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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과 사진, 고백과 글쓰기

by 종업원 2011. 6. 22.

 

스무 살이 한참 지난 나이지만 ‘∼씨’보다 ‘∼양’이라 불리기를 원하는 여성이 있다. 그녀는 틈만 나면 거울을 보고 주변사람들이 진절머리를 칠정도로 열성을 다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고백’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거울 보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없다. 사람들 앞에 설 ‘자신감’은 없지만(‘∼씨’가 된다는 것은 사람들 앞에 홀로 서는 것이다. 그/녀와 마주본다는 것이다) ‘자신’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는 듯(‘∼양’이라는 호칭 주변에는 그래도 ‘난 소중해’라는 유아적인 정서가 둘러싸고 있다) 쉼없이 거울을 보고 고백을 하는 그 여성의 손에는 늘 핸드폰이 쥐어져 있다.

영화 <미쓰 홍당무>(이경미, 2008)는 볼이 빨개지는 콤플렉스를 가진 ‘양미숙’이라는 인물을 초점화 하고 있기에 ‘어느 왕따 여성의 망상적 고군분투기’쯤으로 해석되곤 하는데, 정작 이 영화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은 ‘자기진술’의 구조와 그것의 변화과정에 있다고 하겠다. 영화의 프롤로그에 제시되는 “세상이 공평할 거란 기대는 버려. 우리는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해”라는 전언이 이 시대의 모든 젊은이들에게 해당되는 문구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양미숙의 ‘자기진술’ 또한 ‘볼이 빨간 왕따’만의 문제일 수는 없다.


한 손에 핸드폰을 쥐고 거울을 보며 쉼없이 자신의 감정에 대해 늘어놓는 모습이야 어디서든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풍경이기에 오늘날을 ‘고백이 넘쳐나는 시대’라 새삼 인식하지 않아도 좋다. 이른바 ‘신상 캐기’에서부터 ‘생얼’에 이르기까지 남김없이 파헤치고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을 능력이나 미덕으로 간주되는 상황 아래에,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CCTV와 실시간으로 자신의 위치를 전송해주는 GPS의 시선이 둘러싸고 있으며,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노출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블로그나 트위터류의 쇼셜 네트워크가 화해롭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작금의 상황 속에서 ‘고백’ 혹은 ‘자기진술’이 함의하는 바를 다시금 따져 물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실로 모든 것들이 ‘고백’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은 외려 ‘내면이 없는 세대’, ‘고백을 할 수 없는 세대’, ‘<나>가 희박한 세대’가 자신들의 전도된 욕망을 과잉 분출하고 있는 것이라 바꿔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숫한 ‘고백의 현장’에서 우리는 매번 스스로를 기투(企投)할 때만 가까스로 존재감을 획득할 수 있는 불안의 시대를 살고 있는 세대의 정서를 얼핏 엿보게 된다. 저 뽐내기 좋아하고 ‘고백’을 입에 달고 다니며 ‘솔까말’(솔직히 까놓고 말해)이라는 수사를 통해서만 발화가 가능한 이들에게 정작 ‘자기 긍정’의 에너지가 결여되어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으며 틈만 나면 ‘셀카’를 찍거나 거울 들여다보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젊은 세대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희박한 자존감’을 애써 위무하거나 흰 종이에 빽빽이 영어단어를 채워넣어야만 안심이 되는 수험생의 불안과 같은 정서를 감지하게 된다. 사정이 이럴 때 젊은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거울을 더 자주 본다는 것, 핸드폰에 대한 의존율이 더 높아 보인다는 것, ‘셀카’를 더 많이 찍는다는 단순한 사실이 ‘자존감의 결여’뿐만 아니라 이 사회가 그들에게 부가하는 생존의 공포가 더 크다는 사실을 새삼 인지하게 된다. 쉼없이 거울을 들여다보고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모습이야말로 더 많이 상처받고 있다는 증표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 내내 피부과 의사에게 자신의 상태에 대해 쉼없이 고백하는 <미쓰 홍당무>의 ‘양미숙’이 단 한시도 핸드폰을 손에서 내려놓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카메라는 양미숙의 끈질긴 자기 진술 사이에 한손에 쥐어져 있는 핸드폰을 여러 차례 클로즈업(close-up)함으로써 그 진술의 메커니즘을 슬며시 드러내는데, 아무리 고백을 해도 그 고백은 전달되지 않고 한 손에 쥔 핸드폰을 통해 획득한 정보는 대개가 자기망상적인 것에 가깝다. 숨넘어갈 듯한 자기진술로 인해 타인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한 손에 쥔 핸드폰으로 인해 타인들의 손을 잡지 못한다는 사실. 한 철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양미숙’으로 표상되는 핸드폰과 거울 속에 감금되어 있는 젊은 세대들은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문(門)을 얻지 못한 채 기껏 세상을 구경하는 창(窓)에 만족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그 창을 아예 거울로 바꾼 채 나르시스 속에 자폐하는 현실을 가리키는 것이라 하겠다(김영민).

