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회복하는 생활

홀로 조용한 기적

by '작은숲' 2015. 8. 23.

2015. 8. 21




조금만 걸어도 쉬 지치고 몸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듯한 무기력의 원인을 골똘히 생각해본다. 마음이 아닌 몸의 상태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시간은 무용할지라도 일말의 정직함이 있다. 이런 저런 짐작만 할 뿐 분명한 원인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너무나 많은 원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복잡다단하게 얽힌 원인들에 몸이 결박당해 있다는 것이 지금의 내 상태임을 알게 된다. 지친 몸에 대한 응답이 산책말고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암남공원을 향해 걷는다. 


비내린 뒤 저녁 나절. 해가 사위어가는 잠깐 동안 남아 있는 볕의 잔해를 천천히 밟으며 숲으로 향한다. 암남공원 입구에 새로 생긴 프렌차이즈 커피 전문점에 들어서다 바깥에 설치되어 있는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요란한 음악 소리 앞에서 마음을 고쳐먹는다. 요란함에 대한 불쾌한 기분 때문이 아니라 미처 눈치 채지 못한 작은 습관으로부터 등을 돌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떤 시간과 어떤 상태에서 으레 찾게 되는 커피 한잔을 한번 거부해보고 싶은 마음. 다만 내가 다가서도 피하지 않는 새끼 길고양이를 향해 고양이 울음소리를 흉내내며 잠깐 쓰다듬어 주었다. 


익숙한 듯 낯선 숲으로 들어선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모르는 길을 천천히 걷는다. 아무도 없으면서 언제라도 누군가가 나타날 것만 같은 숲속에서 나는 땀을 흘렸다. 웬만큼 뛰어도 땀을 거의 흘리지 않던 몸에서 자꾸 땀이 난다. 한 시간 남짓 걸으니 암남공원 끝자락에 도착 한다. 홀로 흘깃거리며 망설이다 윗옷을 벗고 냉동창고를 향해 발걸음을 돌려 다시 걷는다. 윗옷을 벗으니 홀가분하다. 어찌된 일인지 목과 가슴팍에서, 등줄기를 타고 땀이 주루륵 흘러내린다. 몸이 열리는 느낌이 드는 건 숲에 더 깊숙이 들어서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알 수 없는 리듬에 맞춰 음악 소리를 한 단계씩 낮추며 걷다보니 출처가 다른 내 발자국 소리와 음악 소리가 동시에 생생하고 선명하게 들리는 어떤 상태에 당도했다. 


어떤 균형. 어떤 평화로움. 어떤 예민함. 몸의 영점을 찾아가는 조심스러운 걸음. 몸과 감각이 완전히 열린 듯한 짧은 순간, 그간의 산책이 모짝 홀로 안간힘을 쓴 ‘재활’이었음을 처연하게 알게 된다. 다시 바깥으로 나가기 위한 소리 없는 몸부림이었음을, 꾹꾹 눌러 담은 비명이었음을, “입을 틀어막고 우는 울음”이었음을 캄캄한 숲속에서 홀로 알게 되는 시간. 재활(再活)한다는 것의 고독과 처연. 차마 ‘다른 나’로 새롭게 태어나지 못하고 넘어지고 바스라졌던 ‘바로 그 나’로 다시 일어서는 일. 모욕과 비참을 끝내 수락하되 다시 모욕 받지 않게, 다시 비참의 나락에 떨어지지 않게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는 일. 재활이라는 조용한 기적. 이 순간이 나 혼자만의 걸음으로 당도한 것이 아님을,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일어선 것이 아님을 환하게 안다. 곁에서 함께 걸어준 이들, 손을 잡아 이끌어준 이들 또한 기적적인 존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재활은 부활과 달리 기적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기적의 연쇄을 낳는다. 그러니 오늘도 재활하는 것이 내 몫임을 알겠다. 끝내 재활해야 하는 것이 나눔의 미래 조건임을 알겠다. 누군가의 재활을 돕는 일이 ‘곁’이라는 장소를 보살피고 지키는 일임을 알겠다.





'회복하는 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드러기라는 소식  (0) 2015.12.16
안다는 것의 비용–이별례(5)  (0) 2015.10.12
기도하는 삶  (0) 2015.07.11
'독신'하기(1)-두려움의 연마  (0) 2015.07.08
평범하게 낡아가는 세계  (0) 2015.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