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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안다는 것의 비용–이별례(5)

by '작은숲' 2015. 10. 12.

  2015. 9. 9

 

 

 

 

매해 한 두 차례 앓곤 했던 감기 몸살에도 약 한번 쓰지 않고, 십수 년 간 병원 출입조차 하고 있지 않던 내가 지난 여름 꽤 여러 차례 한의원을 찾았던 건 병원을 찾아가야 할만큼 유별나게 아픈 곳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갑작스레 몸이 나빠진 친구를 따라 간 곳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체질을 8가지로 분류해 그에 맞는 처방과 진료를 해오고 있는 꽤 유명한 한의원이었는데 이참에 체질을 통해 스스로 몸을 돌볼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내심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한의원 또한 유명한 곳이 으레 그러하듯 ‘긴 시간의 기다림-고작 1~2분의 진료-기계적인 문답-질문보다는 지시사항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함’ 따위의 근대 의료 체계의 훈육적 도식에서 그리 벗어나 있지 않았지만 티나지 않게 주중 채식이나 맨손 운동을 통해 몸을 돌보고 점검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던 터라 속는 셈치고 체질이 나올 때까지 참고 견뎌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체질 침을 맞고 음식을 철저하게 가려 몸의 반응을 살펴 진술하는 일은 꽤나 곤혹스러운 일이었지만 그간 뜻한 바가 있어 먹거리부터 몸의 상태까지 나름의 방식으로 돌보고 점검해왔던 이력도 확인해볼 겸 거두절미하고 ‘해서는 안 되는 것’과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온통 금지 목록으로 빼곡한 사항을 하나 하나 지켜가며 소소한 즐거움이라도 찾으려 애쓰기를 일주일, 하루가 다르게 몸이 반응하던 친구와 달리 영 미적지근하게만 반응했던 내 체질이 먼저 나왔다. 가히 절망적인 체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유별난 체질 진단을 받아들고서 아무리 홀로 ‘검사에 오류가 있었을 거야’라며 자위해본들 수락하는 것 외엔 도리가 없었다. 내가 진단 받은 체질은 음식을 먹는 데 있어 무척이나 까다롭고 제한적인 선택지 밖에 없는 터라 관리하기가 가장 어려운 것에 속한다. 모든 육류와 유제품이 체질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야 그간 거의 먹지 않았으니 염려되는 바가 없었으나 뿌리채소의 대부분이 몸에 해롭다는 진단은 납득하기가 쉽지 않았다. 잎채소 중에도 고작 몇 종류만 허용되고 과일 또한 손에 꼽을 정도만 몸에 맞는다고 하니 ‘모르는 게 약’이라는 시쳇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의원의 진단을 전적으로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체질을 알았으니 속는 셈 치고라도 ‘체질식’이란 것을 해봐야 했다. 더군다나 내 체질은 음식 관리만으로도 몸이 빨리 반응한다고도 하니 일주일에 하루 이틀쯤은 체질식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몸에 맞는 음식만으로 며칠 간 식단을 꾸려보았다. 기름을 전혀 쓰지 않고 요리를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고 더군다나 마늘과 양파, 고추, 두부, 버섯 등을 전혀 쓰지 않는 식단을 꾸리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며칠 간 체질식을 하다 이내 질려버려 중단했지만 평소의 식단으로 돌아가는 것 또한 쉽지가 않았다. 문제는 그간 매식을 최소화하고 밥을 지어먹으면서도 육류와 유제품을 거의 먹지 않고 오직 채소류와 과일로만 식단을 꾸려왔건만 내가 즐겨 먹던 것들의 대부분이 내 체질엔 해로운 음식으로 분류되어 있으니 뭘 만들어도 즐겁지가 않다는 데 있었다. 체질식을 하자니 선택지가 너무 한정적이라 끼니를 챙기는 것이 곤혹스럽기만 하고(더군다나 유일하게 허용되는 해물이 전복이고 과일 또한 수입되는 것들 밖에 없어 비용도 만만찮게 들어간다) 기껏 채식으로 식단을 꾸린다고 해도 죄다 체질에 해로운 것들로 판명된 것이니 끼니를 챙기는 일이 도무지 즐겁지가 않은 것이다.

 

 

그놈의 체질 탓에 나름의 의지를 가지고 꾸려왔던 끼니의 이력이 ‘체질에 맞지 않는 애씀’쯤으로 내동댕이쳐진 느낌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무심히 끼니를 챙기며 몸의 상태를 점검하기를 얼마간. 이것이 체질의 문제가 아니라 ‘안다는 것’의 문제임을 알게 되었다. 안다는 것은 필시 ‘비용’을 요구하는 것일텐데, 그간 그 비용이라는 것이 앎에 어렵사리 다가서는 노동에 있다고 믿었건만 돌이킬 수 없는 앎의 자리에 서 있는 것, 앎을 짊어지고 운신하는 것에도 만만치 않은 비용이 요구된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얻게 된 앎에 비해 너무나 무거운 비용을 쥐고 만지작거리다 나는 ‘안다는 것’의 가장 큰 비용은 알고 난 뒤 그것을 잊어버리는 데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렇다. ‘안다는 것’의 가장 큰 비용은 곧장 그것으로부터 떠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아귀 힘으로 쥐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애써 붙들었던 것을 푸는 일이다. ‘쥐는 일’이 아니라 쥐었던 것을 다시 ‘놓는 일’이 안다는 것의 알짬이다. 그것은 고작 아귀 힘 따위에 의지해온 처지의 나약함이나 끝내 놓을 수밖에 없는 한계와 대면 하는 순간이 아니라 오롯이 내가 가닿을 수 있는 앎의 영토와 정직하게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안다는 것’은 그곳에 잠깐 ‘머무는 것’과 다르지 않다. 힘겹게 가닿은 곳이니만큼 그 자리에 오랫동안 머물고 싶은 마음이야 한결 같겠지만 떠나지 않고서는 그 앎의 영토가 어디인지, 또 무엇인지 알 방법은 없다. 앎이 고작 손아귀라는 그 한줌의 영역에 갇히는 일이야말로 안다는 것이 한사코 피해야 하는 타락이자 비극이 아니겠는가. 안다는 것은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앎은 ‘소유’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안다는 것은 겨우 조금 볼 수 있다는 것에 불과하며 겨우 잠깐 머물 수 있다는 것에 불과하다. 그 ‘조금’과 ‘잠깐’을 위해 한 시절 내내 애면글면 하게 될 소득없을 아귀 힘의 간절함을 허락할 수 있겠는가. 이 물음에 대해 응답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안다는 것의 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이 아니다. 이 물음은 출입허가증처럼 안다는 것의 입구에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영문도 모른 체 감당하기 힘들정도의 가혹한 비용을 치른 뒤에야 도착하기 때문이다. 한 시절 안간힘을 쓰며 붙들고 있던 것들이 속절없이 거덜난 뒤에서야 무섭게 도착하는 이 물음에 응답할 수 있겠는가. 정성을 다해 성실히 일구었던 그 관계의 텃밭이 불타 사라져버린 그 자리에서 다시 허리를 숙이고 엎드려 씨를 뿌릴 수 있겠는가. ‘당신’을 만나는 일 또한 그와 같은 일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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