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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비평론-공동체론이라는 보로메오 고리―김영민, <<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한겨레출판사, 2011)

by 종업원 2011. 8. 27.


사람들은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의 친구[동무]들은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의 적들도 그를 기다리고 있다.

―롤랑 바르트, <<목소리의 결정-롤랑 바르트 대담집 1962-1980>>(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6, 41쪽. [ ]는 인용자 삽입)


 

 



‘안다는 것’은 필시 ‘비용’을 요구한다. 그 비용이란 앎에 다가서기 위해 행한 ‘나의 노력’ 따위들만으로는 치를 수 없는 성질의 것인데, 그것의 요체는 바로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좋든 나쁘든, 안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짓이다.”
*
). 이 돌이킬 수 없음은 비단 ‘앎’의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어휘의 문제와도, 생활양식의 문제와도, 공동체의 문제와도, ‘새로운 의욕’의 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일 수밖에 없다. 김영민의 글을 ‘읽는다는 것’ 또한 ‘돌이킬 수 없는 것’에 가깝다. 물론 이때의 읽는다는 것은 필요한 부분만을 절취해서 자기화하는 것을 원리로 하는 자본제적 교환체계의 반복이나 ‘나’와 ‘저자(타인)’의 손쉬운 교감(‘통’했다고 착각하는 것)에 만족하는 독아론(獨我論)의 연장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말을 죽인 침묵의 성성(醒醒)함 속에서 섬모처럼 마음을 움직이면서 상대의 말에 긴절히 응대하는 극히 능동적이며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태도”나 “화자의 몸을 깨우고, 그 정신을 섭동케 하며, 그 무의식을 해방시켜 자기 ‘아닌’ 자기, 자기보다 ‘큰’ 자기의 이야기로 돌아가게 하는 것”(105∼106쪽)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차라리 그것은 읽기보다는 ‘듣기’에 가까운 것이라고 해도 좋다. 김영민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개인의 공간(내면)에서 이루어지는 근대적인 독서의 체험이 아닌 버릇과 습관을 버르집음으로써 나 아닌 이에게로 ‘몸을 끄-을-고’ 나가는 것, “내가 너에게로 힘들게 건너가는 노동의 총체”(6쪽)와 다르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만남’과 ‘앎’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체험은 자신의 몸을 끄-을-고 나아가는 힘겨운 노동을 조건으로 함에도 ‘매혹’적인 사건으로 개인에게 낙착되곤 하는데, ‘나’의 버릇과 습성을 바꾸거나 버리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있는 이 ‘근기(체계노동)’와 ‘온기(정서노동)’라는 비용을 치르는 것이 ‘매혹’적일 수 있는 것은 그의 글이 읽는 이로 하여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게 한다’는 데서 연유한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사람’이란 “타자를 향해 몸을 끄-을-고 걸어가는 생활”(14쪽) 위에서 “동정적 혜안을 지닌 채로 사물과 사람을 향해 걸어가는, 함께 살아가고 어울리는, 나누는, 그리고 그 주변을 변화시키는”(15쪽) ‘몸이 좋은 사람’(동무同無)을 일컫는다. 이는 곧장 그가 말하고 있는 ‘비평’, 더 정확하게 말해 ‘총체적 비평’이나 ‘존재론적 비평’의 문맥과 닿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김영민이 쓰고 있는 ‘비평’은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문학/화 텍스트를 회집하고 재서술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비평가/평론가들의 그것과는 층위를 달리한다. ‘비평’과 ‘이론’을 비각으로 세워두고 있는 다름과 같은 대목을 통해 그가 조형하고 있는 ‘비평’의 문맥을 대충이나마 파악해볼 수 있다. “이론보다 한 걸음 더 현실의 착종 속으로 몸을 내미는 비평은 바로 그 탓에 더욱 현실에 즉물적으로 부화뇌동해서는 안”되며 “그 현실의 진실이 이론으로부터 부끄럽게, 혹은 무섭게 몸을 사리고 물러서는 자리 속으로 비평은 수동적으로, 느리게, 엿보면, 어긋나면서, 뒤늦게, 이드거나 찾아들어가야 하는 것”(22쪽)이 그가 말하는 비평의 요체일 텐데, 중요한 것은 이 ‘비평론’이 ‘존재론’과 잇닿아 있다는 것이다.



