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0. 20
오래 전에 썼던 글의 원고를 우연히 발견해 여기에 올려둔다(덕분에 필름 카메라로 찍었던 사진 파일도 찾았다). 등단한 이듬해인 2008년 여름에 썼던 글이다. 당시 부산 문단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각종 토론회와 문학 행사에 참하는 것이 무척이나 즐거웠다. 매일매일 무언가를 시도 했고 알 수 없는 막연한 느낌들로 충만했으며 아낌없이 배웠던 시절. 조금 들떠 있었던 것은 지역 문학에 대한 어떤 사명감 같은 것을 과도하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나를 찾는 사람과 나를 반기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낯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게 조금도 두렵지 않았고 피로하지도 않았던 시절. 무척이나 성기고 그 때문에 과잉된 글이지만 한편으론 싱겁고 또 한편으론 싱그럽기도 하다.
1. 질주가 멈춰서는 장소
지도에서 삭제되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곳’에서 약속을 하고, ‘그곳’을 경유하여 다른 곳으로 진입하기도 하며, ‘그곳’에서 이별을 통보 받거나,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택시기사들 또한 사라진 ‘그곳’으로 손님들을 실어 나르고, 심지어 버스 노선표에도 ‘그곳’은 버젓이 정류소라는 표지를 획득하고 있기도 하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그곳’을 <보림극장 앞>이라고 불러왔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부르고 있다. 3000원으로 두 편의 영화를 볼 수 있던 2본 동시 상영관이 오래 전에 사라졌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곳을 <보림극장 앞>이라고 한다.
<보림극장 앞>이라는 지명은 때때로 <교통부>라는 지명과 구분 없이 쓰이기도 하는데, <교통부>의 유래와는 별개로 <보림극장 앞>은 신암, 범냇골, 좌천동, 수정동에서 오거나 혹은 그쪽으로 가기 위해 경유해야만 했던 ‘교차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서면과 초량, 그리고 남포동으로 이어지던 도시의 주요 동선에 <교통부>가 자리하고 있었던 셈이고 그곳은 부산의 주요 흐름 사이에 놓여 있는 결절점이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교통부>가 흐름을 이어주는 가교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그 흐름을 방해하기도 했다는 점에 있다. 그곳으로 밀려드는 차량의 수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넓지 못했던 도로와 네 갈래로 나누어진 길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존재했던 신호들 탓에, 빠르게 질주하던 차량들은 그곳에서 매번 속도를 줄이거나 멈춰서야만 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 <교통부>와 <보림극장 앞>의 풍경이 비교적 선명한 이미지로 남아 있는 것은 타지역에 비해 도시 개발이 미진했던 데서 연유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그곳이 질주가 불가능한 지점이었던 탓에 차창 밖의 풍경을 비교적 오랫동안 응시할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1997년, 보림극장은 경영악화로 공연장 폐지 신고를 함으로써 화려했던 반세기의 막을 내리게 된다. 1949년 한국전쟁 당시 중구 남포동, 현재의 하나은행 자리에 있던 보림백화점의 3층에 위치해 <7인의 신부> 등의 회화를 상영하며 출발한 보림극장은 이후 1968년 조양직물 공장이 위치해 있던 현재의 부지를 인수하여 국산 영화 전문개봉관으로 자리 잡으면서 전성기를 맞게 된다. 이후 경영난으로 인한 용도 변경을 신청함으로써 공연장으로써의 기능에 종지부를 찍게 되는데, 보림극장이 매번 자신의 ‘체질’을 변형시켜야만 했던 처지에 놓여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겠다. 예컨대 70년대에 접어들면서 쏟아져 들어온 외국 영화에 의해 국산 영화가 밀리자 보림극장은 대중가수들의 쇼를 중심으로 하는 공연장으로 탈바꿈함으로써 명맥을 이어나갔으며, 이후 80년대 등장한 칼라 TV와 다양한 볼거리의 등장으로 또 한번의 위기를 맞으면서, ‘조용필쇼’를 끝으로 쇼 무대를 마감하고 2본 동시 상영관 체제로 전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림극장의 용도변경은 새삼스럽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곳에 초국적 기업인 ‘맥도날드’가 들어선다면 사정은 좀 달라진다. 보림극장은 도시적 삶이 요구하는 속도를 획득하지 못하거나 밀려난 이들의 ‘거처’로 기능해왔던 탓에 ‘속도와 이동’을 중요시 하는 맥도날드의 질서와 충돌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보림극장의 맥도날드‘화’는 보는 것에서 먹는 것으로의 변화나 단순히 새로운 먹거리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이 체득하고 있던 기왕의 질서체계가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맥도날드는 보림극장을 ‘접수’하지 못했다. 