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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말들의 향방

by 종업원 2013. 1. 6.

2012. 7. 9


'없는 길'을 가본다는 것은 여러모로 힘든 일이고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아울러 '가보는 것'과 '가는 것'의 명백한 차이에 대해서도 새삼 자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보는 자'는 아무 것도 믿지 않거나 모든 것을 순진하게 생각해버리는 실착을 동반자로 삼을 것이지만 '가는 자'에겐 오직 '함께 걷는 이들'을 '동반자'로 가지게 되겠지요. 참조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옳은 길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동반자로 삼아야 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실은 그 '의구심의 동반자'야말로 지금 걷고 있는 길의 의미를 보증하는 '증인'일테지만 '그/녀'와 늘 친하게 지낼 수만은 없다는 점이야말로 가장 힘든 점이 아닌가 합니다. 이 '소규모'의 모임이 시작부터 지금까지 크고 작은 잡음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의구심의 동반자' 때문일 것이고 그 분쟁들은 이 모임이 '없는 길'을 가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것일 테지요. 허나 바로 그 없는 길을 가고 있다는 '의미' 때문에 때로는 '과잉'되어, 때로는 '위축'되어 너무 앞서 거버리거나 때로는 지레 뒤쳐지게 되는 듯합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동료가 되어야 하고 동시에 '의구심의 동반자'의 역할도 수행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 모임을 건사하는 것이 이라도 힘든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개의 모임들이 '결속'과 '연대'라는 '대의'의 축만으로도 너끈히 건사되는 것과 달리 이 모임은 새로운 방식의 '결속'과 '연대'가 필요하며 아울러 기왕의 '대의'를 의심하는 태도 또한 갖춰야 했습니다. '의구심의 동반자'가 이 모임의 '창간 동인'이었다면 지금 그 '동인'에 발목이 잡혀버린 형국처럼 보입니다. 그렇다고 문제가 전적으로 '의구심의 동반자'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선은 그와 '서늘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실패한 '우리'들에게 먼저 그 책임을 물어야겠지요. 


이 모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논함에 있어 저는 '없는 길'을 간다는 것의 의미, 그 때문에 늘 함께 해야만 하는 '의구심의 동반자'를 꼭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입장과 의견은 존중되어야겠지만 모든 입장과 의견은 무조건적으로 존중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존중의 여부는 그 입장과 의견이 공동체 혹은 모임과 어떤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공동체를 조형하고 건사하는 데 '말을 나누는 것'의 중요성은 거듭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아니 어떤 공동체의 조형과 건사란 어떤 말을 나누었으며, 어떤 말들을 캐내었으며, 어떤 말들을 조형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간 우리들은 어떤 말들을 나누어왔으며 어떤 말들을 캐내었던가요? 말을 나누고 보살피는 지난한 노동의 결과가 '너의 것'이나 '나의 것'으로 규정될 대, '말'에 소유권을 주장하는 순간 공동체는 와해의 수순을 밟게 될 것입니다. 다소 추상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주고받은 말, 보살핀 말, 애써 캐낸 말들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았으면 합니다. 논란과 분쟁은 '말'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말의 향방을 찾는 것으로부터 다시 '시작'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없는 길을 뜷어내는 '말'들을 현명하고 넉넉하게 주고받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순간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이곳에서 '포지션(position)'과 '반경'이라는 어휘를 배웠습니다. 이 두 어휘로 제 삶을 성찰할 수 있었으며 보이지 않는 앞날에 작은 희망의 길을 낼 수도 있었습니다. (지금-여기-우리가 서 있는) '현장'이야말로 그렇게 애써 캐낸 어휘라 하겠습니다. 한 공동체에서 반복적으로 주고받는 '어휘(말)'만큼 그 공동체의 정향과 특징을 선명하게 담지하고 있는 것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렇게 주고받는 '어휘'야말로 그 공동체의 '현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공동체의 존재 의미는 바로 저 나름으로 애써 조형해온 '현장' 위에서만 획득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우선 '현장'을 살려야 합니다. '어휘(말)'를 주고받고 애써 나누어야 합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공동체의 이름없는 역사는 '현장'에서 주고받는 '어휘(말)' 속에만 새길 수 있을 것입니다. 



2012년 6월의 어느날 회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