존재는 삶의 일상이 표현되는 다양한 결과층의 ‘너머’에서 추상되는 그 무엇이 아니라 그 일상의 표현형들 전체가 유기적으로 관련을 맺는 가운데 얻어지는 일관성이다. 그래서 그것은 무엇보다도 형이상학적·본질론적 개념이 아니다. 그 총체성은 복층의 구조물처럼 어느 하나를 생략한 채 구성되거나 획득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4층의 수량적 통합이 아니라, 4층이 서로 뗄 수 없이 상호연관되었기에, 그래서 그 상호연관적 일관성 자체가 하나의 ‘존재’를 이루었기에 비로소 가능해진다. ―37∼38쪽


 

형이상학적인 존재론이 아닌 일상의 낮은 자리에서 조형되는 삶의 일관성을 바탕으로 하는 존재론은 ‘나’의 ‘생각’과 ‘고백’의 외곽으로 나아가는 ‘공부’를 일컫는 것이며 이는 김영민이 오랜 시간동안 조형해온 ‘산책’과 ‘상처의 정치화’에 근거한 연대의 상상력을 밑절미로 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김영민의 글쓰기, 혹은 비평의 알짬을 비평론과 존재론의 잇닿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공동체론과 연결된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에게 인문학(人紋學)이란 “개인으로서는 영영 알 수 없는 어울림의 가능성을 탐구”(101쪽)하는 것이기에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비평’ 또한 외부가 없는 세속의 삶 속에서 외부가 되기 위해 체계와 창의적으로 불화하는 ‘어긋내기’와 자본제적 체계 속에서 “단말기적인 개인·소비자로부터 공동체 속의 동무·생산자로 자신의 신세와 운명을 바꾸려는 노동”(232쪽)으로써의 ‘어울리기’를 통해서 ‘익어가는(熟) 걸음(산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공동체란 개인이라는 ‘장소’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나의 세계’로 돌아오거나(자서전적인 태도, 혹은 고백과 소문의 구조)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자들의 슬기-온기-근기를 통해 “그 스스로를 오히려 숨기는 편이면서도 기꺼이 이웃을 도와 그 전체[체계]의 행로를 바꾸는 변침(變針)의 노동을 하는 번득임”(5쪽)이라는 ‘부사적 태도’를 통해 조형할 수 있는 ‘존재/비평의 숲’과 같은 것이다.


김영민은 이를 오랜 시간동안 ‘글’(사유)-‘말’(응대)-‘생활양식’(삶의 양식과 버릇)-미래형식으로서의 ‘희망’(체계와의 창의적 불화)이라는 (미래) 인문학의 4단계 중층구조로 설명해온 바 있다. 이 같은 <존재론-비평론-공동체론>이 보로메오의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는 그의 글쓰기(혹은 비평)가 안착하는 곳이 ‘세속’이라는 점은 거듭 강조해둘 필요가 있다. “비평은 우선 세속의 것이며, 이론과 함께 이론을 넘어가는 자리는 바로 그 세속(어야 한)다. 세속은 어디에서라도 ‘시작’할 수 있는 계기를 가리키”며 “생활 속으로 촘촘하게 이론이 내려앉지 못하면 비평은 없”기에 “가장 어려운 글쓰기가 비평이면서 또한 그 누구라도 끼적일 수 있는 가장 쉬운 글쓰기가 비평”(71쪽)이라는 입장은 “사상은 이미 삶 속에 있으며, 그 모든 자유는 우리 각자가 자신이 삶의 무늬(人紋) 속에서 일구어낸 실천적 계기만큼만 가능한 것”(101쪽)라는 대목과 연결된다. 이는 오랜 시간동안 그를 검질기게 따라다니는 세간의 오해(“기이한 표현을 사용한다거나, 심지어 ‘수사학적 신비주의’라거나, 낡은 우리말을 굳이 복원해서 독서의 비용을 높인다거나, 잦은 한자어의 사용이 성가시다거나, 하는 등속의 불만과 비판”, 52쪽)의 출처가 실은 다른 곳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 오해와 이해불가능은 다름 아닌 미래형식으로서의 ‘희망’이 다르기 때문이다.

 

희망은 선험적 원리로부터 발굴되는 것도 아니며 종교초월적인 물매에 의탁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사유(글쓰기)와 말하기(대인·대물관계)가 그의 생활양식과 일치하는 순간에 얻는 벡터로서의 희망인데, 그것은 인간의 처음(arche)에 장착된 것도 아니며 인간의 끝(telos)에 원려(遠慮)처럼 가물거리는 것도 아니다.

