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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8의 구원

by 종업원 2014. 10. 13.

 

2014. 10. 13

 

 

* 작년 이맘 때 기고한 글이 실린 독립 잡지를 오늘 등기로 받았다. 영화제 기간이었고 밀린 원고가 있었음에도 몇 가지를 포기하며 애를 써서 원고를 썼던 것은 지역/독립/영화/비평/잡지라는 <빛평>의 포지션 때문이었다. 꽤나 늦게 도착한 셈이지만 우체부가 직접 전한 잡지를 펼쳐 잊고 있었던 글을 다시 읽어본다. 언젠가 <모퉁이극장>에서 만났던 박준범 감독의 새 작품을 어서 빨리 볼 수 있었으면 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지난 시간도, 지난 장소도 모두 폐허다.

 

** 어떤 이유에서인지 잡지에 송고한 원고의 반단락이 누락 되어 있어 바로 잡아 올려둔다.  

 

 

 

 

 

 

보여주고 싶은 것과 보여줘야만 하는 것

 

‘선택’이란 무언가를 버릴 때만 가능하다. ‘가능하다’라는 술어를 가지고 있음에도 나는 이 문장에서 별 수 없이 가능하지 않은 것들의 목록을 헤아리게 된다. ‘선택한다는 것’이 꼭 그와 같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동력을 갖기 위해선 많은 것들을 버려야 한다. 무엇을 위해 버려야만 하는가. ‘생생한 삶의 질감’을 위해. 나는 그것을 기꺼이 선택할 수 있는 이들만이 만질 수 있는 삶의 유일한 전리품이라 부르고 싶다.

 

첫 번째 선택. 보여주고 싶은 것과 보여줘야만 하는 것. 이 선택이 영화의 태도를 결정한다. 선택 이후 또 다른 선택을 해야 하고 앞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한 선택이 이어진다. 운동으로서의 선택, 선택이라는 운동. 그렇게 가능하지 않은 것들(나는 ‘포기’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있다)의 목록을 늘려가는 영화가 있다. 박준범의 <도다리>도 그런 영화 중의 하나다. 20대 후반의 감독이, 지역에서, 독립영화 제작 방식으로, 보여주고 싶은 것이 아닌 보여줘야만 하는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내게 하나의 물음으로 도착했다. 누군가의 ‘선택’이 물음을 길어올린다. 그렇게 그의 선택-운동은 계속된다. 응답의 자리까지 가닿기 위해 이제 내가 선택-운동을 수행해야 할 차례다.

 

영화는 <땅위에서도 하늘에서처럼>(염정석, 16mm, 12분, 1998) 더 많은 것을 선택할 수 있게 우리를 안내하던 매체 아니었던가. 다시 말해 인류가 이룩해 놓은 재산들을 보기 좋게 훔치며(정성일) 보다 자유롭게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왔던 영화가, 보여주고 싶은 것이 아닌 보여줘야‘만’ 하는 제약을 선택해야할 때 던지는 질문에 대한 응답 또한 기왕의 것들과는 달라야 한다. 영화가 더 많은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날뛰고 있을 때 항구를 끼고 있는 도시에 살고 있는 20대 중반의 세 친구의 선택과 좌절을 담은 독립 장편 <도다리>는 무심하게 ‘보여줘야만 하는 것’을 ‘선택’한다. 이 ‘제약의 선택’은 역설적으로 반드시 무언가를 보여주겠다는 의지로 수렴되며 그 힘이 우리로 하여금 관람자(구경꾼)가 아닌 목격자(증언)의 자리로 옮아가기를 요청한다.

