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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기도하는 삶

by 종업원 2015. 7. 11.

2015. 7. 11

 

지난 달 <문학의 곳간> 19회를 마친 다음 날 J 형의 초대로 제천에서 하루 묵었다. 반년 넘게 발품팔아 익힌 길들을 아낌없이 나눠주려는 J 형의 애씀과 지극한 환대 속에서 샘솟은 환담을 다 기록해두고 싶지만 묵히고 묵혀 꼭 품어 안고서 남은 한 해의 절반을 날 수 있는 양식으로 삼고 싶은 의욕 또한 감추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제천에서의 이튿날 형과 함께 천천히 되밟으며 걸었던 배론 성지에서의 감흥만큼은 차마 묵혀 둘 수 없을만큼 내 안에서 내내 진동하고 있다. 배론 성지를 바깥에서부터 안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가는 동안 갖은 박해(迫害) 속에서 끝내 순교(殉敎)할 수밖에 없었던 척박한 사정과 남김없이 피를 쏟음으로써 척박한 그 땅에 새 세상으로 향하는 도랑 하나를 만들고자 했던 이들의 염원이 선득 하게 전해지는 듯 했다. 배론 성지에 오기 전에 몇 곳의 사찰을 오르내리는 동안 나를 휘감았던 것은 자연의 풍광과 오래된 사찰이 어울려 잠깐 오르내리는 방문객에게 약수물정도로 건네는 신험한 기운이 아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가 더 이상 품지 못하는 축원과 염원으로 쌓아올린 시간의 두께였다. 

축원과 염원에 대한 체감은 세속 종교에 대한 뒤늦은 관심 탓이라기보단 영겁의 사람살이 속에서 오랜 시간 응축되어 낮은 자리에 고여 있는 영험함을 새삼 마주한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그것을 영성이라 불러도 좋으며 사람살이 속에서 품게 되는 희망이라 불러도 좋다. 내가 애써 부려쓰고 있는 낮은 말들이 모짝 이 낮은 자리로 흘러들고 있음을 예감했다. 그 희미한 예감 속에서 일상적이고 낮은 말들을 글이나 말로 옮길 때 자주 ‘길어올린다’는 느낌에 휩싸일 때가 많았는데 그 이유가 어쩌면 세속의 낮은 자리에 응축되어 있는 오래된 사람살이의 이력에 젖줄을 대고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기미마저 체감 되는 것이다. 배론 성지에서 나를 온전히 뒤흔든 것은 황사영(1775~1801)이 「백서를 썼다는 토굴의 아득함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모여 예배를 올리기 위해 초가집에 모였던 아녀자들과 아이들의 석고상 앞에서였다. 조악하기 이를 데 없는 형상들이었지만 좁은 방에 옹기종기 모여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하는 그 모습의 간절함이 수백년의 시간을 거슬러 내게 희미하게 전해지는 듯 하여 잠깐 소스라쳤다. 

그릇을 굽는 가마 속에서 청나라에 있는 프란치스코회 선교사 구베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쓴 황사영의 백서를 그대로 본을 따 한지에 옮겨놓은 것을 J 형이 선물로 주었다. 부산으로 돌아와 나는 그 백서를 책상 머리맡에 붙여두었다. 작고 작은 한자를 촘촘하게 새겨넣은 터라 내용을 짐작할 순 없었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좁은 토굴에서 도착할지 알 수 없는 편지를 며칠 동안 썼던 그 시간을 잠깐이라도 떠올려보고 싶었다. 황사영의 백서는 그 자체로 기도문이다. 홀로 책상에서 쓰는 글들이 하염없는 기도와 닮아 있다고 말해도 좋을까. 홀로 읽고 쓰는 시간이 길어지고 길어져 이제는 영영 그렇게 해야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휩싸이게 되는 날이 늘어간다. 김연희 시인의 『작은시집』을 함께 읽었던 <문학의 곳간> 17회의 한 순간을 잠깐 떠올려보게 된다. 옆방에 아이를 재워두고 영화를 보다 아이의 울음 소리를 듣고 황급히 건너가 “멀리 가지 않았다고 / 내가 널 두고 어디를 가겠냐고 / 다만 옆방에 잠시 갔었노라고”(「옆방」) 아이를 달래는 짧은 시였는데, 나는 그 시를 읽으며 ‘지금 우리 옆방에 아이가 있다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 수 있을까, 그런 염려를 머금고 간절해질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잠깐 동안 품었던 적이 있다. 그 물음은 염원이나 희망과 다르지 않은 것이었는데, 황사영의 「백서」를  보며 목숨을 걸고 다른 세상을 희구하며 살아가는 것에 관해 잠깐, 그러나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깊이 침잠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 아직 도착하지 못한 염원과 희망은 누가 지키고 있으며 또 길어올리고 있는가. 절대자에게 귀의하지 않아도, 엎드려 절하며 목을 내어놓지 않아도, 붉은 피를 남김없이 흘려 작은 도랑을 만들어 흘러가지 않아도, 매일매일 정성을 다하는 손길 속에도 작은 염원과 희망이 깃들어 있지 않겠는가. 작은 말 한 마디를 건네고 미약한 문장 하나를 옮겨적으면서도 각자의 염원과 희망을 품지 않겠는가. ‘온몸을 다해 당신들에게로 건너가는 노동’ 또한 금새 휘발되고 흩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사람에 대한 염원을 지키는 애씀이지 않은가. 구제할 길 없는 땅에서 목숨을 걸고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던 황사영에게 그것은 지극한 기도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매일매일 정성을 다해 산다는 것 옆에 ‘기도하는 삶’을 적어둔다. 누구에게 무엇을 기도하는가를 묻기 전에 매일매일 정성을 다해 생활을 보살피는 미약하고 작은 그 일이 ‘기도하는 삶’의 태도 없이는 행할 수 없는 것임을 희미하게 짐작하기 때문이다. 황사영의 「백서」는 구원을 바라는 간절한 기도였지만 동시에 수십년 간 참혹하게 이어졌던 박해의 참담한 기록이기도 하다. 아직 오지 않은 염원과 희망을 품기 위해선 오늘의 참혹과 참담을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도하는 삶이란 매일매일 그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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