희망은, 지금 바로 이곳에서 그 누구도 아닌 ‘나(들)’가 일구어가는 인문(人紋)의 총체성에 의해 현실화하는 것이다. 다른 사유, 다른 대인·대물관계, 그리고 다른 삶의 양식이 지닌 불화(不和)의 생산성이 서로 수행적 순환성(performative circularity)의 일관된 관계를 갖게 될 때, 희망은, 마치 애벌레가 어떤 일관된 절차를 어렵사리 거치면서 돌이킬 수 없이 자신의 몸을 날개 속으로 접어넣고 날아오르듯이, 그렇게 자신의 날개를 현실화한다. 물론 그것은, 애벌레라는 몸과 날개라는 새로운 몸의 극적인 대조에서 보듯, 전혀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다. 그렇게 희망은 체계의 외부인데, 그것이 외부인 것은 희망을 현실화해낸 세 겹의 몸(사유, 대인·대물관계, 그리고 생활양식)이 비록 체계 속에 처하더라도 그 체계를 지나며 스치는 방식에서, 이미, 늘, 체계 외부적이었기 때문이다. (···) 마찬가지로 ‘희망은 어렵사리 배워야 한다’고 했을 때에, 체계의 타자로서의 그 희망이 두르고 있는 어려움은 학문이 아닌 ‘공부’의 어려움을 압축한다. ―53∼54쪽


 

‘이해할 수 없음’의 문제는 내용의 어려움이나 전달 방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의 양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의 말처럼 희망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처럼) 힘겹게 배워야 하는 것(84쪽)이며 자연스럽지 않은 체계의 외부이기에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몸을 끄-을-고 ‘나라는 세계’의 밖으로, 자본제적 체계의 외부로 나아가는 타자성의 지평이 없이는 ‘이해’도 ‘희망’도 없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이해’는 지적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몸’에 달려 있다고 해도 좋다. 그의 말처럼 몸은 “생활양식이 접히거나 펼쳐지는 경첩과 같은 장소”이며 “우리는 몸의 어떤 가능성 속에서 생활양식을 접어 이치들을 이렇게 거듬거듬 모아들이고, 역시 몸의 다른 가능성 속에서 생활양식을 펼쳐 다른 이치들을 저렇게 메지메지 나누어놓는 것”(83쪽)이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그것을 읽는 독자들과 그와 함께 ‘희망’이라는 ‘미래형식’을 이드거니 밟아가는 후학들로 하여금 ‘거울-핸드폰 사회’가 강요하는 자서전적 태도에서 연극적 태도를 통해서만 가닿을 수 있는 ‘동무’라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준다. 따라서 “내가 너에게로 힘들게 건너가는 노동의 총체”(6쪽)는 필자의 몫만도 아니고 독자의 몫만도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글은 안착하는 곳은 아카데미아도 아니며 자본제적 체계에 되먹히고 있는 대중 인문학도 아닌 인문(人紋)적 삶의 양식, 생활 정치라는 삶의 가장 낮은 자리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정은 그의 동무론 3부작
이 온전히 그의 힘으로만 씌어진 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그것은 숫한 학인들과의 어울림의 공부를 통해 캐낸 어휘와 이론과 개념들이 생활세계의 낮은 자리에 가라앉는 어리눅음(‘알면서 모른 체 하기’)을 통해서만 조형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글을 읽는(듣는) 것이 어려운 것은 어쩌면 그가 ‘산책을 하듯’ 글을 쓰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산책을 하듯’이라는 표현은 ‘형식’과 ‘내용’ 모두가 포함되어 있는데, 일찍이 그의 ‘유일한’ 스승인 윤노빈이 집중했던, 그 누구도 뚝심을 가지고 다루지 않았던 한국 철학에서의 ‘상처’의 문제*****를 중요한 주제로 삼아 검질기게 조형하고 있는 것이 그러하며 ‘비평’을 “텍스트 인식의 범위에 고착시켰던 습관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서구학문의 로고스중심주의를 깨고 인간활동의 수행성 전체와의 관련성 속에서 재구성”(70쪽)****** 하려는 시도 또한 이러한 문맥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나 ‘산책 하듯’이라는 표현의 알짬은 그가 혼자서 글을 쓰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의 글에서 산책의 호흡을 읽는다는 것은 20년 넘게 지속하고 있는 여러 공부모임에서 그와 함께 걸었던 동무들과의 어울림을 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영민의 글을 읽는 것이 불편한 것은 그간 우리가, 내가, 당신이 줄곳 혼자 걸어(써)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혹은 ‘나’와 ‘너’의 상처를 짐짓 모른 척 감추어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의 글을 읽는 것을 멈출 수 없다면 ‘함께’ 걷고 싶기 때문이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이 아닌, 오로지 함께-걷는 자(들)만이 갈 수 있는 그 ‘세속의 사잇길’을, ‘다르게 살기라는 소박한 명제’를 실천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내게 있는 꿈 중의 아름다운 꿈은 비평의 꿈입니다. 숱한 거목들의 화이불류(化而不流)로 가능해지는 ‘비평희 숲’이라는 꿈입니다. ‘몸이 좋은 사람들(동무들)’이 ‘비평적 개입’의 근기와 슬기와 온기로써만 이루어내는 비평의 숲이 내 눈앞에 어른거리는 꿈입니다. 비평이 성숙이 되고, 비평이 만남이 되고, 비평이 사귐이 되고, 비평이 평등이 되고, 비평이 자유가 되고, 비평이 해방이 되고, 비평이 치유가 되고, 비평이 구원이 되는, 전례가 없는 꿈입니다. 내게 있는 꿈 중에 아름다운 꿈은 비평의 꿈입니다. 그것은 다만 ‘살았기에 아름다웠던’ 꿈입니다. ― 14∼15쪽