 

 

생소한 연쇄로의 동참

 

 

새벽 시간 부두에서 일하는 ‘우석’의 뒷모습으로부터 이 영화는 시작된다. 잠깐의 휴식 시간인 듯 담배를 태우고 있는 우석의 뒷모습 너머로 아웃 포커싱(out focussing) 되어 있는 일터가 어렴풋 보인다. 우리는 우석의 얼굴을 볼 수 없다. 휴식을 위한 담배는 곧 다 타버릴 것이고 우석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니 우리는 우석(의 뒷모습)을 통해 저 아웃 포커싱된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우석이 보고 있는 세계에 동참해야 하는 것이다. 우석의 뒷모습으로 시작한 이 영화의 마지막 선택 또한 부산을 떠나 (아마도) 서울로 향하는 ‘청국’의 뒷모습이다. <도다리>가 ‘뒷모습’을 자신의 얼굴로 가져야 하는 이들에 관한 영화라 할 수 있다면 이 뒷모습은 ‘알 수 없음’의 표지가 아니라 그들이 보고 있는 세계를 함께 바라보거나 동참하길 바라는 요청의 표지일 것이다.

 

‘뒷모습이라는 얼굴’에 대해 조금만 더 말하자. 반쪽만 있는 것처럼 보이는 괴이한 물고기 ‘도다리’를 언급하면서 말이다. 바닥에 모로 누워 있는 ‘도다리’의 모습은 너무 오랫동안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던 탓에 외형이 뒤틀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늘 곁눈질을 할 뿐 ‘정면’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도다리가 자신이 터해 있는 환경에 최적화되어 있는 외형을 가지고 있다는 자연의 이치는 ‘우석’과 ‘창국’ 뒷모습이 ‘결여’의 표지가 아닌 그들 고유의 ‘얼굴’이기도 하다는 것을 넌지시 가리킨다. ‘도다리’-‘뒷모습이라는 얼굴’-‘보여줘야만 하는 것’을 선택한 영화. 선택의 운동이 생소한 연쇄를 만들어낸다.

 

오랜 사귐의 시간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는 이상하리만치 간단하다. 그들이 맺어온 관계의 시간만큼이나 오래 써온 욕설과 비속어를 빼면 이들이 나누는 대화의 내용은 그리 많지 않다. 많은 이들은 이 일상화된 욕설과 비속어에서 20대, 경상도 사투리, 지역, 마초 따위의 익숙한 연쇄를 떠올리겠지만 시종일관 카메라가 이들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음을 상기해보자. 마치 무언가를 조용히 기록하는 것처럼 <도다리>의 카메라는 세 친구의 일상을 한발짝 뒤로 물러 선 자리에서 덤덤하게 담아내고 있다. 20대 남성들을 다룬 이 영화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흔들리고 방황하는 ‘열정적 청춘’ 따윈 없다. 인물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무덤덤한 카메라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 견고한 ‘거리’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도다리>가 역동성이 아닌 안정감을 선택한 것에서 나는 그들의 삶과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도다리’의 모습을 겹쳐보게 된다.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의 삶을 포장하는 것이 판타지에 가까운 것임을, 외려 이 세계를 왜곡할 수 있다는 점을 감독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감독의 이 선택이 어떤 ‘체득’에서 비롯된 것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이내 슬퍼졌다. 도입부 시퀀스에서 일터 식당 한쪽에 홀로 앉아 식판에 밥을 말아 급히 먹는 ‘우석’의 모습은 ‘청춘의 표상’이 아니다. 마트에서 산 컵라면을 그곳에서 국물까지 남김없이 먹는 장면과 독서실에서 빵과 우유를 먹는 장면 또한 마찬가지다. 새벽 시간, 이른 출근을 위해 휴대폰 알람 소리에 깨어 일어날 때까지의 과정을 담은 1분 10초 간 이어지는 쇼트야말로 <도다리>가 포착하고 있는 ‘우석’의 모습이다. 어둑신한 새벽, 작은 소리에 잠을 깨어 누워 있는 동생에게 몇 마디 당부를 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우석의 모습은 ‘청춘’이라는 어휘로 담아낼 수 없다. 그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빼곡히 들어차 있는 언어

 

