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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곳간

아무도 모르게 일어나는 기적―윤성희, 『베개를 베다』(문학동네, 2016)

by 종업원 2016.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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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희의 『베개를 베다』를 읽다가 어째서인지 드문드문 언급되는 음식을 옮겨 적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곁에 노트를 펴두고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음식의 이름을 적어가며 소설을 읽었다. 노트에 옮겨적으면서 기이할정도로 음식이 많이 나온다는 것을 알게되었지만 그렇게 빈번하게 나오는 음식이 그토록 아무런 의미도 없이 계속 나온다는 것이 기이하게 여겨졌다. 단 한번도 ‘맛있게 먹었다’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 특별할 것 없는 음식의 목록을 이토록 강박적으로 등장시키는 이유는 뭘까. 소설을 읽어갈수록 음식의 목록은 많아졌지만 소설에서의 역할과 의미는 더 옅어졌다. 그렇고 그런 음식들, 먹어도 그만이고 먹지 않아도 그만인 음식들, 너무 맵거나 식어버려서 ‘맛’을 제대로 느낄 수도 없는 음식들, 먹다남은 것이거나 유통기한이 한참 지나버린 음식들의 목록을 한참을 들여다보니 그것들이 기록되지 않았고 기록될 수 없는 평범한 것들의 특색없는 역사처럼 여겨진다. 그 음식들의 목록을 아래에 옮겨둔다. 



배춧국, 천혜향, 오이소박이, 도가니탕과 수육, 삼계탕, 칼국수, 닭강정, 누룽지 삼계탕, 오리백숙, 백숙, 비빔국수, 냉이무침, 물에만 밥과 김치, 감자볶음+김+김치찌개, 아이스크림, 우유, 부침개, 바게트+수프, 참치김치볶음밥, 막국수, 바베큐, 된장찌개, 사발면, 불고기백반, 계란후라이, 상추쌈+생마늘, 청양고추, 불고기+공기밥+사이다+맥주, 삼각김밥과 두유, 두부가 들어간 김치찌개, 제육볶음, 소시지, 사발면, 국수, 오이+풋고추+고추장, 쫄면, 막걸리+홍어무침+머릿고기+소주+단무지무침, 옥수수, 짬뽕+볶음밥, 계란말이+장조림, 콩나물무침, 죽, 라면, 캔맥주와 천하장사 소시지, 치킨+닭발+닭똥집, 쫄면+콩국수, 막걸리, 무한 리필 돈가스, 김치전, 두부, 즉석떡볶이, 닭똥집+청하, 백반정신+소시지, 돼지갈비, 유통기한이 지난 냉동만두, 짬뽕과 쌍화탕, 감자탕, 자판기 커피, 잡채밥과 이과두주 그리고 군만두, 스크럼블 에그, 멸치를 넣은 주먹밥, 먹다남은 떡볶이+맥주, 파전+막걸리, 해물탕, 갈비, 연어샐러드, 육회, 먹다남은 어묵볶음을 넣은 라면, 맥주+프라이드 치킨+뻥튀기, 아메리카노+캐러멜마키아또, 오돌뼈+매운 홍합탕+계란말이, 호빵, 우동+소주, 동치미+막걸리, 제육덮밥+어묵볶음+콩나물무침, 전복죽+장조림, 보리차+즉석 죽, 김밥, 콩나물 해장국, 생강차, 커피, 짜장면, 돈가스, 크림 수프+커피, 갈치구이정식, 맥주, 매운닭발+달걀찜, 



이 음식들은 표정이 없는 엑스트라처럼 소설 속에 등장 했다가 금새 사라져버려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거 같지만 이야기 사이에 무심하게 끼어 무관해보이는 사연들을 잇기도 하고 인물들이 잠시나마 안정을 취할 수 있게 돕기도 한다. 그저 먹었거나 먹을 뿐 어떤 맛이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맵고 짜다는 인색한 평가나 평범 이하의 맛 이외엔 별다른 언급도 없다. 형편없는 음식들이라고 말하기엔 음식이 잇고 있는 사연과 관계가 애틋하지만 그렇다고 잊을 수 없는 특별한 ‘요리’라고 부를 수도 없다. 언제라도 다시 먹을 수 있는 그렇고 그런 음식들이지만 왠지 그때 말고는 먹을 수 없을 것만 같은 특별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제사상에 올라온 고인(故人)이 특별히 좋아했던 패스트푸드처럼 한없이 평범하지만 다시는 먹을 수 없는 비범함의 모습으로 소설 속 인물들의 일상과 생활 속에 가만히 업드려 있는 것만 같다.