보림극장의 간판이 내걸렸던 자리에 전 세계인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익숙한 맥도날드의 로고가 걸렸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곳을 <보림극장 앞>이라고 불렀다. 보림극장은 시대가 요구하는 속도에서 밀려나 소멸했지만 한편으로 그 공간은 맥도날드로 표상되는 세계적인 속도가 장악하지 못한 공간이 된 셈이다. 그런 점에서 <보림극장 앞>은 ‘패스트’(푸드)가 불가능한 공간이라고 할 수도 있을 법하다. 맥도날드라는 초국적 기업이 <보림극장 앞>이라는 변두리를 접수하지 못한 것은 비단 유동인구의 부족이나 그 일대의 슬럼화로부터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이 질주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공간이기 때문은 아닐까.
폐관 이후 보림극장 터의 변천사 ⓒ김대성
2. 범일동, 범일동, 범일동
얼마 전 범일동 ‘구름다리’ 입구에 세워져 있던 ‘친구거리’라는 표지판이 철거되었다. 개봉 당시 전국 최다 관객을 끌어 모으면서 부산이라는 지역을 널리 알린(?) 영화 ≪친구≫(곽경택, 2003)의 촬영 장소였다는 이유로 부산영상위원회와 동구청으로부터 ‘기념거리’로 지정된 구역이 몇 년도 되지 않아 슬며시 자취를 감추게 된 저간의 사정은, 영화 속에서 그곳이 재현되는 방식을 떠올려 본다면 예정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흥겨운 음악 사이를 뚫고 범일동 일대를 가로지르는 그들의 ‘질주’는 역설적으로 범일동이라는 구체적인 공간을 지워버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속도는 끊임없이 공간을 삼킴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증식시켜 오지 않았던가. 그런 점에서 본다면(그간 부가가치를 가지지 못했던 범일동을 상품화 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려는 의도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구체적인 삶의 공간, 다시 말해 ‘장소’에 기입되어 있는 시간의 흔적들이 삭제된 ‘텅 빈 공간’으로 재현된 범일동의 모습을 ‘기념’하려 했던 시관계자의 태도는 기이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 같은 ‘텅 빔의 기념화’는 범일동이라는 주변부 지역에 강요되는 존재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가령, ‘구름 다리’ 아래로 흐르는 하천 정화작업이 오폐수가 흐르는 기존의 환경에서 탈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왕에 감당하고 있던 기능, 다시 말해 인근 주택가로부터 유입되는 오폐수를 걸러내는 역할을 계속해서 수행할 수 있게 하려는 자구책이었다는 점을 상기해 보자. 요컨대 도시는 범일동이 변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범일동은 급속한 도시화로 인해 튕겨져 나온 빈민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오폐수가 흐르는 하천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드러내고 싶지는 않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도시가 언제나 슬럼(slum)을 양산함으로써 확장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하천의 정화 작업은 그곳으로부터의 ‘착취’를 지속가능하게 만들려는 술책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구름다리 정화 전 ⓒ김대성
구름다리 정화 후 ⓒ김대성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범일동을 ‘추억의 장소’로 기념화 하는 것과 <보림극장 앞>이라는 명칭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이다. 구체적인 삶의 지층들을 깡그리 삭제함으로써 그 지역을 유폐시켜버리는 것과 그 지역의 공간적 특성에 의해 직조되어 왔던 정서를 동일한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보림극장 앞>이 탈근대적 속도가 무력화되는 곳인 반면 범일동 일대를 ‘추억의 공간’으로 기념화 하려는 일련의 시도들은 도시가 자행해왔던 폭압성을 은폐함으로써 그 같은 행위를 지속하려는 의도에 지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친구≫가 인물들의 질주를 통해 범일동을 삭제함으로써 그곳을 기념화 했던 것에 반해 독립장편영화 ≪범일동 블루스≫(김희진, 2000)는 시종일관 범일동이라는 공간의 표정을 담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시금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특이한 점은 ≪범일동 블루스≫가 ‘서사’를 구축하는 데 그다지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 않다는 점에 있다. 영화는 ‘철이’와 ‘순이’의 사랑과 죽음, ‘똘이’와 ‘민자’의 꿈과 갈등을 담아내고 있기는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가 대면하는 것은 그들의 삶의 행로와 동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범일동’의 다양한 모습일 따름이다.
