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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용

선물의 자리 : 부음(訃音)이 용서로 부화할 때

by 종업원 2017. 9. 3.

2017. 8. 28

 

 

  

란 한 판 두부 한 모

처음 만난 사람에게서
계란 한 판과 두부 한 모를 받았다
아직 친구라고 할 수 없는 그는
처음 우리 집에 왔고
그를 만난 것도 처음이다
그가 있을 때 골목으로 두부 장수가
종을 흔들며 지나갔다

계란을 오래 두고 바라봤다
밖에 나갈 때나
밤늦게 돌아올 때나
마당에 우두커니 서게 되는 나의 마음이
슬픈 것에 매번 놀라며

그러다 한 친구의 소식을 들었다
죽은 줄 알았던 친구
그래서 한 번에 용서할 수 있었던 친구
살아 있었다
나와 가까운 곳에서
그 옛날 우리가 있던 곳에서 한꺼번에 부화된 어두운 시간들이
⏤조은, 「계란 한 판 두부 한 모」, 『따뜻한 흙』, 문학과지성사, 2003.

 

처음 만나는 사람이 계란 한 판을 사들고 집으로 방문했다.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에게 열려 있는 곳이었던 것일까. 케익도 아닌 계란 한 판은 외롭고 가난한 사람의 신분증처럼 보인다. 적빈한만큼 반사회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는 시인의 이력을 염두에 둔다면 절실하고 절박한 이들이 무례함이라는 문턱을 숨가쁘게 넘어 그곳으로 속절없이 이끌린 것이 아니었을까. 시인은 주로 듣고 있었을 것이고 방문객은 대단한 비밀이라도 털어놓는 것 마냥 사뭇 진지하게 ‘고백’ 했을 것이다. 골목을 지나가는 두부 장수를 불러 두부 한 모를 샀을 정도면 고백의 시간(자신이 얼마나 괴롭고 힘든지, 그리고 억울한지!)이 충분했었나보다. 누군가의 고백을 잠자코 들어야 했던 것처럼 시인은 낯선 방문객을 위해 말없이 찌게를 끓였을까. 그가 누구이고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에 대해서 한 마디의 말도 없다는 데 눈길이 간다. 내내 들을 수 있는 사람만이 가끔 고백을 멈추고 그 너머를 응시한다. 

 

두부 한 모처럼 한번에 다 먹어버렸으면 좋으련만 계란 한 판은 불청객 마냥 그 집에 덩그러니 남아 있다. 누군가가 남겨두고 간 계란 한 판이 알지 못했던 시인의 슬픈 마음을 비춘다. 선물은 호의의 산물이 아니라 불법점거에 가까우며 차라리 침입자 같다. 선물이 호의의 표정으로 쉽게 교환될 때 함께 있으면서도 쉼없이 각자의 ‘셀카’를 찍어대는 연인들처럼 오직 자신만을 비춘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모든 선물이 침입자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상대의 독백적 호의를 서늘한 선물로 바꾼다. 

 

선물은 주는 것도 쉽지 않고 받는 것도 어렵다. 우리는 쉼없이 선물을 주고 받지만 줄 수 없는 것을 주려 하고 받을 수 없는 것을 받으려 애쓰는 일은 드물다. 선물을 받는다는 건 가치와 쓰임의 효용성을 생각하기 전에 ‘없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침입을 내가 복음으로 받아 안을 수 있을까. 너의 고백 속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을까. 집안 한 구석에서 천천히 썩어가던 계란 한 판이 한꺼번에 부화할 수 있을까. 죽은 줄로만 알았던 친구의 소식을 들은 시인은 그의 살아 있음에 지난 날의 잘못을 한번에 용서한다. 내 집에 침입자의 자리를 놓아두는 건 부음을 용서로 부화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조은 시인이 17년간 전세로 살았던 서울 사직동 집 (사진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226200844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