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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들

버려진 자리, 남겨진 자리

by 종업원 2023. 1. 9.

2022. 12. 30

 
  <아무도 모른다>가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을 때 한 인터뷰에서 어느 러시아 기자는 고레에다 영화를 일러 “남겨진 사람을 그린다”고 말한 바 있다. 그건 고레에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했던 자신이 만들어온 영화의 알짬이었다. 영화 데뷔작 <환상의 빛>(1995) 또한 남겨진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빛을 쫓아 갑작스레 곁을 떠나버린 이(이쿠오)로 인해 어둠 속에 남겨져야 했던 이(유미코). <환상의 빛>이 시종일관 칙칙하고 어두운 톤을 유지하는 건 이 영화가 상복을 벗지 못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말한다. 유미코가 줄곧 이쿠오의 죽음에 붙들려 있는 건 자신이 버려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버려진 것과 남겨진 것은 다르다. <환상의 빛>이라는 제목은 무언가를 좇아 갑작스레 여기를 떠난 이쿠오(들)의 알 수 없는 열망(이끌림)을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고레에다에게 영화란 이곳을 버린 사람이 아닌 떠나지 않고 남은 사람의 이야기로 채워야 하는 세상이다. ‘버린다’는 건 더 이상 이어지지 않게 한다는 것이지만 ‘남는다’는 건 떠나지 않고 이곳에 머문다는 뜻이다. <환상의 빛>은 버려진 자리에서 남겨진 자리로 힘겹게 이동하는 여정을 담고 있다. 
  그래서일 것이다. 이쿠오의 뒷모습을 보며 그것이 마지막인지도 모르고 환하게 웃던 유미코의 미소가 내내 진동했던 이유가. 남겨진 유미코는 더 이상 그렇게 웃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 남아 있는 건 이쿠오가 남긴 뒷모습의 미학이 아니라 집앞까지 나와 사랑하는 이를 배웅하며 짓던 유미코의 미소다. 그렇기에 다시 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사랑하는 이의 뒷모습을 좇아 환하게 빛나던 유미코의 미소를 ‘환상의 빛’이라 부르고 싶다. 
 

유미코 얼굴쪽 포커스가 미세하게 나가 있어 저 미소가 더 슬프게 빛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lt;환상의 빛&gt;(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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