범일동 골목 ⓒ김대성
따라서 ≪범일동 블루스≫가 단순히 특정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영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범일동’이라는 공간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령, 부모 없는 외톨이로 설정되어 있는 인물들의 상황은 그들의 현실적 기반이 열악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국한되지 않고 인물들이 처해 있는 상황과 거주하는 공간이 서로 조응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부산이라는 근대 도시, 그 중 범일동이라는 주변부는 현실적 기반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비유컨대 ‘부모’없는 하층민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던 공간 아니던가. 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주택 과밀 지역인 범일동의 좁은 골목길은 ‘철이’와 ‘순이’가 만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범일동과 범천동을 가로지르는 하천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똘이’와 ‘민자’의 모습이 프레임 속에 자리할 때, 범일동이라는 주변부적 공간과 중심에서 밀려난 비루한 청춘들의 모습이 조응하며 독특한 정서를 직조해낸다. ‘똘이’가 어슬렁거리는 범일동의 중고전자 상가와 ‘민자’를 만나는 <보림극장 앞>, ‘민자’의 오빠 패거리들과 싸움을 하게 되는 ‘구름다리’와 철이의 시신이 발견되는 ‘철길’ 등 범일동이라는 공간의 여러 ‘표정’들은 영화의 서사를 구축하거나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철이’의 일상을 보여주는 일련의 시퀀스들은 인물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범일동의 내밀한 표정까지 풍부하게 담아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때의 범일동은 그저 오래되고 낡은, 추상적인 공간이 아닌 사람들의 삶이 녹아 있는 구체적인 공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뮤지컬과 액션, 멜로가 뒤섞여 있는 영화의 독특한 구성 또한 주거 밀집지역, 재래시장, 예식장, 백화점, 각종 중고 상가 등 이질적인 것들의 공존하면서 만들어내는 범일동의 다종한 성격과 조응하고 있다.
영화는 ‘철이’와 ‘순이’의 죽음에서부터 시작하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시간의 역전은 급속한 도시화로 인해 삭제되어버린 시간의 단층들, 다시 말해 범일동이라는 공간에 켜켜이 쌓여 있는 시간의 결을 감각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영화가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주효한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슬럼화 되어 가는 범일동을 삶의 터전으로 하고 있는 인물들은 그 공간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인물들이 사라진 자리에 어둡고 음습한 공간만이 남는다. 그들의 죽음이 인물들 간의 갈등에서 비롯되는 것이겠지만 우울한 음화가 범일동이라는 공간이 재편되어가는 상황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듯 하다.