읽고 있는 순간만큼은 가장 좋은 소설, 그러나 읽고 나서는 기억나지 않는 소설. 내겐 윤성희의 소설이 그렇다. 윤성희의 새 소설집을 읽으며 지난 소설들을 떠올려보려고 했다. 읽었던 소설들은 읽었다는 사실만 기억날 뿐 거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소설을 읽는 시간, 나는 종종 그게 못내 못마땅하고 가끔 민망했었는데 윤성희의 소설을 읽으면서 읽었던 소설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며 어쩌면 그건 조금 다행스런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소설을 읽으면서 기대하는 것은 잊혀지지 않을 강렬한 이야기가 아니라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사실을 희미하게나마 알리고 그 이야기를 따라가는 일이라면 오직 소설을 읽고 있을 때만, 그 소설에 입회해 있을 때만 소설과 만날 수 있다. 그 이후엔 이야기의 잔상만이 남을 뿐이다. 천천히 스미듯 소설 속 이야기에 어렵사리 입회했을 때만 할 수 있는 말이 있다. 그건 감정의 정련과 고요함이라는 비용을 치를 때만 잠깐 허락되는 권리이며 사치다. 그러니 읽었던 소설이 기억나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도 있겠지만 우리가 소설을 읽는 것은 굵직한 서사나 강렬한 문장들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이야기의 결을 조심스레 따라가며 가 닿을 수 없는 감정들과 잠시나마 접속하는 순간을 위해서가 아닐까. 소설을 읽고 있는 시간 속에서만 어떤 삶에 관해, 어떤 감정에 관해, 어떤 희망에 관해 잠시 입회해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그때 읽었던 이야기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 이야기와 함께 깊게 내려가 조우했던 감정들은 이미 삶속에 스며 있을테니 말이다. 설사 그 이야기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누군가를 만나고 사귀는 일 또한 그와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마치 바다밑으로 잠수하는 잠수부처럼 끝을 알 수 없는 아래를 향해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목숨을 걸고서 행하는 허망한 일은 소설 읽기를 닮아 있다. 잠수부는 숨을 참을 수 있는 그 잠깐의 시간 동안만 바다의 심연을 경험할 수 있다. 그 누구보다 바다의 깊은 곳까지 가봤던 이만이 바다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다. 소설이 가닿고자 하는 삶의 심연, 예정없이 마주해야 하지만 걷잡을 수 없이 멀어지는 삶 속에 도사리고 있는 우연들, 그리고 의도를 비껴나갈 때만 잠깐 그 뒷모습을 보여주는 관계의 진실. 소설을 읽는 시간이란 삶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는 태도를 배우고 경험하는 시간임을 윤성희의 소설을 읽으며 알게 된다. 