친구를 보기 위해 50cc 오토바이를 타고 고가도로를 넘어온 두 친구에게 ‘우석’은 슬리퍼 한짝이 없는 ‘창국’의 발을 가리키며 “뭐고 이거, 거지 새끼가?”라는 인사(?)와 함께 “어쩐 일이고? 내 바쁘다 가봐라”라는 작별의 말(?)을 건낼 뿐이다. 이어지는 ‘청국’의 욕설, 그리고 ‘상연’의 술자리 제안 또한 거절당한다. 컨테이너 박스로 가득 찬 부두에서의 만남과 짧은 대화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들을 수 있는가? 할일 없는 청춘들의 모습인가, 우리가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소통방식인가? 서로가 건네는 무심한 말은 외형적으로는 그 무엇도 표현하고 있지 않은 듯 하지만 오랜 시간동안 관계를 맺어온 이들이 주고 받아온 정서의 결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청국’과 ‘우석’의 대화 중 느닷없이 ‘상연’을 향해 ‘저 새끼 요즘에 많이 변했다’고 할 때 ‘청국’이 감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부족하고 불완전해보이는 사투리로 구성된 일상어 속에 빼곡히 들어차 있는 역사.

 

 

ⓒ<바람>(이성한, 2009)

 

 

<도다리>는 세 친구가 나누는 대화 속에 적층되어 있는 감정의 결과 관계의 역사를 어떻게 읽어내느냐에 따라 그 해석이 상당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는 단지 <도다리>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닌데, 그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바람>(이성한, 2009)과 같은 영화 또한 ‘지역=조폭’의 도식을 명확하게 했던 <친구>(곽경택, 2001)의 고교 버전인 것만은 아니다. 그들에게 고교시절은 ‘진짜 남자’로 성장하는 과정이 아닌 허세로 가득 찬 비루한 존재임을 스스로 확인하는 시간이었음에도 왜 졸업식 때 할 수만 있다면 다시 고교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을까? 이들이 나누는 대화의 핵심은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고받음’의 형식 그 자체가 대화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음을 상기하자. 사투리 특유의 리듬은 홀로 하는 말보다 누군가와 주고받을 때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바람>은 이 ‘주고받음의 리듬’에 관한 영화다. 회자되었던 영화 속의 대사들을 떠올려보라. 중요한 것은 선정적인 ‘내용’이 아니라 상대의 말을 받아주던 관계의 리듬, 말의 리듬에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다시 고교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 이유 또한 이 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부재라는 수신자 : 뒤늦게 도착하는 한 통의 편지

 

<도다리>는 이 ‘주고받음’의 관계가 파괴되어 가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청국’을 향한 ‘우석’의 분노가 경찰공무원 시험에 낙방한 후 바다를 향해 내지르는 절규와 다르지 않게 들리는 것은 그것이 ‘주고받음’의 관계가 붕괴된 것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청국’이 그 무엇에도 고마워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 또한 그의 삶이 ‘주고받음’의 관계와는 무관한 자리에 놓여 있는 것에서 연유한다. 우석과의 약속을 거듭 어기고 일어난 자취방에서 아무렇지 않게 방바닥을 향해 가래침을 뱉는 그 모습에서 내가 본 것은 그 무엇도 주고받을 수 없는 버려진 한 존재의 외로움이었다. ‘상연’ 또한 주고받음의 관계로부터 버려져 있다. 동아리 후배 ‘가람’을 짝사랑해왔지만 군대 입대 전의 고백은 수신을 희망하지 못하는 발신이다. 우석, 창국과 함께 했던 짧은 소풍을 담은 사진 또한 그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못하고 홀로 남겨진 시간만큼의 자욱한 먼지가 쌓일 뿐이다.

