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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성실한 기적  

by '작은숲' 2014. 10. 18.

 2014. 10. 18

 

 

* 지난 겨울부터 봄까지, 아니 여름을 넘어갈 때까지 나름대로 애를 써가며, 성실히 살았지만 내 삶은 점점 나빠져만 갔다. 기적은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내게 닥친 참혹하고 참담한 일들로 삶의 뿌리가 뽑혀나갔을 뿐이다. 독일 베를린에서 한 시인의 시집 해설을 쓰느라 보름 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여러모로 많은 이들에게 폐를 끼쳤다. 잠은 부족했지만 성실한 기적에 대한 희망이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다. 어리석은 시간이었다. 글로써, 관계 맻음의 노동으로 무언가를 증명하고 바꾸려는 애씀, 그 안간힘이 어리석은 일인지 몰랐던 여름, 베를린. 매일매일 성실한 시간을 보낸다면 관계도, 세계도 기적을 잉태할 수 있으리라는 어리석은 믿음에 기대어 썼던 어리석은 글 한 편. 그 여름,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성실한 (관계의) 기적에 대한 기만이었으며 득달같이 달려들던 한 줌의 욕망이었다. 무척이나 볕이 좋았던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여름, 폐허가 되어버린 어떤 시절.      

 

 

 

 

 

 

 

1.

어떤 재능은 곧잘 낭비되고 필연적으로 오해를 낳곤 한다. 정익진의 경우, 전자의 낭비로부터는 가까스로 비켜나갔지만 후자의 오해는 속절없다. 재기발랄하고 감각적인 언어 사용 능력을 두고 사람들은 서둘러 ‘유희적’이라는 딱지를 붙이곤 한다. 그의 시에 유희적인 특성이 있다면 그 가용 범위는 사물과 사물, 사물과 세계 사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유연함’을 밑절미로 한다는, 그 정도까지만이다. 만약 불가피하게 ‘유희적’이라는 간명한 규정을 한 시인의 시적 세계로 진입하는 첫번째 걸음으로 삼아야 한다면 우리는 곧장 유희를 가능케 하는 유연함의 출처를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유연함은 가벼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유연함의 출처는 꾸준함에 있다. 간명하게 말해 유연하다는 것은 성실하다는 것이다. 정익진의 감각적인 언어의 특질에서, 사물과 세계 사이를 유연하게 넘나드는 것에서 우리는 매일매일 꾸준하고 성실한 태도로 지속하는 ‘시적 운동’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쉽게 오해 하는 사람은 결코 성실할 수가 없다. 서둘러 ‘딱지붙이기’를 좋아하는 이들 또한 그런 이유로 유연해질 수 없다. 오해를 받는 이가 성실함을 지속한다는 것, 오해를 무릅쓰고 바로 그 오해 아래에서도 꾸준함을 지속하며 유연해지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정익진 시의 배면(背面)에 흐르고 있는 유연함은 즉흥적인 성질의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버텨 지속해온 운동이 물화된 ‘근육’이라 바꿔 말할 수 있다. 그것을 ‘시적 근육’이라고 불러도 좋다면 지체없이 그것의 쓰임에 대해 묻기로 하자. 정익진의 시적 근육은 무언가를 내리쳐 결단내거나 들어올려 정복하는 데엔 관심 없다. 다만 끊임없이 넘나들기, 오직 이동하고 또 이동하기를 반복하는 데 쓰일 뿐이며 바로 그 쓰임을 통해 더욱 단련된다. ‘단련’이란 견고해진다는 것이다. 정익진에게 그것은 부피를 늘려가거나 딱딱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유연해진다는 것이다. 그의 시적 근육은 ‘결정적인 순간’을 간취할 때보다 사물과 사물 사이를 성실히 넘나들기 위해 쓰일 때 더 빛난다.