영화 <범일동 블루스> 촬영지엔 1999년 겨울, 촬영 당시 남겼던 낙서(미술팀)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이 영화의 제작부로 참여했었고 부산국제영화제 초청(뉴커런츠 부분) 상영을 앞두고 군입대를 했다. 청원 휴가를 신청했지만 근무지가 GOP였고 영화제 초청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대성
3. 사람들은 자기가 사는 도시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자유시장, 평화시장, 금은방 상가, 공구 상가, 각종 예식장 등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것들이 뒤엉켜 있는 범일2동 일대는 <조방 앞>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조방 앞>이라는 지명은 1917년에 일본인에 의해 설립돼 광복 후인 1968년까지 51년간 이곳에 있었던 ‘조선방직’에서 유래한다. ‘조선방직’이 사라진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이 지역을 <조방 앞>이라고 불러 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외부적인 힘에 의해 재편되어 왔던 부산이라는 근대 도시의 형성과정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조선방직’은 없어졌지만 ‘조선방직적인 구조’는 여전히 잔존해 있는 것이다. 식민지시기 수탈의 요충지에서 ‘조국의 근대화’ 프로젝트에 의해 제조업 중심으로의 하청구조화된 공간으로, 다시 제조업 침체를 돌파할 탈산업 구조로의 이행하는 동안 부산은 ‘부산적’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추상적인 공간이 되어버린 셈이다. 근대화가 식민화의 짝패로 기능해왔던 구조는 도시화가 슬럼화의 양산을 통해 형성되는 구조로 다시금 ‘반복’된다.
이 일대를 여전히 <조방 앞>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 지역이 제조업을 중심으로 하는 기왕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일 터이다. 시외버스 터미널을 끼고 조선방직과 국제고무 등 신발, 섬유산업이 활성화 되었던 시기인 60․70년대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수준이기는 하지만 의류도매를 비롯한 일정한 상권의 명맥이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의류 원도매 기능이 서울로 이전함으로써 조선방직의 전국총판기능을 담당했던 부산 진시장은 이미 오래전 취급품목을 의류 완성품보다는 원단과 의류 부자제 등 반가공품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삼화고무(경남아파트 자리), 국제고무(부산 진시장 주차 빌딩 자리), 화랑염직(현대백화점 자리), 조선방직이 잇따라 문을 닫으면서 당시 부산 최대의 수준을 자랑하던 부산 진시장을 중심으로 한 상권 또한 상당히 위축된 것이다. 좌천동가구거리~부산진시장~귀금속도매상가~예식장으로 이어지는 혼수타운의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유기적인 성격이 강했던 과거와 달리 좌천동과 진시장 사이에서, 또 진시장과 평화․자유시장의 단절 등 공간이 분절되기 시작한다.
진시장 육교 위에서. 흑백 필름은 비싸고 인화하는 데도 돈이 많이 들었지만 당시 여러 감도의 필름을 사용해봤고 그에 관한 메모도 꼼꼼하게 했었던 기억이 난다. 현장에서 컬러 필름으로 롤을 바꿔 찍고 다시 흑백필름으로 갈아끼워 기억해두었던 컷만큼 셔터를 누르고 이어서 찍기도 했었다. 모두 내 친구 세희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김대성
이 같은 공간의 단절과 상권의 위축 등을 비롯한 전체적인 형세 변화의 중심에 현대백화점이 놓여 있다. 현대백화점이 들어섬으로 하여 동구의 핵심 상권과 소비자들의 동선이 이동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조방 앞>을 형성하고 있는 이질적인 것들의 유기적 연결에 의해 상권이 형성된 것에 반해 현대백화점은 거대한 자본의 힘을 바탕으로 주변의 모든 것을 흡입하려고 한다. 이 일대의 공간이 더 이상의 유기적인 속성을 가지지 못하고 분절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간적 분절들에 의해 우리는 도시의 ‘맨 얼굴’과 마주할 수 있게 되는지도 모른다. 화려한 빌딩의 뒤편에 드리운 음영은 분명 우리가 모르고 있던, 혹은 모른 척하고 싶었던 도시의 ‘맨 얼굴’이지 않은가.
현대백화점 ⓒ김대성
범일동은 지금 변하고 있다. 변화를 추동하는 힘이 외부의 것인 탓에 범일동을 이루어왔던 것들이 하나 둘씩 밖으로 내밀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지금-여기’를 존립케 한 실체는 언제나 이러한 변화 속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형체를 들어낼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변화의 순간에서야 변하는 않는 것들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범일동의 금은방 상가 뒤편에 모여 있는 ‘공구상가’야말로 그런 존재들이지 않을까?
