한다는 것, 결별하고야 말게 될 것이라는 ‘그 말’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야 함을 느낍니다. 그간 주변에 ‘글쓰기 모임’이 드물었다는 것이 ‘생활-글-쓰기 모임’의 고유성을 돋보이게 하는 조건이 아니라 차라리 ‘생활-글-쓰기 모임’이 자생하기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음을 예감하며 이 모임 또한 결국 사라질 것이라는 말로 시작의 문을 열었었지요. 끝의 대한 예감으로 시작의 걸음을 내딛는 결기 속에 다소간 과장된 낭만의 뉘앙스도 느껴집니다. 그걸 무릅쓰고라도 다시금 환기할 필요가 있는 것은 그 시작을 망각하는 것은 이윤 축적을 목적으로 하는 모임이 아니라면 분명 타락의 징후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임을 ‘대피소’와 같은 곳이라 지칭했던 것도 기억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생활-글-쓰기 모임'이 얼마간이라도 대피소의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은 바깥의 침입을 차단할 수 있는 튼튼한 외벽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곳에서 각자의 생활 속에서 길어올린 연약한 말과 글을 주고받을 수 있는 내밀함의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는 장소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글쓰기 모임’이 드물다는 것은 가시적인 외압은 없는 것처럼 보여도 ‘자신’(들)에 대해 마음놓고 말하며 잠시 동안이라도 안심을 할 수 있는 장소가 부재하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대피소’의 속뜻은 shelter라기보단 asylum에 가깝습니다. 속박과 핍박을 받는 이들의 회복을 돕는 장소, 그때까지의 사회적 구속이나 제한에서 일시적으로나마 해방될 수 있는 곳을 염원하며 부려 쓴 말이었습니다. 대피소는 ‘정주’의 공간이 될 수 없습니다. 잠시 머물 수 있을 뿐입니다. 어딘가에 정착하고자 하는 정주민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옮겨다녀야만 하는 유동민들을 통해서만 대피소는 나름의 존재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불편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각자의 글에 ‘개입’ 했어야만 했던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더 좋은 글’을 썼으면 하는 바람으로 건넨 말이었지만 ‘더 좋은 글’이란 자기 위무로부터 스스로 해방될 수 있는 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풀어 말하자면 자기 안에 침잠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며 이 모임에 머물지 않아도 되는 힘을 글과 말의 주고받음을 통해 다져가는 것입니다. 이 모임이 3기나 4, 5기로 넘어갈 수 있는 내적 이유와 동력은 정주(定住)가 아니라 유동(流動)에 있습니다. 현실에 대한 위무가 아니라 현실과의 대면에 있습니다. 물론 머무르기 위해서도 힘이 필요합니다. 위무 또한 자기존중 없이는 어려운 일입니다. 설사 지금 당장할 수 없는 일이라 해도 거듭 우려섞인 언급을 멈출 수 없는 것은 ‘이곳’은 떠나온(내몰린) 이들의 발걸음이 닿을 수 있는 주소지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린 말과 글을 주고받을 수 있게 하는 ‘내밀함’이라는 가치는 사적 친밀의 밀도를 두텁게 하는 것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밀함이란 내몰리고 내맡겨져 있는 이들의 회복을 도울 수 있는 어울림의 태도로 삼아야 합니다. 


관계의 내밀함이 잠시동안이라도 ‘대피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입니다. 헌데 우리가 그동안 맺어왔던 내밀한 관계는 어째서 매번 관계의 비참으로 몰락하고마는 것일까요? 서로에 대한 고착과 집착이 관계를 파괴하기 때문이겠지요. 줄여 말해 잘 헤어지지 못해서입니다. 모든 관계는 결국 이별로 귀결된다는 속된 허무주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잘 헤어지지 못했다는 것은 다르게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해버렸다는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나눔’은 ‘기부’ 같은 게 아닙니다. 대가 없이 내어놓는다 하더라도 축적의 방식에 대해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기부와 달리 나눔은 ‘다른 것이 되는 운동’에 가깝습니다. 말을 ‘해주는 것’과 말을 ‘나누는 것’은 전적으로 다른 활동입니다. 전자는 안전하지만 후자는 위험합니다. 전자는 그대로 머물지만 후자는 다르게 떠납니다. 그러니 개입이란 나눔과 짝을 이루는 말이겠지요. 홀로 쓴 글이 자아를 성숙할 수 있게 돕는다면 함께 쓴 글의 나눔은 관계의 성숙을 돕습니다. 관계의 성숙이란 다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릴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모임을 시작하면서 했던 ‘망한다는 것, 결별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가리키고 있었던 것은 소진이나 소멸만이 아니라 다르게 만나야 한다는 염원 또한 품고 있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대피소를 돌보아야 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대피소가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생활-글-쓰기 모임’ 또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생활-글-쓰기를 각자의 자리에서 꾸준히 할 수 있는 힘을 가지는 일, 모임 없이도 그 일을 계속 할 수 있기 위해서 지금의 ‘생활-글-쓰기 모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생활-글-쓰기’를 계속해서 발명하고 변화시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생활-글-쓰기 모임’이 앞으로도 존재해야만 한다면 그 내적인 근거는 오직 여기에 있습니다. 내몰린 이들의 걸음이 닿을 수 있는 주소지를 가진다는 것은 부단한 결별을 통해서만, 다르게 만나는 운동을 통해서만, 다른 것이 되고자 하는 나눔의 급진성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니 이 모임에서 ‘(자기) 글의 완성도’란 유동의 관계 속에서 부단히 오고가는 나눔의 운동이 일으키는 바람에 잠시 몸을 맡길 때 느껴지는 반갑고 고마운 순간일 뿐이지 결코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이 헤어짐이, 이 망함이 오랫동안 근기 있게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매몰차고 차가운 헤어짐이 아니라 사려 깊은 말과 글의 주고받음이 데우는 온기 속에서 슬기롭게 헤어지는 일. 내밀함의 긴장 속에서 오랫동안 헤어지는 일. 잘 망하며 사는 일.


_<생활-글-쓰기 모임> 2기 3회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