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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고 가난한 세속의 숲

by 종업원 2014. 10. 23.


2014. 10. 21



고작 2년 남짓한 시간이 지나갔을 뿐인데 언제 썼는지 기억나지 않는 글 한편을 올려둔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동안, 한 발짝 바깥으로 나와 있었음에도 매번 귀한 시간을 선물로 받았던 공부 자리가 내게도 있었다. 내/외적인 이유로 공부 자리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게 불가능해졌을 시기, 책마치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든 손을 보태고자 이틀동안 읽고 쓴 글이었음을 힘겹게 떠올려본다. 내게 허락되었던 그 하루, 이틀의 시간동안 글을 읽고 쓰면서 '다시 이 글로, 이 자리로 돌아올 것'을 내내 새겼지만 지금은 그곳이 어디인지, 돌아갈 수 있는 곳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별스러울 것 없는 쪽글이지만 글을 쓰면서, 또 쓰고 나서도 곡절이 많았던 이 글을 무심히 읽으며 그립고 보고 싶지만 연락할 수 없는 사람들의 흰 얼굴들을, 그 '마알간 어휘'들을 떠올려본다. 동접들의 모습이 '흰 얼굴'로 남아 있는 것은 공부 자리를 만들기 위해 모두가 한결 같이 무릎을 꿇어 쓸고 닦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꺼이 고개를 숙이고 '듣기-노동'에 애를 썼던 이들, 생에 처음으로 만났던 '언니들'. 무심한듯 정성을 다 하는 그 등이, 그 뒷모습에서 나는 "하아얀 의욕"의 살아 있는 어떤 표정에 겨우 접근해볼 수 있었다. 


 


 


1. ‘당신’과 ‘기독교’에 관한 풍경 둘


이런 소설을 기억한다. 1985년에 발표되었던 소설가가 독자에게 말을 거는 것으로 시작해 그 관계를 끝까지 밀고나간 소설. 당신에 대하여라는 제목을 달고 있던 그 소설을 쓴 이는 이인성이다. 학부 시절 나는 그를 탐독했다. 이인성의 당신에 대하여는 ‘민족’과 ‘민중’의 이름이 거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을 때 발표된 ‘소설에 관한 소설’이다. 그가 속해 있던 진영(프랑스 문학 전공자들이 주축이 되었던 ‘문학과지성사’ 혹은 서울대 불문과 그룹)이 워낙 외국문학 이론에 기대어 있던 터라 그 출처가 짐작은 가지만 리얼리즘의 승리를 염원하던 시국 속에서 ‘소설에 관한 소설’을 집요하게 파고자 했던 그 당시의 심산을 제대로 읽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자신이 몸담고 있던 ‘소설’이라는 글쓰기를 메타화하려는 시도였다는 것, 그것이 민중과 민족의 이름 아래에서 단 한번도 의문시 되지 않았던 ‘자명한 것’들에 물음표를 붙이며 그것들과 결별하려고 시도 했다는 점, 바로 시국의 정세로부터의 결별을 통해 가닿으려고 했던 글쓰기가 나름의 ‘민주주의’를 문학적으로 실현하려는 하나의 시도였다는 것은 특별히 기억해둘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그 시도가 ‘소설가’라는 자신을 심문하고 회의했던 존재론적인 고투였으며 나름의 실천이었다는 것. 그것이 한 소설가가 ‘소설’이라는 익숙함 밖으로 나오려 했던 어떤 시도였음을 풍경처럼 기억하고 있다.