 

‘우석’과 ‘상연’의 ‘봉투 던지기’ 신(scene)이 ‘주고받는 관계’의 불가능성으로 읽히는 것 또한 이 때문이다. ‘청국’에게 빌려준 돈을 ‘상연’으로부터 돌려받은 ‘우석’은 그 돈이 몸을 팔아 마련한 것임을 우연히 알게 되고 ‘상연’에게 ‘봉투’를 건네지만 어쩐 일인지 ‘상연’은 그 ‘봉투’를 받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그 봉투를 서로에게 던진다. 상연이 우석에게 던진, 우석이 상연에게 던진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단지 ‘돈봉투’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내게 그 행위는 주고받음의 관계가 붕괴되었음을 직감한 이들의 몸부림처럼 보였다. 상연으로부터 건네받은 귤을 장난으로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청국을 향해 던지는 우석의 행위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청국을 향해 던져진 귤은 바닥에 버려지고 다만 그 귤을 담은 검은 비닐봉지만이 청국의 얼굴을 덮는다. 그 무엇도 담겨 있지 않은 검은 비닐을 쓰고 청국은, 우석은, 상연은 그렇게 우정의 비탈길에서 미끄러져 간다.

 

주목해야 할 것은 우석, 청국, 상연이 서로에게 전하는 봉투를 전할 때 상대가 언제나 부재하다는 데 있다. 우석이 청국의 부탁으로 돈을 준비해 자취방을 찾을 때도, 청국이 복면을 하고 재혼한 어머니의 집을 찾아가 강도짓으로 마련한 돈을 들고 우석이 있는 독서실을 갔을 때도 ‘상대’는 그 자리에 없다. 다만 텅 비어 있어 더욱 황량한 ‘청국’의 자취방과 좁디 좁은 ‘우석’의 자리가 선명하게 도드라질 뿐이다. 어째서 이들의 주고받음은 ‘바로’ 도착할 수 없는 것일까, 어째서 이들의 관계는 ‘부재’를 통해서만 겨우 이어질 수 있는 것일까? ‘부재라는 수신자’는 이들이 놓여 있는 삶의 조건을 가리킨다. 영화의 후반부, 이들이 함께 했던 장소를 하나하나 짚어가는 장면들의 연쇄. 바로 그때 나는 감독 박준범의 편지가 그들에게 수신되는 순간임을 알게 된다. 영화 <도다리>가 ‘부재라는 수신자’의 구조에 집중하고 있었음을, 단 한번도 세상으로부터 답장을 받지 못한 이들에게 보내는 한통의 편지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다.

 

 

ⓒ<도다리-리덕스>(박준범, 2011)

 

 

‘2 : 8’의 구원-한 통의 답장

 

졸업을 한 예술대 출신의 ‘예진’과 예술대에 가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여건으로 공대에 다니게 된 ‘현우’의 우연한 만남을 다룬 <필름 없어>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풍경’ 또한 ‘청춘’의 표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 어떤 자리도 허락하지 않는 지겨운 현실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예진’이 대학시절 자신이 묵었던 원룸을 다시 찾아 이제는 다른 이가 살고 있는 그곳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것은 지난 시절을 애도하기 위한 나름의 의식이었을 테다. ‘무단주거침입’ 사실이 ‘현우’에게 발각이 되고 이들은 몇 시간동안 원룸에 앉아 어긋날 수밖에 없었던 지난 시절을 서로에게 들려준다. 현실 조건에 맞춰 자신의 삶의 방향을 끊임없이 변경해왔건만 그 어떤 응답도 듣지 못한 이들이 어긋남의 이력을 나누는 순간, 그 누구도 허락하지 않은 특별한 ‘애도’가 가능해진다.