 

이 꾸준함의 행보가 내겐 랭보의 ‘바람구두’를 떠올리게 했다. “여기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여기서는 하루 더 지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여기서는 견딜 수가 없다. 이곳이여 안녕, 난 어디든지 가려니”라 외쳤던 랭보의 걸음이 ‘도피의 열정’을 동력으로 했다면 정익진의 걸음은 ‘넘나들기의 열정’을 동력으로 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사물과 세계, 사물과 사물 사이를 넘나든다는 것은, 이동하고 또 이동한다는 것은 결국 사물과 세계, 사물과 사물 사이를 ‘잇는다는 것’이다. ‘잇기’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며 그것은 결국 없던 길을 낸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저 걸음은 독아(獨我)적이라보다 독립(獨立)적이며 독립적이되 상호적이다. 정익진에게 있어 ‘걷기의 지속’은 매일매일의 성실한 태도로 유연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일상과 생활의 바깥이 아니라 바로 그 일상과 생활 안에서 유연함을 지속하는 걸음은 분명 독보(獨步)적인 것이다. 이 독보적인 걸음, 독보적인 성실함을 나는 사물과 세계, 사물과 사물 사이에 이루어지는 발신과 수신의 경로를 바꾸는 ‘변침(變針)의 노동’이라 부르고 싶다. 그는 무언가를 정복하거나 어딘가에 당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에게 애써 무언가를 전하는 사람이다.

 

 

 

2.

삶을 옥죄는 것들은 원치 않아도 때에 맞춰서 도착한다. 오늘도 우리 앞으로 정확하게 도착하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고지서와 광고 뭉치다. 이 가난한 목록들 앞에서 우리는 매번 무력한 수신자의 자리를 확인한다. 하루가 멀다하고 도착하는 수많은 편지들, 그것은 죄다 통보장이다. 통보장이 편지를 대체해버린 탓에 이제 편지는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야 하는 것’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온종일 여기저기를 샅샅이 뒤진다. 그런 이들에게도 편지는 도착하지만 불행히도 그들은 어김없이 자신에게 도착한 편지를 제대로 읽지 않는다. 한 사람을 위해 쓴 편지가 바로 그 한 사람에게 도착할 때 놀랍게도 그 당사자는 무지하다.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말을 건네는 순간, 그 한 마디의 말을, 하나의 문장을 공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오늘도 자신에게 정확하게 도착한 한통의 편지이기 때문이다. 수신자란 뒷짐 지고 기다리는 이가 가질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나 아닌 대상을 매일 매일 성실하게 공대하고 받아 안을 수 있는 이만이 수신자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다.

 

매일 매일 도착하는 편지를 성실하게 수신한다는 것은 각종 고지서와 통보장이 독점하고 있는 ‘수신의 경로’를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정익진의 시에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점은 ‘사물들의 편지’를 매일 매일 성실하게 수신한다는 것이다. 일상에 편재되어 있는 사물들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연계함으로써 시적 가상공간을 직조하는 능력이야 이미 많은 이들을 통해 회자된 바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능력 때문에 가려져 있던 것이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다시 정익진의 ‘유연함’을 상기해보자. 유연하다는 것은 지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용하지 않으면 이내 굳어버리는 것이 근육이라면 예컨대, 시적 근육의 유연함이란 그가 늘 시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런 습관을 동력으로 시작(詩作)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 성실함이 국가와 자본이 공모하면서 고착시켜버린 발신과 수신의 자리를 바꾸는 일을 한다.

 

그런 점에서 매일 매일 성실하게 사물의 편지를 수신한다는 것은 기민한 언어 감각을 정련하는 데 몰두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물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데 정성을 다한다는 것, 그렇게 발신과 수신의 경로를 바꾸고 확장함으로써 일상 속에 잠재되어 있는 만남의 방식을 발견하고 또 발명한다는 것이다. 만남의 방식을 발명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고착화된 위계적 질서를 바꾼다는 것이다. 이를 저마다에게 할당된 ‘몫을 재분배’하고 고착된 각자의 ‘자리를 바꾸는 것’이라 바꿔 불러도 좋다면 그곳을 ‘정치의 자리’라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정익진의 시가 상이한 사물들 사이를 활달하고 유연하게 넘나들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평등에 대한 감각’ 때문이다. 이 감각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를 쓴다는 것이 자신에게 도착한 편지를 또 다른 누군가에게 송신하는 것이라면 그를 성실한 우편배달부라 불러도 좋지 않겠는가. 이 우편배달부의 시적 노동이, 매일 매일 지속하는 성실한 행보가 사물과 사물을 잇고, 사물과 세계를 연계하는 다른 경로를 만들어낸다.