이런 영화를 기억한다. 막 프랑스 유학길에서 돌아온 중견 학자가 서울에서만큼은 한사코 섹스를 거부하는 애인이자 제자를 앞에 두고 ‘옷을 벗지 않는 네 이데올로기는 무엇이냐’며 자못 심각한 어조로, 대개는 짜증과 무력감 사이를 왕복하다 질려버리고 지쳐버린 한 남성의 심리를 정밀하게 묘사한 영화. 섹스를 거부하는 애인과 이혼을 거부하는 아내 사이에는 그가 내뱉은 하나의 문장. 서울 도심 위에 솟아 있는 예배당의 붉은 십자가를 보며 ‘밤이 되면 이 도시가 거대한 공동묘지가 되는 것 같다’고 내뱉았던 그 문장으로 기억되는 영화, 장선우의 <경마장 가는 길>(1991). 무기력한 이방인의 눈에 비친 도시-교회에 퍼부었던 힐란 속엔 후진국의 급속한 근대화와 개신교가 공모관계에 있음을 넌지지 드러날 뿐만 아니라 근대화 드라이브에 다른 자본에의 맹렬한 추종에 의해 매번 흔적도 없이 삭제되는 식민화의 곪아 있는 주름이 감춰져 있다. 이방인의 눈에 비친 도시-교회는 곧 지식인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조국으로 돌아온 자신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


김영민의 『당신들의 기독교』(글항아리, 2012)를 읽으며 이 두 풍경을 떠올렸다. 당신들의 기독교라는 표제가 가리키는 것은 당신도, 기독교도 아닌 겹겹이 쌓여 있는 역사의 단층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하여 ‘당신들의 기독교’라는 제목을 둘로 쪼개어 ‘당신들’이라는 호명의 위치엔 이인성의 소설을, ‘기독교’라는 대상엔 <경마장 가는 길>의 그 대사를 접붙여보았다. 소설가이면서 끊임없이 ‘소설’을 회의했으며 ‘소설’ 밖으로 나가고자 애썼던 1980년대 문학적 실험의 한 경지와 한국 사회의 무의식을, 바로 그 뇌관을 무상히 건드렸던 단 한 줄의 대사가 가리키고 있던 후발근대국가의 상처와 주름이 『당신들의 기독교』라는 표제 위에 겹쳐 보였다. 그러니 우선 『당신들의 기독교』라는 제목이 담지하고 있는 것에서부터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당신들의 기독교’라는 제목에서 감지되는 거리두기의 문맥을 파악해보자. 여기서 말하는 ‘당신들’이란 ‘나’를 제외한 이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너’의 문제라기보다는 차라리 ‘나-너’ 혹은 ‘우리’라는 합의/공감/무리의 관계가 아닌 차라리 그 밖에 서 있으려는 ‘의지’의 일환으로 읽어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당신들’이라는 지칭은 훈계나 계몽을 하는 위계의 자리가 아닌 ‘외부성’을 획득하기 위한 ‘거리두기’의 문맥으로 읽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가 그리 간단해보이지 않는다. 건드려서는 안 되며 건드리면 곧장 터지는 한국 개신교를 문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개신교란 식민지 근대 국가에 있어 서구문물의 유입 역사와 궤를 함께 하고 있으며 그것은 곧 자생적 문화 및 사상이 부재한 자리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바로 그 부재를 대리적(vicarious) 욕망으로 갈음한 흔적에 다름 아니다. 한국이라는 근대국가의 성립과 개신교의 정착이 뗄래야 뗄 수 없는 하나의 몸처럼 붙어 있다는 점을 다시 새기도록 하자. 그러니 ‘당신들의 기독교’라는 이 저작의 제목이 담지하고 있는 것은 ‘교인’이라는 특정한 부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며 식민경험을 통해 국가의 기틀을 세운 식민국가의 역사와 바로 그 지반 위에서 진행된 산업화 및 자본주의 체제의 지반의 성질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2. 텍스트(text) 밖으로, -존재의 결(texture, )