3

윤성희 소설 속에 깊게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일상이 아니라 무심한 표정으로 도둑처럼 왔다가는 재난이다. 거의 소설 속의 인물들이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을 겪고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평범한 일상은 재난 이후의 시간일 터, 그때 평범한 일상이야말로 경이로운 것이라고 해야 한다. 삶속엔 불행과 재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에게 삶은 그저 불행하거나 재난으로 모든 것을 송두리째 앗아가버린 불공평한 게임처럼 여겨지겠지만 그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는 이들이 소리도 미동도 없이 경작하는 일상이라는 텃밭엔 경이로움이라는 작물이 무심하게 자라고 있다. 윤성희에게 소설 쓰기란 그 경이로움이 우리 삶에 깃드는 결정적인 순간을 멈춰세워 세세하게 매만지고 경탄하며 구체화하는 일이 아니라 스쳐지나가버리는 삶의 경이를 ‘아!’하는 감탄사도없이 그저 지나가는 것을 수락할 수 있게 돕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런 일이 있었지’라고 무덤덤하게 이야기되지만 ‘그런 일’을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 특화된 기억 속에 장기투숙객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아쉬움이나 원한 없이 ‘그런 일’ 바깥으로 나가는 일을 윤성희는 결정적인 선택이나 결단이 아닌 일상으로 내려앉혀 ‘그런 일’ 이후를 살아가는 모습을 고요하게 그려내고 있다. 기적은 번개처럼 내려쳐 모두를 깨우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음식 속에 깃들어 있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 감당할 수 없는 불행과 재난 이후의 시간을 그리고 있는 윤성희 소설 속엔 마법 같고 기적 같은 순간들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평범한 음식들처럼 곳곳에 쟁여져 있다. 자살해버린 언니의 다이어리 맨 앞장에 적혀 있는 단어들을 주문처럼 무심히 외는 일. “숲. 꼬깃꼬깃. 도마뱀. 삽. 바닥.” 의미를 알기 어려운 그 단어들을 주문처럼 욀 때 단어와 단어 사이에 놓여 있는 절벽과 같은 심연이 어느새 매워져 ‘하나의 단어로’, “별들이 별자리를 만드는 것처럼”(<못생겼다고 말해줘>, 53쪽) 연결될지도 모르겠다는 바람은 다른 곳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달빛에 생긴 무지개에 대해 딸을 잃고도 슬픈 내색을 하지 않는 어머니의 말. “거봐, 세상에 이런 게 있을까 싶으면 꼭 있더라.”(53쪽) 윤성희 소설 속에 나오는 주문들은 특별한 것들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단어들을 생소하게 불러보는 일, 너무 익숙해서 그 단어들을 얼마나 빨리 발음하는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른 리듬과 호흡으로 불러보는 일, 익숙한 사람의 이름을 그렇게 불러보는 일. 다른 사람과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생소한 발음을 해보는 그 순간, 그곳에서만큼은 모든 것의 결이 조금 달라질 수 있다. 일상의 흐름 속에서 아무런 표식 없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기적의 파동을 감지하는 일에 대해 윤성희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어느 날 문득’을 좋아합니다. 어느 날 문득의 세계가 곧 기적과 우연의 세계와 연결된다고 봅니다.”(윤성희, 신형철 대담, <상상해, 공동체>, 『문학동네』, 2010년 겨울호 48쪽, 강동호 『웃는동안』해설에서 재인용 285쪽) ‘미어지다’(<베개를 베다>, 110쪽)와 ‘봉두난발’(111쪽)이라는 익숙한 말에 물음표를 달아보는 일은 일상 속에 흐르고 있는 기적의 파동을 감지해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99가지 음식을 파는 분식점과 104가지 종류의 음식을 파는 식당에서 평범하고 지루한 음식을 하나씩 먹어가는 일은 특별함이 삭제되어 있는 탓에 ‘무기력’의 정서가 깊게 베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윤성희는 익숙한 것들 속에 쟁여져 있는 기적을 불러내는 주문을 욀 것을 우리에게 요청한다. 일상 속의 주문, 일상이라는 주문. 일상은 저절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무심하지만 염원을 담은 주문을 외움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는 마법 같고, 기적 같은 세계라는 것. 많은 인물들이 꿈속에서 차마 하지 못했던 대화를 이어가는 장면들을 떠올려보자. 꿈속에서라면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을 수 있다. 윤성희 소설을 읽어가면 그 특별한 순간이 일상 속에서 감당했던 불행과 재난 이후를 살아가고 있는 모두가 누려야 하는 지복이자 권리라는 것을 알 게 된다.  



<문학의 곳간> 31회 with 김비_중앙동 '히요방'_2016년 10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