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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다리를 주무르며

by 작은 숲 2025. 12. 19.

2025. 11. 13 / 12. 19


본가에서 저녁을 먹으려면 적어도 낮 2-3시쯤엔 전화를 해야 한다. 사위와 달리 아들에겐 대충 차려줘도 되지만 고기를 먹지 않는 아들이니 생선이라도 구워야 하기 때문이다.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저녁일 수 있지만 그래도 뭔가를 내어놓으려면 냉장고에 넣어둔 우울증 약 하나를 털어넣는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오늘 저녁에 들린다고 하는 전화를 드리니 예상대로 고스톱 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럴 땐 거두절미하고 용건만 짧게 말해야 한다. 예의를 차리느라 안부 인사가 길어지면 초조한 마음을 내비치시기 때문이다. 다행이다. 오늘도 바깥으로 나가셔서 신나게 고스톱을 치고 계셔서. 

고등어구이에 어묵된장국을 맛있게 먹고 일찌감치 안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 계시는 어머니 발밑에 앉았다. 매일매일 이야기를 나누진 않지만 서로 할일(!)을 다 마친 뒤에 곁에 앉으면 이런 저런 이야기가 끝도 없이 흘러나온다. 작은 일터에 틀어둔 라디오처럼 시시콜콜한 이야기에서부터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이야기까지 어떠한 징조나 준비 자세 없이 무작위로 흘러나온다. 

오랜만에 다리를 주물러 드렸다. '어이구, 어이구' 하는 신음 소리가 반갑다. 발끝에서부터 엉덩이 아래까지 온몸으로 모은 힘을 손끝에 실어 샅샅이 주무른다. 몸이 들썩들썩 하는 데도, 이야기는 끊김 없이 계속 흘러나온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나대로 '아이고, 아이고' 감탄사를 내뱉으며 더욱 신나게 오래전부터 '남의 살' 같은 두 다리를 '짝쨍이'처럼 느끼지 않게 왼쪽, 오른쪽을 교대로 주무른다. 오늘은 성북고개에서 살았을 적에 뒷길 이웃집 아주머니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얼마 전에 부산진역 횡단보도에서 우연히 예전 살던 집 뒷집 이웃 아주머니를 길에서 만났다고 한다. 30년 가까이 살았던 동네였음에도 이사할 때 이웃에게 따로 인사를 하지 못한 게 내내 아쉬웠는데, 그렇게 만나서 반가운 마음에 자장면이라도 사주고 싶어서 근처 중국집에 들어갔다고 한다. 건강하다고 해야 할지 방정맞다고 해야할지 판단하기 어려운 큰 웃음소리로 꽤나 유명했던 전원주라는 배우의 웃음소리 못지 않은 힘쎈(!) 웃음소리로 동네에서 꽤나 유명했던 어머니 웃음소리를 늘 부러워했다는 이웃집 아주머니다. 옥상에 빨래를 널러 갈 때면 이웃집 아주머니도 마당으로 나와 저 집은 어떻게 매일 같이 저런 웃음소리가 나나 궁금하다면서 부러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던 그 아주머니는 남편이 늘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렸고 아들은 40이 넘도록 바깥에 나가지 않고 방에서 게임만 했다고 한다. 다행히 큰딸은 결혼을 했다고. 젊었을 때부터 위장이 좋지 않아서 늘 인상을 쓰고 지냈는데, 그 까닭이 꼭 몸에만 있는 게 아니라 가족들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도 원인이지 않는지 여쭤보니 아마 그럴 거라고 말씀해주신다. 중국집에 들어가기 전에 "은주 엄마, 나 밥 안 먹을래요."라고 해서 부담 갖지 말고 간단하게 자장면이나 먹자고 하니 "나 이가 없어요."라고 했단다. 자장면은 먹을 수 있다고, 천천히 먹으면 된다고, 우리 나이에 이빨이 온전한 사람 없다고 달래서 함께 자장면을 먹었다는 이야기. 그러곤 얼마 뒤에 뒷집 아주머니로부터 문자가 왔다고 한다.

은주 엄마, 나 아파요.
암이래요. 

뭐라고 답장하셨냐고 여쭤보니, '요즘 암은 병도 아니다. 모두가 암을 지니고 사니까 걱정하지마라고' 답장을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나선 "미안"이란 문자가 왔다는 이야기까지 들려주신다. 뭐가 미안하시다는 거냐고 여쭤보니 따로 말씀이 없으셔서 갑작스레 걱정끼치는 문자를 넣어서 미안하다고 하신 거냐고 하니 '그렇겠지'라고 하시며 생각지도 못한 넋두리를 하신다. "여자의 운명이 너무 안타깝다." 뒷집 아주머니를 가리키는 말이겠지만 이 안타까움엔 당신도 겹쳐 있겠구나 싶었다. 세심하게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저 여자의 운명'이 아니라 '여자의 운명'이라고 한 까닭을 오랫동안 '뼈 빠지게' 일하고 오랫동안 '뼈 빠지게' 앓은 내 어머니, 내 앞에 누운 한 여자가 지나온 삶을 곁에서 지켜봐왔기에 별 말 없이도 알 수 있었다. 

골목길 맨 윗집에서 매일 전축에 틀어놓은 노래를 따라 흥얼거렸던 한 여자, 걸려온 전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 30초도 되지 않아 우화화하 호탕한 웃음을 내어놓아 골목길 아래까지 쩌렁쩌렁하게 들리던 웃음소리. 그 힘쎈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어 뒷집까지 닿고, 그 웃음소리가 부럽다고 말하던 뒷집에 살던 또 한 여자. 이 기막힌 이야기를 라디오 사연을 듣는 어느 작은 일터 일꾼처럼 하던 일을 계속 한다는 표정으로, 온몸에 힘을 손끝에 실으면 아이고 아이고라는 한섞인 소리가 나지만 더 이상 제구실을 하질 못해 ‘남의 살’에 가까운 다리를, 아이고 아이고 웃음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추임새를 넣으며 힘껏 주무를 뿐이다.  
 

2020년 10월 31일_집앞

 

2023년 5월 22일 초읍 삼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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