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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곳간

누수를 살아내는 것-최정화, 『지극히 내성적인』

by 종업원 2016. 5. 6.

 

 

 

 

집에 지하실이 있다는 걸 안 건 재작년 이사 올 때였다. 공간만 넓을 뿐 별다른 쓸모를 찾을 수 없어 한동안 잊고 있었다. 작년 겨울 초입에 보일러가 고장 나서 지하실로 내려가보니 바닥에 물이 반뼘정도 차 있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지하실에 물이 차올라 구석에 놓여 있던 보일러까지 고장 난 것이다. 그 때문에 한달 정도 냉방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고 지독한 감기보다 더 지독했던 집주인과의 고약한 실랑이 이후로는 일주일에 한번정도 지하실에 내려와 물을 퍼내곤 했다. 오래된 벽을 타고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눈으로만 확인할 수 있을 뿐 막을 방법은 없었다. 건물 내부에 누수가 있는 것은 분명해보였지만 그걸 찾기 위해 이 오래된 건물의 벽을 뜯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면 누수는 한두 군데가 아닐지도 모른다. 거의 모든 곳이 조금씩 새고 있는 것이라면 손쓸 수 없다고 할지라도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저 물방울이 차라리 무기력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희망의 증표인지도 모른다. 지난 겨울 내내 지하실 바닥에 차 있는 물을 퍼내며 누수가 이 집의 열악함을 가리키는 표지가 아니라 모든 집의 조건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알지만 막을 수 없는 것이, 차마 확인하기 겁나는 것이 어디 집의 내부에만 해당할까. 생활에도, 관계에도 누수가 있을 것이다. 알고 있다고 해도 당장 해결할 수 없어 고작 플라스틱 대야 하나를 받쳐놓을 수밖에 없는 누수란 삶의 결락이 아니라 삶의 조건인지도 모른다.

 

 