 

 

 

3.

꾸준함과 성실함이 유연함의 밑절미라면 상처는 유연함의 서명이다. 나는 곳곳에서 정익진의 활달한 시적 상상력의 저류에 흐르는 도저한 슬픔과 상처의 흔적을 보게 된다. 시집의 첫번째 시를 함께 읽어보자.

 

가로등 희미한 부둣가 근처, 취객이 오줌을 누다

냉동 창고의 벽면 속으로… 스며든다

아직도 오줌을 누는 하반신은 바깥에 남겨둔 채로 

 

 

벽의 갈라진 틈 사이마다 이빨이 돋는다

어쩌다 오늘의 운세가 좋지 않은 이들, 벽 가까이 지나치다

불투명해진다… 담배를 피우던 팔 한쪽, 페달을 젓던 다리 하나 혹은

몇몇 살덩이만을 남겨둔 채로 

 

 

벽 속으로 사라진 사람들은 곧 잊혀 질 것이다

달빛을 머금고 잔잔하기만 한 벽면은 호수와 같다

 

 

다시 피비린내가 흐른다 한차례 벽들이 요동을 친다

가까운 해변이 먼 바다와 연결되었듯이 벽과 벽은 통해있다 

 

 

의심받지 않는 벽, 누구도 벽이 다가서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인기척이나 뒤돌아보아도

벽은 여전히 실눈을 뜨고 벽처럼 서 있을 뿐이다

-「앗, 상어」 전문

 

인적이 드문 후미진 부둣가 앞을 술에 취한 한 남자가 지나간다. 그는 더럽혀진 얼음들이 바깥으로 밀려나온 무더기 앞에 서서 소변을 눈다. 녹지 않은 얼음들이 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벽면 너머는 아마도 냉동 창고일 것이다. 더럽고 차가운 얼음더미 위로 흐트러진 취객의 뜨거운 오줌이 쏟아지고 그 위로 듬성듬성한 구멍이 생긴다. “벽의 갈라진 틈 사이마다 이빨이 돋는다”는 구절은 이 듬성듬성한 구멍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차갑고 더러운 세계에 산다는 것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날카로운 이빨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남자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이유 또한 ‘세상의 이빨’로부터 상처를 입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정익진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공포와 위협과의 대면을 ‘불투명해진다’라고 말한다. 불투명해진다는 것은 불확실해진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 ‘상처 입음’의 흔적은 확정적인 체계가 무너지는 순간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불투명해지고 불확실해지는 것은 벽에 가로막힌 삶만이 아니다. 삶을 둘러싸고 있는 벽 또한 취객의 오줌발에 불투명해진다. 삶을 제약하고 가로막고 있는 벽을 극복하는 저마다의 방법이 있다면 정익진은 벽을 부수거나 허무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하나의 벽에서 다른 벽으로 건너가는 방법을 택한다. 그렇게 건너갈 수 있을 때 벽과 벽은 통하게 된다(“가까운 해변이 먼 바다와 연결되었듯이 벽과 벽은 통해 있다”). 벽을 다른 벽과 연결 시킬 때 우리는 ‘제약의 조건’이 ‘이행의 조건’으로 변하는 것을 보게 된다. 불투명과 불확실은 상처의 흔적이면서 동시에 감응(感應)의 조건이기도 한 것이다.

