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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독신'하기(1)-두려움의 연마

by 종업원 2015. 7. 8.

2015. 7. 8




집은 실로 무서운 곳이다. 요며칠 이 생각을 몇 번이고 곱씹다가 나조차 모르는 사이에 몸에 안착한 감각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집을 무서운 곳이라 여기는 것은 대체로 두 가지 이유에서인데, 이 집에 아무도 없다 여겨질 때와 초대 받지 않은 이의 침입이 있을 수 있다 생각될 때 그러하다. 내가 사는 집은 해변이 훤히 보여 방문객으로부터 '경치가 좋다'는 이야기를 듣곤하는 곳이지만 내부는 오래된 목조 건물의 꼴을 가지고 있으며 천정이 무척 높아 기괴하게 보일 때가 많다. 더군다나 꽤 긴 나선형의 계단으로 이어져 있는 복층이라 1층에 있을 땐 2층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고 2층에 있을 땐 1층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짐작할 수가 없다. 넓은 창이 많아 침입의 위험으로부터도 취약하다. 헌데 나는 이 집에서 10개월을 살면서 단 한번도 무섭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다. 새벽에 화장실을 가거나 주방으로 갈 때 섬뜩한 한기를 느낀 적은 몇 번 있지만 무섬증은 그 순간 뿐이다. 더군다나 나는 전등을 거의 켜지 않아서 집은 늘 캄캄하다. 괴괴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불을 켜지 않는 건 아니고 다만 불필요한 전기를 쓰고 싶지 않기 때문인데, 누군가 방문했을 때나 묵어갈 때 이 집이 꽤나 무서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겨우 한번씩 해보게 된다. 

 

분명하게 말한다면 내가 살고 있는 집이 오래되고 낡아서 무서운 것이 아니라 집이라는 공간이 무서움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 말해야 할 것이다.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명징한 사실을 사무칠정도로 섬뜩하게 알아차리게 되는 곳이 집이며 내 힘으로 어찌할 수도 없고 무엇 때문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침입자가 언제라도 방문할 수 있는 곳 또한 집이다. 그럼에도 집이 품고 있는 두려움이라는 조건을 화려하게 꾸며 감추거나 남김없이 불을 비춰 애써 쫓아내야 할 것은 아니다. 집에 산다는 것은 바로 그 두려움과 동거한다는 것이다. 차라리 내가 살고 있는 집이 무서운 곳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무서움에 벌벌 떨지 않기 위해 대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독신(獨身)’이란 어쩌면 바로 그 두려움과 무서움과 어울릴 수 있을 때 지속할 수 있는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다. 형체를 알 수 없고 언제 나타날지도 짐작할 수 없는 무섬이 늘 곁에 있음을 잊지 않는 것을 통해서만 독신 또한 “모르는 숲에서 혼자 쓰러지는 나무”(이성복)처럼 초연히 수락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렇게 쓰러지지 않게 제 몸을 스스로 건사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집을 떠나야 하는 순간까지 집을 화려하게 가꾸기보다 그저 잘 낡아갈 수 있게 돌볼 일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야간 산행에 대한 의욕을 가만히 품게 되었는데 얼마 전 친구와 함께 갔던 야간 산책으로 그 연유를 조금 알 수 있었다. 야간 산행을 마음 속으로 계획했던 것은 야밤의 청취나 고즈넉한 산 속의 신험한 기운을 체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혹독한 두려움과 무서움을 마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출구가 없어보이는 혹독한 두려움 속에서 내가 만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오싹한 공포 체험을 통해 별스런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뒤틀린 욕구와는 아무 상관 없다.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게 ‘독신’의 조건이라면 벌벌 떨며 기다릴 것이 아니라 찾아나서보는 것도 '어떤 사귐'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게다. 두려움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무서움을 무서워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독신’할 수 없다. 그렇다고 벌벌 떨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쩌면 나는 벌벌 떨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을 너끈히 짐작할 수 있기에 야간 산행의 의욕을 품은 것이지 않을까. 기쁨처럼 두려움 또한 우리가 마주해야 하고 또 익혀야 하는 세계다. 할 수 있는 만큼 사귀어 두려움 때문에 일상과 생활을 저당잡히는 일이 없어야 하겠다. 말하자면 두려움도 연마와 단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은 밤, 둘이서 올랐던(!) 숲으로 우거진 뒷산에서 감히 확신할 수 없는 작은 깨침이 있었다. 혼자보다 두 사람이 더 무섭고 두렵다는 것을. 비가 오는 날 우산을 쓰고 손전등도 없이 홀로 걸었던 언젠가의 그믐 밤보다 희미한 달빛에 기대어 함께 걸었던 그 길이 몇 곱절이나 더 무서웠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두려움이란 어쩌면 ‘혼자’가 아닌 ‘둘’ 사이에 침입하는 것이 아닐까. 두려움은 독신(獨身)할 수 없는 상태를 파고드는 악마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내 친구까지 건사해야 한다는 생각지 못했던 위태로움에 휩싸였던 것은 우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한갓 강박이지 않았을까. 아니 그보단 다만 홀로 ‘독신’할 수 없음을 서둘러 알아버려 내내 위태롭게 흔들렸기 때문이지 않을까. 두 사람이어서 더 두려웠다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일 때도 ‘독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늘 홀로 될까 두려워하지만 실은 두 사람일 때 두려움에 더 속수무책이다. ‘독신’ 한다는 것은 결혼이라는 심급을 거부하는 것에 무게 중심을 두는 세속의 ‘독신주의’와는 그 결을 달리 한다. 경제력이나 외로움에 익숙해질 수 있는 다종한 취미의 개발 따위만으로 '독신' 하기 어렵다. 일상과 생활 속에서 부단히 연마하고 단련하지 않으면 ‘독신’할 수 없다. 두려움과 무서움을 삶의 조건으로 수락하지 않는 한 ‘독신’할 수 없다. 제 몸을 건사하고 돌보며 정히 들여다볼 수 있어야 기꺼이 만날 수 있으며 현명하게 나눌 수 있다. '독신'은 관계의 조건이다.

 

기약할 수 없는 모월 모일 1인용 텐트를 짊어지고 산을 오를 수 있을까. 산을 넘어 내려가기 전에 그곳에서 하루를 묵는다면 혹독한 두려움과 마주해 하룻밤 '함께' 독신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야간 산행에 나서기 전에 이미 충분히 혹독한 두려움과 숱하게 마주하게 될 것임을. 매순간, 매일매일 ‘독신’해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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