김영민의 『당신들의 기독교』에서 가장 먼저 실감 있게 다가온 것은 새삼스럽게도 글쓰기의 형식이었다. 논문중심주의적인 글쓰기의 병폐에 대한 문제 제기가 워낙 근본적인 것이었고 그만큼 한국 인문학 담론장에 큰 파장을 일으켰지만 그 논의에 동조하던 목소리들이 슬금슬금 ‘학진’(한국연구재단의 전신인 한국학술진흥재단)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으로 숨어버린지가 오래며 그럼에도 성실한 노동자처럼 오랜 시간동안 쉼없이 집필활동을 해온 일련의 저작들은 제대로 논의되지 못한 채 이단적이라거나 별스러운 요상한 글쓰기쯤으로 손쉽게 규정되어 왔으니 그 저작들의 골과 마루가 되는 사상사적 기획과 그것을 근기있고 슬금하게 꿰어갔던 글쓰기의 형식은 제대로 논의되지도 못한 채 그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것’쯤으로 낭만화되고 말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의 글을 뒤뚱거리면서라도 따라 읽은 독자나 강의를 들었던 수강생들에게 김영민의 글쓰기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계속 따라하고 싶은 것’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나 마음먹는다고 따라할 수 없는 것이 글쓰기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그의 글을 읽으면 지금과는 다른 글-말을 쓰고, 부리고 싶은 의욕이 동하는 것을 억누를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그의 글을 분명 어떤 ‘경지’에 도달한 듯하다. ‘경지’라는 별스러울 정도의 수사를 동원하는 것은 초월하지 않고 보행하는 그의 글이 곧 말로, 몸으로, 희망으로 꿰어지는 선명한 형식으로 육박해들어오기 때문이다.

     

그가 상재한 거의 모든 저작들이 그러하듯 『당신들의 기독교』또한 메타적 글쓰기의 일환으로 파악해볼 수 있다. 그의 글에서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철학적 논의보다 차라리 사회문화인류학적 기미를 포착하는 것이 더욱 용이한 것은 언제나 제 영역 밖으로 걸어나오려는 몸에 베인 태도로부터 연유하는 것이며 그 태도야말로 그가 상재한 일련의 저작들을 관통하여 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바늘구멍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 이번 저작을 ‘르포적으로’의 읽는다고 해도 ‘오독’이라 매도당하지 않을 것이다. 10명의 기독교인들을 등장시킨 이 저작은 ‘x는 기독교인이()다’로 시작하여 인물소묘로 이어지는 도입부만큼은 얼핏 소설적으로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김영민의 문체야 모국어를 구사하는 모든 이가 부러워하고 선망할 정도의 유례가 없는 경지를 보여주기에 재론할 필요가 없을 듯하지만 동무론 3부작을 위시한 일련의 저작들이 취하고 있는 글의 형태만큼은 거듭 언급되어야 하며 집중적으로 조명될 필요가 있다. 그의 저작을 조형하고 있는 일련의 글들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동무’라는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동무’라는 없던 관계 및 공동체를 조형해가는 ‘형식’에 있다고 해도 좋다. 여기서 말하는 ‘형식’이란 단지 글(text)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존재의 결(texture, )을 가리킨다. 그러니 당대의 문제들과 때론 맞섬으로써, 때론 직입해 개입하는 단상들로 촘촘하게 엮인 책()에서 내가 보는 것은 그의 다부진 ‘몸’이다. 매일매일 조형되는 습관이며 버릇이다. 글을 쓰고 있을 때뿐만 아니라 글을 쓰고 있지 않을 때의 ‘상태’다. 없는 관계를 만들어 내는 길을 걷는 산책이라는 걸음과 자본제적 체계와의 창의적 불화를 통해 새로운 희망을 향해 검질기고 지며리게 조형하는 그의 수많은 저서들은 그저 ‘김영민’이라는 ‘저자의 이름’ 아래에서 도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권의 저서 속에 혼융되어 있는 다양한 글쓰기의 형식들이야말로 오랜 시간동안 그가 조형해온 글-삶의 양식이기에 중요하게 논의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의 저작들을 조형하고 있는 각각의 식()을 감지하는 것이 각각의 저작의 내용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면 『당신들의 기독교』를 엮어내고 있는 글쓰기의 ‘식’과 ‘무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논의도 공들여 진행해봄직 하다.


