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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단념하지 않는 생활

by 종업원 2015. 6. 19.

2015. 6. 19





충무교차로에서 마을버스 1번을 타면 중앙시립도서관 앞에서 내릴 수 있다. 버스가 결코 다닐 수 없어 보일뿐만 아니라 작은 자가용조차 다니기 힘들어보이는 골목을 1번 마을 버스는 마치 ‘생활의 달인’처럼 곡예 운전을 하며 거침이 없다. 골목 곳곳을 누비고 다니는 탓에 부평 시장에서부터 어르신들이 많이 승차하시는데 70대로 보이는 분이 80이 넘어보이는 분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풍경을 자주 보게 된다. 도무지 버스가 다닐 수 없어 보이는 길로 마을 버스가 오가는 것처럼 거동이 힘들어 버스에 승차할 수 없어보이는 분들이 이 버스를 탄다. 거동이 쉽지 않음에도 그 분들은 예외 없이 보따리를 쥐고 있고 기어오른다고 해도 좋을만큼 천천히 힘겹게 그러나 틀림없이 버스에 오른다. 좌석을 양보해도 바닥에 앉을 수밖에 없을정도로 관절이 좋지 않은 분도 적지 않다. 물론 그 사이에 정오가 되기 전인데도 술이 거나하게 취한 등산복 차림의 60대 중반 남성 분들의 부주의한 큰 목소리도 함께 있다. 매일 매일 안간힘을 다하는  ‘고령화 버스’를 타고 나는 오늘도 무사히 도서관에 왔다.


‘고령화 버스’에서 가뿐히(!) 내려 나이가 지긋하신 분이 이미 출발한 시내 버스를 잡기 위해 달려가는 뒷모습을 생각했다. 상대는 ‘부산 버스’ 아닌가. 대부분의 버스는 기다려주지 않고 이미 정류소를 출발했다면 사람을 봐도 멈춰서지 않는다. 그것을 그 분도 경험적으로 알고 있지 않을까? 떠난 버스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사코 그리 열심을 다해 달리는 이유와 안타까운 마음에 버스 꽁무니를 손바닥으로 다급하게 두드리는 모습이 그저 ‘안감힘의 풍경’만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이미 떠난 버스를 어림짐작으로 ‘잡을 수 없다’는 계산이 나오면 고민없이 단념해버리는 게 정상적이고 이상적이며 일상적인 일이 아니던가. ‘할 수 있는 것(만)을 하자’라는 경제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의 세계는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달려가는 저 느린 질주를, 쉽게 단념하지 않는 애씀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이 떠난 버스 세우기를 단념하지 않는 것은 고집이 세거나 자기 중심적이어서가 아니다. 실패가 뻔히 보이는데도 달리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포기를 모르는 삶이라는 것이 아니라 혼자가 아닌 ‘그 누군가와 함께’ 살아온 삶의 감각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처럼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정해져 있고 구획된 책임 속에서 사는 이들은 결코 이 시도들을 이해할 수 없다. 단념하지 않고 ‘느린 질주’를 반복하는 것은 그 발돋음 속에 ‘그 누군가’가 ‘어느 순간’ 도울 것임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늘 누군가를 돕고 또 그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아왔던 삶의 감각이 오늘도 단념하지 않는 생활을 지키는 동력일 것이다. 


마을 버스를 탈 수 없을 정도로 기력이 쇠하고 거동이 불편해보이는 어른신들이 오늘도 힘겹게 마을 버스를 타고 나갔다가 또 그 마을 버스를 타고 귀가하는 ‘단념하지 않는 생활’. 그것은 개인의 의지나 노력만으로 지켜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누군가’가 ‘어느 순간’ 도울 거라는 예감 없이는, 또 그런 희망 없이는 지킬 수 없다. 그것은 내 삶이 다른 이에게 ‘그 누군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얼마나 품고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내 시간이 그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고 돕는 ‘어느 순간’을 얼마나 허락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과 맞닿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불가능해보이는 것을 시도하는 일, 무용해보이는 것을 반복하는 일, 당장 알지 못하더라도 매일 정성을 다하는 일. 나는 내 친구들의 삶 속에서, 그들의 작업 속에서 그렇게 ‘단념하지 않는 생활’을 만나고 또 배운다. 그리고 내 생활과 작업 속에 ‘단념하지 않는 세계’를 거들고 도울 수 있는 작은 현명함이라도 품을 수 있기를 희망하게 된다. ‘고령화 버스’에서 도리없이 마주하게 되는 ‘단념하지 않는 생활’의 모습들이 지금의 나를 돕는 ‘그 누군가’이며 오늘의 나를 지키는 ‘그 순간’임을 알겠다. 목적 없이, 의도 없이, ‘돕지 않고 돕는 이들’과 오늘도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단념하지 않는 세계’ 속에서 새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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