 

갑작스레 나타나 삶을 뭉텅뭉텅 잘라가버리는 날카로운 이빨은 특정한 장소에 잠복해 있는 위험이 아니라 차라리 다른 것과 접속할 수 있는 접촉면이자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가벼운 말 한마디에 혀가 잘리고 / 짓눌린 심장엔 금이 간다”(「절취선」)는 대목에서 감지할 수 있는 것은 도저한 폭력성만이 아닌 상처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절취의 흔적을 두고 “떨어져 나간 것들엔 배후가 있다”(「절취선」)고 한 것은 절취선이란 (잘려나간) 상처이면서 동시에 다른 무엇과 연결되었던 자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계의 폭력을 감각하고 그것을 표현할 때, 지금-이곳-우리에게 전송하고 배달할 때 정익진은 ‘비명’을 ‘감탄’으로 변주한다. 상실의 자국에서 생성의 동력을 이끌어내는 이 시적 운동이야말로 발신과 수신의 구조를 바꾸는 ‘변침의 노동’이 아니라면 달리 무어라 부르겠는가. 갑작스레 나타난 날카로운 이빨을 벌린 상어를 ‘앗, 상어’라는 경쾌한 어조로 명명할 수 있는 것은, 가로막고 있는 벽을 허물지 않고 외려 다른 벽과의 접속을 통해 제약이라는 조건을 접속의 조건으로 변주하는 능력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계에 잠복해 있는 것은 공포와 위협만이 아니다. 바로 이 세계에 잠재되어 있는 유동하고 생동하는 것을 정익진이 감각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세계-사물과 함께 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적 가상 공간에 자신의 감정과 추상적인 관념을 채워넣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물들이 전하는 메시지에 성실히 응대할 때, 세계에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기꺼이 접속하려는 노동을 멈추지 않을 때 조우할 수 있는 기적. 나는 그것을 ‘매일매일 성실한 기적’이라고 부르고 싶다. 버려진 목욕탕이 갤러리로 변한 「반디」가 바로 그런 기적에 관한 시다. 

 

 

반딧불이가 아닙니다.

동네 목욕탕이 화랑으로 변신했대요.

대안공간 반디입니다. 

 

 

광안리 해변에서 몰려온 파도 냄새를 맡으며

반디 안을 모래사장 거닐듯 어슬렁거리죠.

오늘의 전시 명은 ‘남사당과 B 보이’, 윙크 한 번 해보세요.

실내의 반디도 작품이지만 실외 제2전시장으로 가는 길목

지저분하고 자연스럽게 흐트러져 있는 오브제들,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죠.

 

쓰레기 봉다리, 오래된 모래, 일상의 귀퉁이에서 떨어져 나온

페이지들, 녹슨 것들, 빗물에 젖은 각종 전단들,

쓸데없이 우뚝 서 있는 목욕탕 굴뚝, 그 밖의 반디

 

화랑도 화랑이지만 반디 밖의 작품들에도 눈길이 갑니다.

새마을 금고 광안점, 과일 전쟁, 안녕, 낭랑 헤어라인

안녕, 황금 돼지 마을, 초콜릿 호프, 경북 만물 철물점 그리고

호암 경로당 여러분들 반디, 반디

 

큰길들도 반디이지만

후미진 골목 안 텃밭의 잎사귀 하나,

낡은 담벼락 주변, 이상한 꽃들과 잡초도 반디

 

상품포장지나 재떨이, 뭐든지 가져오세요.

망가진 기타라도 가져오세요.

사인 해드릴게요. 무조건 반디입니다.

 

쪼가리 하나

먼지 한 톨까지,

-「반디」 전문

 

동네 목욕탕이 화랑으로 변신한 ‘반디’는 시인이 만든 시적 가상공간이 아니라 2007년부터 2011년 10월까지 부산시 수영구 광안동에 실제로 존재하던 대안공간이다. 이 시는 시적 유희란 현실을 비켜나가거나 자족적인 영역에서 기교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도착해 있는 현실을 마주하고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다양한 경로들을 비추는 한 방식임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반디’라는 대안공간을 통해 새로운 뜻을 품게 된 ‘반디’라는 어휘는 시인을 통해 그 의미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른 것들을 향해 날아가 번져간다. 정익진의 시선이 가장 먼저 도착하는 곳은 당연히 상처 받은 것들이다. “쓰레기 봉다리, 오래된 모래, 일상의 귀퉁이에서 떨어져 나온 / 페이지들, 녹슨 것들, 빗물에 젖은 각종 전단들, / 쓸데없이 우뚝 서 있는 목욕탕 굴뚝, 그 밖의 반디”. ‘반디’라는 대안공간이 다양한 예술의 양식을 실험함으로써 일상 속에 예술이 자리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었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목욕탕을 대안공간으로 변모시키며 주변의 공간을 변화시켰던 것처럼 정익진은 ‘반디’의 내부 구석구석을 옮겨다니며 숨어 있는 희미한 빛(‘반디’)을 찾은 뒤 이내 반디 바깥으로 나가 ‘반디적인 것’이 흐르고 있는 길을 발견한다(“그 밖의 반디”).

