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은3

가난이라는 외투를 입고 다니는 사람 2023. 7. 19 지난달부터 생각나는대로 하루 계획표를 짜보고 있다. 열 가지 정도 적어두어도 서너 개도 지우지 못하는 날이 대부분이라 흥미가 점점 떨어지지만 여름이 끝날 때까지 이어간다면 근처에서 뭔가를 주울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 덕에 매일 시 한 편 읽어야겠다 마음 먹었다. 조은 시인이 펴낸 『옆 발자국』(문학과지성사, 2018)을 가방에 넣고 다닌다. 하반기 프로그램 주제를 '가난'으로 잡아두었는데, 조은 시인이야말로 가난이라는 외투를 입고 다니는 사람이다. 가난을 감추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난을 애써 위무하거나 과시하지도 않는다. 주변엔 온통 가난한 것 투성이어도 흐릿하거나 막연한 것 하나 없이 맑고 뚜렷하다. 예전에 읽었던 산문집과 시집엔 당당함이 묻어 났는데, 이번 시.. 2023. 7. 19.
나 아닌 것과 함께―조은, 『또또』(로도스, 2013) 산책 : 결코 우리가 될 수 없는 상처 받은 채 사직동 낡은 집으로 왔던 작은 존재 ‘또또’와 시인 조은은 함께 살았던 17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루 두 번 산책을 했다. 아픈 또또를 위해 나섰던 매일매일의 산책에서 그들은 광화문 일대와 막 개방되었던 인왕산 숲길을 빠짐없이 익혔고 마침내 ‘그들만의 길’이 생길 정도가 되었다. 상처 받은 이는 걷는다(김영민). 건강을 위해서나 삶의 여유 따위를 위해 걷는 게 아니다. ‘걷기’라는 기본적인 행위에도 이미 들러붙어 있는 자본제적 습속과 이윤 추구를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있는 목적을 잊고, 상처 받을 수밖에 없는 세속의 체계 바깥으로 나-아-가-보기 위해, 없던 길을 찾으며 걷는다. 오랫동안 독신 생활을 해온 시인 조은은 원래 산책을 즐겨하고 좋아했을 것.. 2017. 10. 14.
선물의 자리 : 부음(訃音)이 용서로 부화할 때 2017. 8. 28 계란 한 판 두부 한 모 처음 만난 사람에게서 계란 한 판과 두부 한 모를 받았다 아직 친구라고 할 수 없는 그는 처음 우리 집에 왔고 그를 만난 것도 처음이다 그가 있을 때 골목으로 두부 장수가 종을 흔들며 지나갔다 계란을 오래 두고 바라봤다 밖에 나갈 때나 밤늦게 돌아올 때나 마당에 우두커니 서게 되는 나의 마음이 슬픈 것에 매번 놀라며 그러다 한 친구의 소식을 들었다 죽은 줄 알았던 친구 그래서 한 번에 용서할 수 있었던 친구 살아 있었다 나와 가까운 곳에서 그 옛날 우리가 있던 곳에서 한꺼번에 부화된 어두운 시간들이 ⏤조은, 「계란 한 판 두부 한 모」, 『따뜻한 흙』, 문학과지성사, 2003. 처음 만나는 사람이 계란 한 판을 사들고 집으로 방문했다.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에.. 2017. 9.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