‘공구상가’는 한국전쟁 후 주둔해 있던 미군부대의 공구들을 음성적인 방법으로 유통시키면서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국내 기술로 만들어낼 수 있는 ‘공구’가 극히 제한적이었던 탓에 전국 각지에서 성능이 좋은 미제 공구를 사기 위해 범일동의 ‘공구상가’로 몰려 들었다. 범일동에 위치해 있던 시외버스터미널로 인한 인접성의 용이함은 ‘공구상가’가 활성화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60․70년대 건설붐을 타고 ‘공구상가’는 하나의 골목을 형성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를 갖추게 되는데, 그런 점에서 미루어 본다면 한국 건설업의 호황은 범일동 ‘공구상가’에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건설업의 호황과는 별개로 수입공구의 역습, 중소기업의 침체로 인해 범일동 ‘공구상가’를 찾는 발걸음이 점차 줄어들게 되고 상당수의 업체가 사상, 김해, 마산 등지로 이전하고 있는 실정이다.
범일동 일대를 북적거리게 만들었던 ‘공구상가’가 이제는 부차적이거나 흉물스러운 것쯤으로 치부되는 듯하다. 그러나 ‘공구상가’에 켜켜이 쌓여 있는 붉은 녹이야말로 범일동이라는 신체에 각인되어 있는 시간의 주름 아니겠는가. 그 주름이 현대백화점의 옆에 서니 흉물스럽고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저 매끄럽고 빛나는 도시의 매혹적인 형체가 죄다 이 투박한 공구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그들의 땀과 피야말로 도시의 혈관 속에서 지금 이 순간도 쉬지 않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도시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취재를 위해 무작정 범일동 공구 상가로 가 며칠에 걸쳐 인터뷰를 했다. 녹음기 없이 오직 수첩에만 의지해서 다소 중구난방이고 두서가 없던 그들의 역사를, 쇠락하는 공구 상가의 시간을 채록했다. 현대백화점으로 이어지는 지하상가엔 소년이 엎드려 구걸하고 있었다. 현상된 네가필름에 그가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 인화된 사진엔 그가 없다. ⓒ김대성
4. 아하, 블루스, 블루스, 그 음악을 멈추지 말아요
걸으며 손택수의 시를 떠올렸던 범일동 골목 ⓒ김대성
1
방문을 담벼락으로 삼고 산다. 애 패는 소리나 코고는 소리, 지지고 볶는 싸움질 소리가 기묘한 실내악을 이루며 새어나오기도 한다. 헝겊 하나로 간신히 중요한 데만 대충 가리고 있는 사람 같다. 샷시문과 샷시문을 잇대어 난 골목길. 하청의 하청을 받은 가내수공업과 들여놓지 못한 세간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간밤의 이불들이 걸어나와 이를 잡듯 눅눅한 습기를 톡, 톡, 터뜨리고 있다. 지난밤의 한숨과 근심까지를 끄집어내 까실까실하게 말려주고 있다.
2
간혹 구질구질한 방안을 정원으로 알고 꽃이 피면 골목길에 퍼뜩 내다놓을 줄도 안다. 삶이 막다른 골목길 아닌 적이 어디 있었던가, 자랑삼아 화분을 내다놓고 이웃사촌한 햇살과 바람을 불러오기도 한다. 입심 좋은 그 햇살과 바람, 집집마다 소문을 퍼뜨리며 돌아다니느라 시끌벅적한 꽃향, 꽃향이 내는 골목길.
3
코가 깨지고 뒤축이 닳을 대로 닳아서 돌아오는 신발들, 비좁은 집에 들지 못하고 밖에서 노독을 푼다. 그 신발만 세어봐도 어느 집에 누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지, 어느 집에 자고가는 손님이 들었고, 그 집 아들은 또 어디에서 쑥스런 잠을 청하고 있는지 빤히 알아맞힐 수 있다. 비라도 내리면 자다가도 신발을 들이느라 샷시문 여는 소리가 줄줄이 이어진다. 자다 깬 집들은 낮은 처마 아래 빗발을 치고 숨소리를 낮춘 채 부시럭부시럭거린다. 그 은근한 소리, 빗소리가 눈치껏 가려주고 간다.
