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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요방4

나 아닌 것과 함께―조은, 『또또』(로도스, 2013) 산책 : 결코 우리가 될 수 없는 상처 받은 채 사직동 낡은 집으로 왔던 작은 존재 ‘또또’와 시인 조은은 함께 살았던 17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루 두 번 산책을 했다. 아픈 또또를 위해 나섰던 매일매일의 산책에서 그들은 광화문 일대와 막 개방되었던 인왕산 숲길을 빠짐없이 익혔고 마침내 ‘그들만의 길’이 생길 정도가 되었다. 상처 받은 이는 걷는다(김영민). 건강을 위해서나 삶의 여유 따위를 위해 걷는 게 아니다. ‘걷기’라는 기본적인 행위에도 이미 들러붙어 있는 자본제적 습속과 이윤 추구를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있는 목적을 잊고, 상처 받을 수밖에 없는 세속의 체계 바깥으로 나-아-가-보기 위해, 없던 길을 찾으며 걷는다. 오랫동안 독신 생활을 해온 시인 조은은 원래 산책을 즐겨하고 좋아했을 것.. 2017. 10. 14.
그 사이를 다만 걸을 뿐―서른 아홉번째 <문학의 곳간> 2017. 9. 30 중앙동 '히요방'_봄이 / 2017. 9. 30 / (39회) 네 발 짐승이 까치발을 하고 두 발로 서서 창밖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더 높은 곳에 올라서고 싶은 것인지, 위태롭게 기대어 서보고 싶은 것인지 짐작 하기 어려운 것은 커튼 사이로 몸을 감추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동물과 아이의 눈동자가 아무리 맑고 초롱초롱하다고 해도 정작 그 눈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신묘한 동물이라고는 하나 어느새 (도시)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어버린 고양이가 높은 곳에 오른다고 해도 필시 위에서 아래를 조망하며 세상을 풍경화로 단순화시켜 감상하고자 하는 인간의 시선(권력)과는 다른 방식으로 바깥을 보고 있을 게다. '바깥'을 기웃거리게끔 유혹하고 '너머'를 상상할 수 있는 순간을.. 2017. 10. 1.
아무도 모르게 일어나는 기적―윤성희, 『베개를 베다』(문학동네, 2016) 1 윤성희의 『베개를 베다』를 읽다가 어째서인지 드문드문 언급되는 음식을 옮겨 적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곁에 노트를 펴두고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음식의 이름을 적어가며 소설을 읽었다. 노트에 옮겨적으면서 기이할정도로 음식이 많이 나온다는 것을 알게되었지만 그렇게 빈번하게 나오는 음식이 그토록 아무런 의미도 없이 계속 나온다는 것이 기이하게 여겨졌다. 단 한번도 ‘맛있게 먹었다’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 특별할 것 없는 음식의 목록을 이토록 강박적으로 등장시키는 이유는 뭘까. 소설을 읽어갈수록 음식의 목록은 많아졌지만 소설에서의 역할과 의미는 더 옅어졌다. 그렇고 그런 음식들, 먹어도 그만이고 먹지 않아도 그만인 음식들, 너무 맵거나 식어버려서 ‘맛’을 제대로 느낄 수도 없는 음식들, 먹다남은 것이거.. 2016. 10. 18.
누수를 살아내는 것-최정화, 『지극히 내성적인』 집에 지하실이 있다는 걸 안 건 재작년 이사 올 때였다. 공간만 넓을 뿐 별다른 쓸모를 찾을 수 없어 한동안 잊고 있었다. 작년 겨울 초입에 보일러가 고장 나서 지하실로 내려가보니 바닥에 물이 반뼘정도 차 있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지하실에 물이 차올라 구석에 놓여 있던 보일러까지 고장 난 것이다. 그 때문에 한달 정도 냉방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고 지독한 감기보다 더 지독했던 집주인과의 고약한 실랑이 이후로는 일주일에 한번정도 지하실에 내려와 물을 퍼내곤 했다. 오래된 벽을 타고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눈으로만 확인할 수 있을 뿐 막을 방법은 없었다. 건물 내부에 누수가 있는 것은 분명해보였지만 그걸 찾기 위해 이 오래된 건물의 벽을 뜯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면 누수는 한두 군데가 아닐.. 2016. 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