 


 

3. 모여 있는 것들의 슬픔



제도권력적으로 자신의 성적 욕망을 선택적/특권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누려”왔던 남자들, 그중에서도 사회적 페르소나를 실재와 혼동(혹은 동일시)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남자-목사들, 그중에서도 소수의 오입쟁이 목사-교수들, 그리고 이 모든 규정을 집약해서 대변하는 C는 대체 무엇일까? (중략) 제도의 중심에서 그 제도의 사이비성을 가장 열성적으로 증명하는 제도의 도착적 욕망은 무엇을 향하고 있는 것일까?

-룸살롱의 목사들, 『당신들의 기독교』, 44



우리의 이웃들, 우리의 가족들, 우리의 애인로 둘러쌓여 있는 곳에서 매번 이웃과 가족, 애인이 되어야 한다는 공갈과 협박 아래에서 ‘당신들’이라는 ‘거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화자는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가? 비상해서도 안되고 그들 안으로 들어가 침잠해서도 안 되는 ‘사이-공간’에 서 있는 것의 어려움. 그럼에도 쉬지 않고 밖으로 내딛는 그 걸음, 그렇게 걷다가 죽으려는 그 검질기고 일관된 태도에서 나는 버릇과 습관이야말로 세속의 죽음을 넘어서는 무서운 열정이자 생활정치를 몸에 내려앉히는 한 경지를 보게 된다. 그러니 ‘당신들’이라 지칭할 수 있는 자리란 위계적 우위나 도덕적 정당성 따위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들의 기독교』에서 지칭하는 ‘당신들’이란 ‘룸살롱의 목사들’로 통칭되는 천민자본주의라는 후발근대국가의 적자인 ‘졸부’ 따위의 인간형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주변부의 사람들이자 체제 밖으로 내몰()린 이들이 다시 체제에 습합되거나 침윤되어 되먹히는 형국을 일관되게 포착하고 있는 이 저작에 등장하는 10명의 기독교인을 통해 우리는 종교의 세속화와 세속의 이치를 보게 되며 공동체에의 열망이 언제나 대안적일 수만은 없으면 외려 체제의 단말기가 되어 그것을 더욱 강고히 하는 데 복무하는 회로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는 것 또한 확인하게 된다.


그러니 이 책의 전반에 흐르고 있는 주된 정서는 힐난이나 비판이라기보다 차라리 안타까움이나 어긋남에 대한 슬픔에 가까운 것이라 해야겠다. 정확히 말한다면 필자는 손쉽게 뒤발하는 정서를 휘발해버리고 ‘나--우리’의 안락한 트라이앵글의 내부가 아닌 관계를 객관화하고 메타화하는 ‘당신’의 자리로 ‘걸어’가 버린다. 이때의 ‘당신’이란 ‘남’도 아니며 ‘님’도 아니다. 그것을 한사코 가까워지지는 않는(허영이 아닌), 그럼에도 멀어지지도 않는(냉소와 허무가 아닌) ‘사이-공간’에서만 구성되는 ‘관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차마 제 품으로 안지 못하고 다만 세심한 듣기로, 현명한 개입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을 세심히 보듬고 있는가. 그러니 그는 얼마나 외로울 것인가? 그의 글이 곡진한 것은, 그의 강좌가 열정적이고 세심하며, 때때로 영혼에까지 닿는 듯한 착각마저 드는 것은 바로 ‘사이-공간’에서 구성하는 ‘관계’의 세속적 잔여에까지 그의 마음씀과 애씀이 가닿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들의 기독교』에서 내가 하릴없이 잦아들었던 것은 한국사회의 낮고 가난한 세속의 숲을 보듬어 가려는 그의 검질기고 곡진한 걸음의 온도에 있었다고 해도 좋다.



『당신들의 기독교』 책마치에 이바지, 카페 <헤세이티>, 2012. 12.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