누수는 어딘가에 문제가 있음을 알리는 경고이면서 동시에 삶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단서이기도 하다. 누수라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와 대면하면서 우리가 고민하는 것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기보단 이 문제와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라고 생각한다. 완벽하게 표백되고 계획에 따라 한치의 어긋남 없이 제어되는 삶이 없듯이 누수 없는 삶 또한 없다. 누수가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외부와 내부가 들고나는 경로의 문제임을 환기해보자. 수돗물이든 빗물이든 누수란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온 것의 순환 문제다. 폐쇄되어 있다면 누수도 없다. 이런 비유를 해볼 수도 있겠다. 어떤 관계가 파괴되었을 때 우리가 종종 되뇌게 되는 익숙한 회한의 말, ‘당신이 이런 사람인지 몰랐다라는 그 때늦은 발견(혹은 깨달음)이 관계의 절망이 아닌 어리석음의 반복에 가깝지 않은가. ‘그런 당신이었기에 내가 만날 수 있었음을, 말하자면 누수야말로 관계의 조건이었음을 환기해본다면 말이다. 때로 관계의 역사는 누수의 역사를 경유해서만 드러나기도 한다. 관계의 조건이기도 한 누수가 부풀려지고 과장되어 마치 상대에게 속은 것과 같은 흉물스러운 결락으로 도착할 때, ‘당신이 이런 사람인지 몰랐다는 배신감이 관계의 역사를 휘감아버린다. 한계(누수)가 없다면 만남도 없다. 그 한계를 절망이 아닌 조건으로 수락하는 일. 나는 그것이 도처에 산재한 누수와 함께 살아가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사람들은 자기 집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던 이는 카프카(이승우). 삶의 진실은 알지 못했던 무언가를 발견할 때가 아니라 알지 못함에도 함께 살고 있음을 수락하고 또 인지할 때에만 도착한다. 예측할 수 없고 인지하기도 어려운 누수, 수많은 틈에 의해 우리는 서서히 몰락하지만 오직 그 틈을 통해서만 달라질 수 있다. 달라진다는 것이 더 나아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더 살아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절망일지라도 더 만날 수 있다는 것만을 의미할 뿐이다. 최정화의 소설을 읽으며 이 작가가 그리고 있는 인물들의 삶 또한 그와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한결 같은 신경증과 증후군, 그리고 착각과 거짓말은 그들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단서지만 그 누수에 집중한다고 해서 그들의 삶을 마침내 이해하게 되거나 감춰졌던 진실을 알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들의 삶은 모두 조금씩 붕괴되고 있고 그것을 안다고 해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어보인다. 붕괴는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사실 그런 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삶은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붕괴되고 있었던 것처럼 여겨지는 데 그것은 그들의 일상이 바로 조용히 붕괴되어 간다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있음을 넌지시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에 대한 인식이 갑작스레 바뀌어버리는 구성을 취하고 있는 틀니타투를 찬찬히 들여다봐도 붕괴의 원인을 찾기란 어렵다. 남편에 대한 존경(과 복종)심이 한순간에 무너진 것은 틀니 때문일까?(틀니) 열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임신을 한 이유는 어른들의 감시로부터 자유로운 대안학교의 불량한 친구들 때문일까?(타투)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남편에 대한 의 인식이 이미 붕괴되고 있었음을 모르고 있었을 뿐 남편의 틀니를 뺀 모습 때문만은 아니라고. 남편의 텅 빈 앞니는 붕괴를 가시화 하는 계기였을 뿐 원인은 아니다. 스위치를 켰을 때 우리들의 눈앞의 펼쳐진 것들은 이미 그렇게 이어온 것이지 스위치가 갑작스레 만든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원인은 어디 있을까, 찾을 수 있을까. 아니 그것을 찾아낸다면 붕괴를 막아낼 수 있을까. 일상의 도처에 잠복하고 있는 누수를 탐침해 들어가는 최정화 소설의 인물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해도 붕괴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딸의 임신을 가까스로 받아들인 후 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딸의 몸에 새겨진 기괴한 문양의 문신이다. 틀니를 끼게 된 남편은 정말 틀니가 필요한 나이로 빠르게 늙어간다. 누수의 원인, 바꿔 말해 근원적인 구멍은 어떻게 해도 메울 수 없다. 우리의 삶은 바로 그 구멍에 기대어 지탱되고 있기 때문이다. 극적인 구조에 기대거나 특별한 표지 없이 구멍이 어떻게 지탱의 조건이 되는지를 무심히 그려내고 있는 팜비치의 한 장면.

 

 

 

그는 주먹으로 팔뚝으로 결국에는 몸 전체로 둑방의 구멍을 막아 수해로부터 마을을 구해낸 소년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그는 쓰려져내린 플래카드를 세우고 부실한 받침대가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붙잡았다.

이봐, 구멍을 뚫어.”

무대를 손보던 인부 한명이 그에게 말했다.

뭐라고요?”

천에 구멍을 뚫으면 바람이 불어도 끄떡없다구.”

―「팜비치, 39

 

 

아내의 성화로 상어 모양의 튜브를 가지러 가는 길에 우연히 보게 된 해변 콘서트장에서 는 자신이 호텔로 돌아온 목적을 잊어버린 듯 오랫동안 공연을 관람한다. 바람에 넘어진 플래카드를 세우며 그곳에 구멍을 뚫는 장면은 우연한 에피소드에 불과한 듯보이지만 무척이나 상징적인 의미를 내장하고 있다. 인위적으로 뚫은 (혹은 뚫린) 구멍만이 바람의 저항을 이겨내고 지탱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을 상기해본다면 말이다. 발바닥 깊게 박힌 유리 조각에 아픔보다는 난생처음 느껴보는 기분”(40)에 휩싸이는 것 또한 구멍/상처가 황홀과 등을 맞대고 있음을 드러내는 장면이기도 하다. 몇몇 소설에서 이 구멍은 거짓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홍로에서 거짓말은 임기응변의 수단이 아닌 평생을 움츠린 상태로 살아온 그녀무겁고 거추장스러운 오십대의 허물을 마침내 벗어던”(홍로, 126)져버릴 수 있게 한 거의 유일한 구원 같은 것이었음을 기억하자. 거짓말은 주어진 삶의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동력으로 기능한다. 어떤 이들에겐 이미 붕괴되고 있던 삶을 잠시나마 구원해주는 것은 구멍-거짓말 밖에 없어 보인다. ‘팜비치라는 가상의, 가짜 공간이 위태로운 가정의 일상을 지켜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오가닉 코튼 베이브그녀가 쉼없이 옮겨다니는 집()중의 대상 또한 다양한 구멍들이지 않은가. 막을 수 없는 누수가 일상을 무너뜨리지만 바로 구멍()만이 일상을 살아낼 수 있게 한다.