4
마당 한평 현관 하나 없이 맨몸으로 길을 만든 집들. 그 집들 부끄러울까봐 유난히 좁다란 골목길. 방문을 담벼락으로 삼았으니, 여기서 벽은 누구나 쉽게 열고 닫을 수 있다 할까, 나는 감히 말할 수가 없다. 다만 한바탕 울고 난 뒤엔 다시 힘이 솟듯, 상다리 성치 않은 밥상 위엔 뜨건 된장국이 오를 것이고, 새새끼들처럼 종알대는 아이들의 노랫소리 또한 끊임없이 장단을 맞춰 흘러나올 것이다. 유난히 부끄럼이 많은 너의 집 젖꼭지처럼 오똑한 초인종을 누르러 가는 나의 시간도 변함없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질 것이다.
-손택수, 「범일동 블루스」 전문
가난한 혈육 공동체의 정감과 애환을 형상화 하는데 집중해왔던 시인에게 범일동이라는 공간은 구체적인 삶이 녹아 있는 고유한 ‘장소’로 다가왔을 터이다. 이때의 범일동은 단순히 시의 공간적 배경을 넘어 곤궁한 삶 속에서도 약동하고 있는 삶의 에너지와 유머가 생성되는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 다름 아닐 것이다.
도시의 매끄러운 표면에서 흘러나오는 유려한 음악과 달리 골목은 늘 악다구니로 넘쳐난다. “하청에 하청을 받은 가내수공업”이나 공사판 막노동, 일용직 노동자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허락된 삶은 그리 녹록치 않기 때문이다. “불에 덴 혀로 왕소금을 씹어 삼”(「도넛과 토마토」, 67쪽)키며 지속해야하는 생활에서 새어나오는 숨소리가 고를 리 없다. 골목은 헐거운 삶의 부족분을 채워 넣기 위한 몸짓과 악다구니들로 넘쳐난다. 골목 한켠, 간밤에 미화원이 가져가지 않은 쓰레기 더미에는 “용량초가”라는 서툰 글자가 남겨져 있기도 하다. 규격봉투 한 장을 아낄 요량으로 노끈으로 다른 쓰레기 더미를 이어 놓은 ‘과잉’에 대한 ‘부족한’ 대답이리라. 한쪽이 넘치면 또 다른 한쪽이 그 만큼 모자라다. 골목이 어수선하고 번잡해 보이지만 그 ‘무질서’는 낯선 곳에서 몰려든 이질적인 존재들이 맨몸으로 부대끼면서 다듬어온 규칙이 만들어내는 견고한 ‘질서’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악다구니가 골목이라는 공명통에서 사람의 숨결과 가장 가까운 ‘다성악’으로 빚어지는 것이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회한, 빼앗긴 것들에 대한 분노와 슬픔, 마침표가 없는 고통을 밀어내려는 몸짓, 그럼에도 삶을 밀고 나가려는 생의 약동, 그 ‘다성악’은 지난 날, 먼 이국 목화밭에서 핍박받은 자들이 쉼 없이 흥얼거렸던 ‘블루스’(blues)와 같은 장르이지 않을까.
이질적인 것들이 모여 있는 범일동 또한 골목과 같은 공명통을 보유하고 있는 탓에 공존과 지속의 공간이 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증식의 욕동으로 충만한 도시가 딛고 서 있는, 그 어둠 속에서 서식하는 음지 식물이 뿜어내는 숨은 여전히 뜨겁기만 하다. 알고 있지 않는가, 도시 또한 그 뜨거운 숨을 먹고 산다는 것을. 삶이 계속된다면, 저 음악, 범일동의 블루스는 멈추지 않을 것.
안창마을 입구에 앉아 있는 두 노인의 뒷모습. 범일동과 좌천동을 내려다보고 있다. ⓒ김대성
자유시장에서 짐을 나르신다는 노인의 망중한. 멈춰 있는 낡은 리어카와 도로를 질주 하는 자동차의 대비. 이 단순한 대비를 포착하기 위해 셔터를 몇번이나 눌렀는지 모른다. 이분과도 몇 차례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글로 옮기지는 못했다. ⓒ김대성
《작가와사회》2008년 가을호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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