<미쓰 홍당무>를 끝없는 망상(고백)으로 관계 맺기에 실패하던 양미숙이 비로소 상대와 마주해 ‘난 니가 참 마음에 든다’라는 발화를 하기까지의 여정, 다시 말해 한 손에 거머쥔 핸드폰을 내려놓게 되는 여정이라는 축으로 요약가능하다고 할 때, 무엇보다 흥미로운 사실은 고백을 멈추고(핸드폰을 내려놓고) 상대를 마주하게 되는 동력이 외려 쉼없는 ‘자기진술’로부터 비롯된다는 데 있다. 일견 ‘삽질’(실제로 영화의 초반부에 양미숙이 하릴 없이 삽질을 하는 모습이 몇 차례 보여지기도 한다)처럼 보이던 그 자기진술이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으려는 중요한 동력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양미숙의 당착적이고 끈질긴 자기진술 속에서 위대한 자기긍정의 에너지를 발견할 수도 있지만 그 진술이 또 다른 왕따 ‘서종희’와의 ‘이인조 놀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는 사실 또한 놓쳐서는 안 된다. 등을 맞댄 채 상대를 제 등에 실어 올려주는 특이한 형식과 함께 ‘참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제가 더 고맙습니다’라는 서로의 존재에 감사하는 대화로 이루어진 기이한 행위를 통해 맺게 되는 관계의 양식은 타인과 스스로를 긍정하는 ‘연극적 수행’에 다름 아니다. ‘고백’이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는 길을 트는 중요한 동력으로 변주되는 형국, 그들의 ‘이인조 연극’은 ‘나’로부터 시작하지만 결코 나 홀로 수행할 수 없고 내 안에 머무는 것을 끝내 불가능하게 만드는 ‘글쓰기’의 맥락과 묘하게 닮아 있다.

‘고백’은 ‘독백’으로 경사되기 마련이지만 ‘<나>가 희박한 세대’에게 ‘고백’은, ‘자기진술’은 여전히 스스로의 존재를 긍정할 수 있는 ‘에너지’가 내장되어 있는 중요한 동력이기에 무작정 폐기할 수만은 없을 듯하다. 그렇다면 이 에너지를 다음과 같이 변주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셀카’를 찍던 기술을 주변의 사람들을 담아내는 데 활용해보도록 하자. 뷰파인더 속에 ‘나’는 부재하지만 그들을 담아냈던 사진 속에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과 표정이, ‘셀카’로는 결코 포착되지 않는 '나'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부재를 통해서만 얼핏 드러나는 '나'의 형상. 타인의 시선에 포착된 내 모습을 인정하기란 죽기보다 힘든 일이겠지만 타인과의 만남은, 그리하여 내가 모르는 '나'와의 만남은 바로 그 '죽어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 그것을 거울과 사진의 차이, 고백과 글쓰기의 차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

  


<백년어> 소식지 7호에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