 

 

실수가 억압된 욕망의 무의식이 표출되는 운동이라고 한 프로이트의 말을 떠올려보자. 평생 되는 것 없이 살아왔던 가 삶을 바꿀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에 그 키를 쥐고 있는 여자의 사촌을 향해 대머리라고 놀려대는 것은 취중 실수가 아니다. “누군가는 내가 너무 쉽게 과거의 불행을 잊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우리의 인생에서 더 낫거나 덜한 것이 있을까. 그때 원했던 것과 지금 원하는 것, 그때 충족되지 못했던 것과 지금 충족되지 못한 거싱 있을 뿐이다.”대머리, 205) 나는 이 구절에 최정화의 세계관이 응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지지도 않고 더 나빠지지도 않는 이유는 바로 해결할 수 없는 누수/구멍/때문이다. 커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말끔하게 사라지지도 않는 구멍들, 끊임없이 새어나오는 것들, 누수들. 그건 삶의 욕망과 다르지 않다. ‘가 결정적인 순간에 여자의 사촌을 향해 대머리라고 말해버린 것은 더 나은 삶을 스스로에게 허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건 무기력의 학습 때문이 아니라 차라리 생생한 욕망의 표출이며 살아 있음의 증표에 가깝다. 발바닥을 파고든 유리조각에 강한 열기로 휩싸였던 를 다시 떠올려 보라. 삶은 누수를 막기 위해 바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누수를 살아내는 일이다.

 

 

 

그녀는 당장 다음 주말에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대청소를 시작했다. 청소를 하면서 그녀는 집 안 구석구석에서 쌀알보다 더 작은 검은색 벌레들을 발견했다. 죽은 벌레들이 한 장소에서 수십 마리씩 나와 그녀를 놀라게 했다. 집에 이사 온 지 칠년이 넘었지만 그런 벌레는 처음 보았다. 새우를 닮은 그 벌레는 통통하게 살이 찐 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틀니, 92.

 

 

집안 곳곳에서 살찐 검은 벌레의 사체를 발견하는 일은 섬뜩하다. 살아 움직이지 않지만 그것들은 모두 통통하게 살쪄 있다. 단 한번도 그 벌레를 보지 못했다는 것, 지금도 어딘가에서 살을 찌우고 있을 것이 분명한 검은 벌레들. 충분히 살다가 오직 사체로만 발견된다는 것. 우리의 삶 곳곳에도 통통하게 살이 찐 채 딱딱하게 굳은 검은색 벌레들이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상 곳곳을 파먹으며 살찌우고 있을 것이다. 그 검은 벌레(구멍)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 벌레가 어디로 들어와서 어디에 서식하는지 알아낼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오직 살찐 사체로만 검은 몸을 드러낼 뿐이다. 일상은, 아니 인간은 단 한 순간에도 무너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한 순간을 막아내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막을 수 없는 누수를 살아내는 것이다. 누수와 함께 사는 것이다.

 

 

 

세 계절 읽기 모임 [2] (2)_최정화, 지극히 내성적인』(창비, 2016) 별강문_중앙동 '히요 방'_2016. 4.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