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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김반 일리히 일기(3) 거지가 없다

by 종업원 2012. 3. 5.



보행자를 우선 시 하는 ‘X자 형 횡단보도’가 늘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별스럽게 일찍 개학한 한 대학에 강의를 하러 가는 길 위에서 떠올랐다. 보행자(달리 말해 걸을 수 있고 갈 곳이 있는 이)가 편해진 것은 분명하지만 육교[다리]가 없어지고 있다는 것에 관해 누구도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걸을 수 없고 갈 곳이 없는 이가 모두 어디로 갔는가에 대한 물음을 가지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육교[다리]’를 건너야 헸는데, 육교를 오른다는 것은[‘너머’로 건너간다는 것은] 그 위에서 걷지 못하는, 갈 곳이 없는 이들을 지나쳐[만나]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는 사실. 육교가 사라졌다. ‘거지’가 사라졌다. ‘거지’라는 단어를 서스름 없이 쓰는 나를 비난하겠지만 이제 ‘거지’라는 호칭은 써서는 안 되는 말이 아니라 ‘쓸 수 없는 말’이 되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거지’라는 말을 쓸 수 없게 되었기에 그 말의 쓸모 또한 없어져버렸다. 길에서, 육교 위에서 우리에게 동정과 자비를 호소하던 이들은 이제, 그들의 빈손 대신에 볼펜을, 대일밴드를, 편지봉투를 들거나, 장애인 협회 모금함을 들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 거지가 없어졌다는 것은 ‘불평등 구조’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불평등의 구조를 은폐하는 방식이 다양해졌다는 것이다. 이제 거지를 찾을 수가 없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우리에게 심문하며, 몸둘바를 모르게 만들었던 그 불편한 이들이 사라졌다. 대신 ‘상품’을 들고 ‘교환’을 요구한다. 물론 그 요구 또한 동정이나 자비에의 호소를 촉구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상품 교환'의 형식으로만 주고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의 '증여'가 불가능함을 가리키는 '시대의 증표'처럼 보인다. 때때로 아이를 업고 지하철 바닥에 절을 하는 모자(母子)를 만나기도 하고, 사연을 적은 복사지를 나누어주는 몸이 불편한 이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이때 ‘우리’가 ‘그들’에게 건네는 것은 ‘화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 ‘동정’이야말로 자본제적 시스템이 구축한 ‘공통 감정’의 일종일 테지만 무엇보다 관계 속에서, 공동체 속에서 ‘증여’라는 주고 받음이 상품의 교환으로 완전히 탈바꿈했다는 사실. ‘보행자’를 우선 시 하는 저 ‘X자 형 횡단보도’를 건너며 어느 늦은 밤, 하단으로 향하는 지하철 바닥에 간난 아이를 업은 채 업드려 절을 하는 아직 애띤 여자[어미]에게 이천원을 건네던 나를 떠올렸던 것이다. 내게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을 하던 펑퍼짐한 그 뒷모습을 애써 외면하기 위해 서둘러 지폐를 건네던 그 순간이 떠올랐던 것이다. ‘X자 형 횡단보도’를 통해 간편히 ‘저쪽’으로 건너는 그 길 위에서, 아무리 애써봐도 도무지 ‘그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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