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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이름 없는 자리

by 종업원 2013. 1. 5.



1. 

어떤 관계 속에서는 추상적인 것이 구체적인 것으로 통용되기도 하고 구체적인 것이 추상적인 것으로 타매 당하기도 하는 듯합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추상도 구체도 아닌 오롯이 관계에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바꿔 말해 문제는 ‘내용’이 아니라 우선 ‘형식’에서 찾아야겠습니다. ‘의도’가 아닌 ‘수행’으로, ‘내 마음’의 ‘고백’이 아닌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몸에 내려 앉아 있는 ‘습관’과 ‘버릇’이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그러니 ‘관계’는 만리장성처럼 결코 하루 아침에 쌓을 수 있는 게 아닌 것입니다.



2. 

아직 형성되지 않는 ‘관계’에 ‘습관’이 먼저 깃든다는 사실을 저는 모르지 않습니다. 말을 시작하는 사람은 언제나 말을 시작하고 말을 거는 사람은 언제나 말을 걸지요. 그리고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은 요지부동으로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 말을 시작하고 말을 걸던 사람이 말을 시작하지 않거나 걸지 않게 되면 그나마 유지되던 관계 또한 손쉽게 망실되리라는 것은 굳이 저의 경험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패턴적으로 예측할 수 있으며 슬프게 예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양xx에게 어떤 사람이었던가? 돌이켜 생각해봅니다. 아프-꼼에서는 말을 시작하는 사람이었고 양xx에게는 말을 거는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쉽게 답하기 어렵습니다. 답은 커녕 내가 시작한 말이 누군가의 말을 독점하고 강탈하고 점거한 것은 아닌가라는 물음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공동체라는 새로운 관계를 조형해가는 과정 속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의욕’이라는 불을, 일상 속의 작은 구원의 불씨를 옮기고 나누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누구가가 말을 시작한다는 것은 ‘지위’와 ‘자질’의 문제라기보다는 ‘역할’에 지나지 않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말을 시작하고 말을 거는 것에 별스러운 의미부여를 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그간 별스럽게, 좀스럽게, 언거번거하게 말을 시작하고 거는 것에 지나친 의미부여를 해오지 않았나 돌이켜 생각해보게 됩니다. 앞으로도는 저는 말을 시작하고 말을 거는 ‘역할’의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보다 잘 나눌 수 있는 말을 시작하고, 또 그런 말을 건네야겠다 다짐하게 됩니다.



3. 

한 해를 돌아보면서 못내 아쉬운 것은 ‘전적으로 이해하고 성취하고 합의하는 관계’(김현수)를 단 한번도 조형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관계라는 것이 유들유들하고 모남 없이 매끄러워질 때, 마치 신을 죽이고 쌓은 성전 속의 종교처럼 타락이라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연극적으로나마 잠깐이라도 ‘이해의 합의’에 이르러보는 것은 관계를 조형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경험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끝내 성취했어야 하는 과제가 ‘그것’이었음을, 끝내 역부족이었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 

곰곰이 생각하다 이런 이름이 떠올랐습니다. ‘이름 없는 선배’. 어떤 공동체 속에서는 저마다의 역할이 있기 마련이고 나름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인들의 관계 속에는 대개가 ‘선생님’이라는 두루뭉술한 호칭으로 애써 가꿔야할 관계를 손쉽게, 매끄럽게 내팽겨쳐버리기 일쑤이지요. 아카데미 안에서 통용되는 호칭 중에 ‘선생’만큼 오염된 이름이 또 있을까요?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아무개 선생’이라 불러본들 ‘선생’은 고사하고 ‘아무개’조차 되려 저 텅비어 있는 ‘선생’이라는 괴물에 되먹혀버리는 상황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선배’는 다릅니다. 그만큼 귀한 호칭이며 귀한 이름이지요. 아직은 말입니다. 저는 아직 ‘선배’가 되지 못한 사람이지만 그 이름을 지레 포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때때로는 강박적으로 그 이름으로부터 도망치려고도 했고 그 이름을 가지려고도 애써보았지만 양xx라는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다 불현듯 ‘이름 없는 선배’라는 이름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xx 선배’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로 아프-꼼이라는 공동체에 깃들어 있는 ‘이름 없는 선배’가 요체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울려 조형한 숲엔 큰 나무들이 무성할 겁니다. 그 속에서 제 덩치와 크기를 비교하거나 뽐내는 건 무용한 일이겠지요. 해마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그 순환의 장소로 어떤 이가 찾아오든 ‘환대’하게 될 것이고 ‘환대’ 받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환대’의 순환을 저는 ‘이름 없는 선배’라 부르고 싶습니다. 그러니 ‘선배’라는 이름은 아무개가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분양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 점이 참으로 미안합니다. 가장 오랫동안 ‘아프-꼼’이라는 공동체를 건사해오며 ‘이름 없는 선배’의 자리를 조형해내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고 미안합니다. 많은 이들이 이곳에 머물다 돌아가거나 때로는 도망가는 가장 큰 이유가 아프-꼼에 ‘이름 없는 선배’가 부재하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까지 미칩니다. 그 부재의 책임은 우선 제게 있는 것이겠지요. 허니 그 책임을 ‘선배’라는 이름으로 독점하고 군림하기보다 누구라도 가질 수 있는 이름의 자리를 조형하는 데 보다 힘쓰는 것으로 갈음야겠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누구도 독점할 수 없는 이름, ‘이름 없는 선배’라는 자리가 곧 아프-꼼의 역사를 담지하고 있는 고유한 이름이라는 것. ‘이름 없는 선배’라는 자리는 누군가에게 독점되지 않고 외려 텅 비여 있음으로 충만해진다는 것. 부재로서 존재하는 ‘이름 없는 선배’라는 자리, 아프-꼼이 희망하는 공동체도 꼭 그러한 모습이 아닐까 조심스레 예감해봅니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가야할 길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빛을 발하며 ‘우리’의 발걸음을 제촉하고 있습니다. 어여 가십시다. 제가 먼저 발을, 말을 떼고 옮기고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20121229



*2012년 어떤 송년회 자리에서 누군가에게 전하는 감사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