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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3

낮고 가난한 세속의 숲 2014. 10. 21 고작 2년 남짓한 시간이 지나갔을 뿐인데 언제 썼는지 기억나지 않는 글 한편을 올려둔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동안, 한 발짝 바깥으로 나와 있었음에도 매번 귀한 시간을 선물로 받았던 공부 자리가 내게도 있었다. 내/외적인 이유로 공부 자리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게 불가능해졌을 시기, 책마치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든 손을 보태고자 이틀동안 읽고 쓴 글이었음을 힘겹게 떠올려본다. 내게 허락되었던 그 하루, 이틀의 시간동안 글을 읽고 쓰면서 '다시 이 글로, 이 자리로 돌아올 것'을 내내 새겼지만 지금은 그곳이 어디인지, 돌아갈 수 있는 곳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별스러울 것 없는 쪽글이지만 글을 쓰면서, 또 쓰고 나서도 곡절이 많았던 이 글을 무심히 읽으며 그립고 보고 싶지만 연.. 2014. 10. 23.
존재론-비평론-공동체론이라는 보로메오 고리―김영민, <<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한겨레출판사, 2011) 사람들은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의 친구[동무]들은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의 적들도 그를 기다리고 있다. ―롤랑 바르트,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6, 41쪽. [ ]는 인용자 삽입) ‘안다는 것’은 필시 ‘비용’을 요구한다. 그 비용이란 앎에 다가서기 위해 행한 ‘나의 노력’ 따위들만으로는 치를 수 없는 성질의 것인데, 그것의 요체는 바로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좋든 나쁘든, 안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짓이다.”*). 이 돌이킬 수 없음은 비단 ‘앎’의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어휘의 문제와도, 생활양식의 문제와도, 공동체의 문제와도, ‘새로운 의욕’의 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일 수밖에 없다. 김영민의 글을 ‘읽는다는 것’ 또한 ‘돌이킬 수 없는 것’에 가깝다.. 2011. 8. 27.
거울과 사진, 고백과 글쓰기 스무 살이 한참 지난 나이지만 ‘∼씨’보다 ‘∼양’이라 불리기를 원하는 여성이 있다. 그녀는 틈만 나면 거울을 보고 주변사람들이 진절머리를 칠정도로 열성을 다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고백’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거울 보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없다. 사람들 앞에 설 ‘자신감’은 없지만(‘∼씨’가 된다는 것은 사람들 앞에 홀로 서는 것이다. 그/녀와 마주본다는 것이다) ‘자신’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는 듯(‘∼양’이라는 호칭 주변에는 그래도 ‘난 소중해’라는 유아적인 정서가 둘러싸고 있다) 쉼없이 거울을 보고 고백을 하는 그 여성의 손에는 늘 핸드폰이 쥐어져 있다. 영화 (이경미, 2008)는 볼이 빨개지는 콤플렉스를 가진 ‘양미숙’이라는 인물.. 2011. 6.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