 

시인의 고유한 언어로 새롭게 명명하고 자신의 서명을 새기는 일이 아닌 다만 연결하고 통로를 만드는 것, 사물과 사물들이 맺고 있는 관계망을 비춤으로써 잠재되어 있는 힘(빛)을 발견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정익진의 시적 운동이 하는 일이다. 다음과 같은 부분을 보라. “마을 금고 광안점, 과일 전쟁, 안녕, 낭랑 헤어라인 / 안녕, 황금 돼지 마을, 초콜릿 호프, 경북 만물 철물점 그리고 / 호암 경로당 여러분들 반디, 반디” 주변 상점들의 이름을 나열한 것일 뿐인데 이 연쇄가, 아니 연결이 미약하고 희미한 빛이 온 마을로 번져가는 진경처럼 보인다. 경로당의 어르신을 향해 ‘반디, 반디’라고 ‘인사’할 때 나는 시인이 삶의 회복을 알리는 ‘복음(福音)을 전하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 진경을 조금 더 감상하기로 하자. “큰길들도 반디이지만 / 후미진 골목 안 텃밭의 잎사귀 하나, 낡은 담벼락 주변, 이상한 꽃들과 잡초도 반디 // 상품포장지나 재떨이, 뭐든지 가져오세요. / 망가진 기타라도 가져오세요. / 사인 해드릴게요. 무조건 반디입니다. // 쪼가리 하나 / 먼지 한 톨까지.” 시인이 애써 배달하는 ‘반디’라는 편지로 인해 내부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안과 밖이 모두 반짝인다. 정익진의 유연하고 성실한 시적 노동은 모든 사물 속에 잠재되어 있는 빛이 넘나들 수 있는, 번져갈 수 있는 길을 만드는 일을 한다. 군림하고 장악하는 ‘눈부신 빛’이 아니라 나누며 번져가는 빛, 줄여 말해 빛의 나눔. ‘매일매일 성실한 기적’이란 이런 나눔을 두고 한 말이다. ‘성실함’이라는 일상적인 것과 ‘기적’이라는 비일상적인 것이 어울릴 수 있을 때 “쪼가리 하나 / 먼지 한 톨까지”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정익진의 시적 노동이 매일매일 성실하게 일구어가는 토양에서 우리는 ‘평등함의 진경’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4. 

 

생수병 하나 차 뒤편 유리창 가에 놓아두었습니다.

브레이크를 밟거나, 커브, 요철을 지날 때마다

쿨렁, 쿨렁, 물소리를 냅니다.

 

시냇물의 뼈마디 소리,

강물이 흘러가다 멈추는 소리,

 

심장이 벌렁거리는군요.

피아노 건반을 누를 때마다

쿨렁거리는 소리,

 

김밥을 급히 먹었을 때, 한 모금, 쿨렁

막힌 가슴속 뚫어주기도 합니다.

 

생수를 들이켜시는 할아버지, 쿨렁, 쿨렁

메마른 목울대를 지나는 그 소리

 

내 뱃속에서 울렁거리는 물고기 한 마리

 

식도를 타고 쿨렁, 입 밖으로

튀어나옵니다. 쿨렁, 쿨렁, 투명한 생각들이

연거푸 떠오릅니다.

