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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절판도서

by 종업원 2015. 12. 21.

2015. 12. 16

 

 

“오늘이 추운 날씬가요?” 춥다는 느낌이 들 때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묻는다. ‘조금 추운 편이다’라는 답변을 듣고서야 그렇구나, 그래서 조금 춥게 느껴졌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겨울에 추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는 다소 억지스러운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보일러를 잘 틀지 않고 생활 하며 감기 때문에 중단했던 냉수마찰을 다시 시작 했다. 옷을 껴입다보면 몸이 경직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깨가 뻐근하고 허리가 결린다. 그런 둔한 상태가 못마땅 하기 때문에 ‘겨울에 추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는 완고한 생각에 붙들려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불필요한 완고함의 성향이 조금은 누그러졌다고 해도 올해의 겨울 또한 내게는 여전히 추운 것이 당연한 그런 계절이다.   


중앙동에서 회의를 마치고 실로 오랫만에 중앙 도서관으로 향했다. 보수동 책방 골목을 지나다 대우서점 앞에 서서 한참동안 진열되어 있는 책을 눈으로 훑었다. 좋은 책들이 금새 눈에 들어온다. 구매하고 싶은 책이 아니더라도 괜찮은 책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이리저리 책을 뒤적이며 사지도 않을 책들을 샅샅이 살폈다. 보수동 책방 골목을 문지방이 닳도록 다녔던 시절엔 하루만 늦게 와도 읽을 만한 인문 서적들이 빠져나가 ‘경계’를 풀 수가 없었는데, 한눈으로 봐도 꽤 괜찮은 책이 많이 보인다는 것은 그리 반길만한 일은 아니다. 그건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을 뿐 아니라 책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증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느새 나도 이전만큼 책을 사지 않는다. ‘소장 도서’의 허영으로부터 조금은 벗어났다는 점에선 긍정적인 일이지만 ‘어디 책을 나 혼자 보려고 샀었나’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은 서글프기도 하다. 헌책방엘 열심히 다닌만큼 나는 절판도서를 찾아내는 끈기만큼은 실팍했는데,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이라고 해도 찾아낸 절판도서는 꼭 구매해서 지인들에게 선물로 주는 걸 즐겨했었다. 내가 유일하게 잘 할 수 있는 선물이 헌책이었고 나는 열심히 책더미를 뒤져 절판된 책들을 꼭 찾아내곤 했다. 내게 헌책방은 '이 책은 누구에게 필요하겠고, 또 이 책은 다른 이에게 필요하겠군'이라는 즐거운 목록을 작성할 수 있게 해주는 선물의 장소였지만 이제 그곳은 한낱 헌책방일 뿐이다. 그러니 쇠락한 것은 헌책방만이 아니다. 더 이상 책을 선물하지 않는 내 삶의 쇠락이 더 뚜렷하다. 


한참을 뒤적이다보니 칼 슈미트의 책들이 여러 권 보인다. 오래전에 번역되어 나왔다가 마찬가지로 오래전에 절판된 책들인데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아감벤’ 붐으로 몇 권은 다시 재출간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절판된 상태로 실물을 볼 수 없던 책이 훨씬 많았던 터라 모두 빼내어 펼쳐보았다. 동아대학교 법학과 교수로 있는 김효전 선생께서 법문사라는 출판사를 통해 출간한 책들이다. <정치적인 것의 개념>(1932/1995)과 <정치신학 외>(1988)을 한쪽에 챙겨두고 옆으로 보니 문지스펙스럼 시리즈로 나왔다가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파르티잔>까지 놓여 있다. 표지를 펼쳐보니 익숙한 노교수의 이름이 새겨진 책도장이 선명하다. 아마도 퇴임을 한 그 분의 소장도서가 서울에서부터 여기까지 흘러온 것이겠다는 생각에까지 미친다. 어떤 곡절이 있었는지 알길이 없지만 법전처럼 완고해보이는 장정을 하고 있는 책들이 긴 세월을 견디다 이곳에 이르게된 여정이 처연하게 느껴졌다. 김효전 선생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지만 부산에서 긴 세월동안 대학에 재직하며 참으로 많은 책들을 홀로 번역하시느라 외로웠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파르티잔>은 이미 소장하고 있는 책이지만 희미한 몇몇의 사람을 떠올리며 들었다가, 힘없이 다시 내려놓았다. 이 절판도서를 기쁘게 선물할 자신이 없었다. 그것을 건네줄 사람도 없다. 


구매한 책 값의 셈을 치루면서 나는 다시 놀랐는데, 생각보다 너무 쌌기 때문이다. 대우서점 사장님은 좋은 책을 반드시 제값에 받고 파는 ‘완고함’으로 알려진 사람이었는데, 절판 도서인지도 모르고 부르는 가격도 일반 헌책에 매기는 값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내게 이로운 셈법이었지만 기쁘기는 커녕 되려 처연해졌다. 헌책들이 뒤늦게라도 제 가치를 돌려 받는 것이 아니라 서둘러 팔아버려야 하는 짐짝처럼 취급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셈을 치루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설사 오늘 절판도서를 운 좋게 구했다고는 해도 그 시절의 절판도서를 다시는 구매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을 떠올리며 몇시간동안이라도 즐겁게 책을 뒤적이며 찾아냈던 그 보물 같은 책들을 다시는 찾을 수 없다는 것을. 헌책방에서의 한 시절이 마침내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절판도서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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