 



지난 봄, ‘동무론 3부작’ 완간을 축하 하는 잔치(<동완치>)가 열렸었다. 사흘 남짓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독자와 후학들이 어울리던 그 잔치는 동무들의 잔치이기도 했지만 정확하게 “살아서 다시는 쓰지 못할” <동무론 3부작>에 힘썼던 ‘한 시절의 사라짐’을 애도했던 자리이기도 했다. 한 시절의 사라짐을 애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물론 자크 데리다의 논의처럼 애도가 상실된 대상, 타자를 자아의 내부에 위치한 일종의 지하 납골당에 안치하는 것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들이 ‘꿀꺽’ 삼켜버렸던 그 말-글들과 시간들을, 아니 바로 김영민이 긴 시간동안 조형해둔 수많은 어휘와 말들, 버릇과 생활들을 맛있게, 그리하여 삼킨 줄도 모르고 ‘꿀꺽’ 집어삼켜버렸던 그 행위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짊어질 수 있을까? 지난 봄,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삶을 살아 내고 있기에 비로소 아름다울 수 있는 꿈을 지니고, 불가능하기에 열리는 가능의 사잇길로 김영민은, 그와 함께 걸었던 한 시절은 아름답게 사라졌다.

 

 




* 김영민, <<비평의 숲과 동무 공동체>>, 한겨레출판사, 72쪽. 이하 인용 시 본문에 쪽수만 병기.

**이 문맥을 “비상에서 보행으로”(160쪽)라는 구절로 축약해볼 수도 있겠다. 김영민은 <<보행>>(철학과현실사, 2001)을 자신의 글쓰기 역사에서 한 분기점을 가지는 저서임을 강조하는데, 그 알속이 ‘비상에서 보행으로’라는 구절 속에 집약되어 있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비상에서 보행으로 : 고백 ‘밖’에서 만나는 하느님」을 참조.

***그가 자주 원용하고 변주하는 이론의 문맥은 얼핏 현란한 듯 보여도 언제나 삶이 놓여 있는 생활과 개별자들의 습관과 버릇 위에서 비로소 제 의미를 가진다는 점에서 그의 글은 ‘쉬운 편’이다. 그러나 한사코 알기를 기피하는 이들, 관계의 비용을 치르거나 관계의 책임으로부터 도망치는 데 익숙한 이들, 동굴 앞에서 ‘열려라 들깨’와 같은 무용한 주문을 외듯 ‘어렵다, 어렵다’만을 반복하고 있는 이들에겐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것’일 수밖에 없을 게다.

****<<동무와 연인>>(한겨레출판, 2008)과 <<동무론>>(한겨레출판, 2008), <<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한겨레출판, 2011)

*****이에 대한 자세한(혹은 유일한) 내용은 김영민, 「윤노빈, 시천주(侍天主)의 통일철학」(<<신생>> 47호, 2011년 여름호)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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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학문의 로고스중심주의에 대한 비판과 대안에 대한 사유는 <<탈식민성과 우리인문학의 글쓰기>>(민음사, 1996)에서부터 양상을 달리하며 이어져 오고 있다.



                                                _<<신생>> 48호, 2011년 가을호에 기고
 



 20일간 일본에서 체류하며 김영민 선생의 글을 다시 읽었다. 숙소 근처에 근대박물관이 있어 짬이 날 때마다 그곳에서 책을 읽거나 메모를 했다. 요코하마는 내가 군복무를 하던 '철원'만큼이나 더웠고 그곳보다 더 습했다. 열람실에 도착하면 늘 땀 범벅이었다. 별다른 성과도 없었지만 나는 도서관 가는 데 꽤나 애를 썼던 거 같다. 그럼에도 어떤 힘이 나로 하여금 서평 쓰는 것을 방해 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것은 나의 '허영'에 다름 아니었다. 좀 더 보고, 한번 더 보고, 다른 책들도 참조해서라는, 이유들이 글쓰기를 방해 했다. 그렇게 여름이 다 가버렸다. 아직 쓰지 못한 글이 산더미고 원고 마감이 지나버린지는 이미 오래다. 스스로 만족스러운 글을 써본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 카페 헤세이티 1주년 기념 연속 특강 <다시, 응해서 답하다>의 첫번째 논평자로 참석한 적이 있는데, 그날 밤 선생과 함께 술 한잔 하지 못한 게 두고두고 아쉽다. 그날 미처 하지 못한 말(열심히 메모해두었던 그 말!)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