-「생수병」 전문

 

차 뒤편에 놓아둔 생수병이 브레이크, 커브, 요철이라는 문턱을 넘어갈 때마다 쿨렁거린다. 이 소리가 시냇물의 뼈마디로, 막힌 가슴을 뚫어주는 물 한모금으로, 막힌 곳을 뚫고 목울대를 넘어가는 소리로, 마침내 뱃속에서 울렁거리는 물고기 한 마리로, 그런 투명한 생각들의 연쇄로 이어진다. ‘쿨렁’이라는 부사는 좁은 공간에 갇혀 있는 비명이면서 동시에 부단히 들썩거리는 존재의 울림이기도 하다. 생수병이 흔들리며 내는 일상적인 소리가 바깥으로 흐를 수 있도록 정익진은 소리의 길을 튼다. 그 길 위에서라면 생수병 안의 물이 냇가로 흘러들고 피아노 건반을 지나 누군가의 목울대를 넘어갈 수도 있다.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이 연쇄의 지속은 평등의 지반 없이는 불가능하다. 정익진의 종횡무진 넘나드는 유연함의 감각은 바로 그 평등의 지반을 다지는 시적 노동이다. 끝없이 펼쳐진 세속의 길을 걸으면서도 시인은 좀처럼 허무에 빠지지 않는다. 정익진의 시를 두고 낙타를 떠올리는 것은 조금 어색해보이지만 매일매일 성실하게 사물과 사물을, 사물과 세계를 넘나들며 연계하는 그 꾸준한 행보는 낙타의 걸음을 닮아 있다. 사막(세속)을 걷는다는 것은 그곳을 벗어난다는 것이 아니다. 사막에 머물며 오랫동안 지속하는 걸음이, 그 성실한 걸음이, 쉼없는 건넘의 걸음이, 끊이지 않는 발자국의 연쇄가 사막을 바꾼다. 세계를 바꾸고, 우리가 발딛고 있는 이곳의 지면을 바꾼다. 평등해서 다정한, 그래서 더 없이 아름다운 곳에서 우리는 “수면 위로 입술을 내민 동물들”이 내는 존재의 북소리를 듣게 된다.

 

해파리들,

완만한 파도에 실려와

낙하산처럼 날아오른다

멈출 수 없는 꿈,

몇몇은 아직도 구천을

떠돌며 히죽히죽 웃는다

교회의 첨탑 위에 걸터앉았기도 하고

방금 정사를 마치고 잠든 연인들의 침실

어디쯤엔가 일렁이다 얼른 사라진다

살랑대는 머리카락 사이

눈동자가 짓물러 있다

서로를 끊임없이 지분대며

물컹하지만 투명한 영혼을 퍼뜨리는 족속들

광장의 시계탑, 꽃길,

화장터, 동네 언덕 위, 집들 주변을

흔적 없이 머무르며…

이승을 되새김질한다

수면 위에 입술을 내민 동물들의 이름,

태양이 지워버린 기록들

팔꿈치의 향방 따위를

그들은 잘 기억하고 있다

음울하게… 흐물흐물…

너울너울… 떠다니며

결코 세상 밖으로

떠날 줄을 모른다

둥, 둥

-「해파리 유령」 전문

 

해파리가 무게도 색깔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언제나 경계 위를 떠다니기 때문이다. 오직 ‘사이’에서만 해파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에서 우리는 쉼없는 넘나듬과 유연함의 운동성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파도에 떠밀리고 낙하산처럼 속절없이 떠올라 이글거리는 태양에 이내 지워질 수도 있는 연약하고 투명한 존재가 ‘히죽히죽’ 웃을 수 있다는 것, 그런 표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정익진의 시를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너울너울’과 ‘흐물흐물’은 이곳과 저곳을 유영하며 되새김질 하는 소리다. 수면을 지면으로 다지는 소리다. 그것은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가 “결코 세상 밖으로 / 떠날 줄을 모른다”는 것을, 한시도 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둥, 둥’은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의 알림이며, 바로 그 존재의 무게가 경계(수면)와 부딪치며 내는 북소리다. 이 북소리가 수면 위로 입술을 내밀며 자꾸만 올라와 그곳을 지면으로 바꾼다. 동시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견고한 지면이 흐물흐물 너울너울 바뀌며 서로가 평등하게 넘나들며 흘러갈 수 있게 된다.

 

 

_정익진, 『낙타 코끼리 얼룩말』(신생, 2014)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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