 

‘현우’가 무단으로 자신의 주거지에 들어온 ‘예진’에게 하룻밤 방을 빌려주었지만 정작 예진이 빌린 것은 현우의 꿈이 담겨 있던 ‘카메라’다. 진열되어 있는 오래된 필름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셔터를 눌리려는 ‘예진’을 향해 퉁명스럽게 “필름없어”라고 하는 ‘현우’의 말이 가볍게 들리지 않는 것은 그 무엇도 찍지 못하는 오래된 카메라와 그들의 모습이 다르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향한 그들의 사력을 다한 발신은 그 어떠한 응답도 수신하지 못하지만 이 우연한 만남 속에서 이루어진 그들의 짧은 대화는 각자에게 의미 있는 수신자의 역할을 부여한다. 필름이 없는 사진기를 빌려 밭에서 일하는 할머니를 열심히 찍는 예진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제 그녀의 수신자가 바뀌었음을 알게 된다. 응답없는 세계를 향해 편지를 쓰기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관계에 충실하고자 하는 다짐을 필름 없는 사진기의 셔터 소리가 증언하고 있는 듯하다. 피사체를 필름에 남겨 그 결과를 확인하는 것보다 대상으로 포착하고 그 대상에 보다 충실해지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듯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그 무엇도 허락하지 않는 세계에 온 힘을 다해 발을 딛고 서려는 존재의 ‘의욕’을 본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편지를 씀으로써 기꺼이 발신자가 되고자 하는 ‘힘’을 본다. 그 의욕의 수신을 알리는 한 통의 답장을 그들에게 보낸다.

 

 

밤이 오래된 마을의 가르마를 타 보이고 있다 청파동의 밤, 열에 둘은 가로등 열에 여덟은 창문이다 빛을 쐬면서 열흘에 이틀은 아프고 팔 일은 앓았다 두 번쯤 울고 여덟 번쯤 누울 자리를 봐두었다 열에 둘은 잔정이 남아 있었다 또 내가 청파동에서 독거(獨居)니 온실이니 근황이니 했던 말들은 열에 여덟이 거짓이었다 이곳에서는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당신이 보고 있을 내 모십이 보인다 새실새실 웃다가도 괜히 슬프고 서러운 일들을 떠올리는 모습이 둘 다시 당신을 생각해 웃다가 여전히 슬프고 서러운 일들을 떠올리는 모십이 여덟이었다 남은 청파동 사람들이 막을 떠나가고 있었다 이제 열에 둘은 폐가고 열에 여덟은 폐허였다

_박준, 「2 : 8-청파동 2」 전문,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2

 

‘청파동’은 완전히 파괴된 곳이다. 사람들은 모두 떠났지만 나는 어쩐지 ‘청파동’에 ‘아직’ 사람이 살고 있을 것 같다. 그곳에 무언가가 가르며 타고 넘어가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 사람이 산다는 것, 그것은 별 수 없는 일이며 익숙한 일이다. 그런데 별 수 없다는 것은, 익숙하다는 것은 경이로운 것이기도 하다. 나는 이 시에서 완전히 파괴된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구출하려는 시도를 본다. 그리고 곧 그것이 세계를 구원하는 방법임을 직감하게 된다. ‘2 : 8의 삶’. 불균등, 불평등, 불균형을 삶의 접두어로 삼아야 하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발을 딛고 살아가는 풍경. 그러나 ‘2 : 8’이 불평등을 가리키는 표지인 것만은 아니다. 나눔(divide/share)의 리듬. 도처에 번져 있는 얼룩 같은 슬픔과 절망을 ‘2 : 8 가르마’라는 오래되고 익숙한 비율로 나누는 어떤 시도. ‘가름’을 ‘타고’ 넘어가는 ‘힘’. 아픔과 앓음, 폐가와 폐허. 고통을 2 : 8로 가르면 아픔과 앓음으로 나뉘어질까, 끝장을 2 : 8로 가르면 폐가와 폐허로 나뉘어질까. 아픔과 앓음의 거리, 그리고 폐가와 폐허의 거리. ‘끝’이라는 유일한 세계를 가른다. 그렇게 타고 넘어간다. 단단한 지면에 발을 딛고 살(리)려는 어떤 애씀들. 별 수 없기에 경이로운, 어떤 힘들에 관한 한 편의 시와 짧은 코멘트를 <도다리>와 <필름 없어>에게 보낸다.

 

 

영화비평잡지《빛평》(2014. 6) 3호에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