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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곳간

기도하는 사람들-김훈, 『흑산』(학고재, 2011)

by 종업원 2015. 12. 23.

 

  

1. 앞질러 엎드려 절하는

 

겁박하며 숨통을 죄는 폭력 앞에서 오늘의 사람들은 말을 잃는다. 무릎 꿇리고 굴복당해 말을 빼앗긴 이들은 차마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하지만 그 곁에 앞질러 낮은 자리로 내려가 엎드려 고하는 이들이 있다. 꺼질 것을 알지만 매일 매일 말없이 촛불을 켜는 이, 기도하는 사람. 기도하는 이는 말을 아끼는 사람이다. 쉬 말하지 않으며 모르는 것을 쉽게 묻지도 않는다. 기도란 절대자 앞에 엎드려 세속의 욕망을 희구하는 제의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촛불 하나를 키고 그 앞에 엎드려 절하는 일이다. 각자의 기도로 지켜낸 작은 염원이 암흑의 침묵을 지나갈 수 있게 비추는 작은 등불이 된다. 나약하고 연약한 순간 없이는 가닿을 수 없는 장소도 있다. 낮아지는 일, 비상하는 자아의 욕망을 나직이 내려누르고 엎드려 절하는 일. 기도. 그렇게 우리 곁에서 오늘도 누군가가 켠 촛불 하나. 촛불은 약한 자들만이 발명할 수 있다.  

 

"경신년(1800) 4월에 여러 교우들이 명도회에 가입한 후로 신공을 부지런히 하였습니다. 회원 아닌 사람들도 역시 이 분위기를 따라 움직여 모두 남을 감화시키기에 힘썼으므로, 그해 가을과 겨울 사이에 무럭무럭 감화되어 하루하루 불어났는데, 부녀자가 삼분의 이요, 무식한 천인이 삼분의 일이었습니다. 양반 남자들은 세상의 화가 두려워 믿고 따르는 자들이 극히 적었습니다."

―황사영, 「황사영 백서」, 여진천 신부 역주, 『누가 저희를 위로해 주겠습니까』, 기쁜소식, 2008, 37∼38쪽.

 

200년 전 제천 배론의 작은 토굴 속에서 황사영이 울부짖으며 썼던 편지는 그 자체로 간절한 기도였고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한 이들에게 바치는 애도사였으며 지금 불밝히지 못한다 해도 훗날 누군가가 불밝힐 수 있도록 목숨을 다해 등(燈) 하나를 지키는 일이었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걷는 길을 비추는 촛불 또한 누군가가 애써 지켜낸 것이라 생각한다. 기도는 염원의 씨앗을 생활 속에 뿌리는 일이다. 그것은 욕망의 충족을 위해 단지 한없이 희구하는 일이 아니라 약속의 땅을 일구는 일이다. 기도는 내 것일 수만은 없는 염원과 희망을 지키고 돌보는 무상의 노동이기도 하다. 가난한 장소를 옮겨(찾아)다니며 촛불을 키는 약한 사람들. 작은 모임들을 옮겨다니며 때때로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약한 사람들은 밀사(密使)가 아닐까. 어디에서도 뚜렷한 이들은 엎드려 절하는 사제(司祭)가 아닐까. 이 작은 모임들은 매일 매일 촛불을 키는 일 같은 것이 아닐까. 간절한 기도가 아닐까.

 

 

2. 펼쳐지고 흘러가는 것들

 

“황사영의 마음속에, 들판과 산골의 구석구석이 펼쳐졌다. 땡볕 아래 먼지 나는 황톳길로 유리걸식하는 백성들과 허연 수염에 실눈을 뜨고 세상을 들여다보는 지방 수령들과 담장이 무너지고 기왓장이 떨어져 내린 관아들과 송덕비 늘어선 거리들이 흘러갔다.”

―김훈, 흑산, 학고재, 2011, 106쪽(강조-인용자).

 

‘펼쳐졌다’는 말과 ‘흘러갔다’는 말. 『흑산』을 주관하고 있는 두 개의 동사. 펼쳐졌다는 동사의 주체는 하나가 아니다. 펼쳐지고 있는 것은 사람을 거치되 사람에만 머물지 않고 사람을 타고 넘어가되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는다. 사람은 결국 사람에 붙들려 사람이라는 감옥에 갇혀 사는 미물이지만 기어이 사람이기 위해 사람을 넘어가려고 한다.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만나기 위해 숱한 곡절을 감수한다는 것은 결국 한갓 사람이라는 미물을 넘어가고자 하는 염원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말과 함께 먼 길을 오고 갔던 ‘마노리’는 “사람이 사람에게로 간다는 것이 사람살이의 근본이라는 것”(41쪽)을 길 위에서 알았다. 길 또한 사람의 걸음이 펼친 것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펼쳐진 것이다. ‘펼치다’라는 능동이 아니라 ‘펼쳐졌다’는 수동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저 스스로도 모르는 소리를 내는 메아리처럼, 제 힘인줄도 모르고 굽이치는 강물처럼 이 동사는 수락의 형태로 한없이 지속된다.

 

“노비들은 상전이 없는 밭이나 들에서 소리 죽여 노래했다.

주여, 주여 하고 부를 때 노비들은 부를 수 있는 제 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물겨웠다. 호격에는 신통력이 있어서 부르고 또 부르면 대상에게로 건너갈 수 있을 듯싶었다. 들판에 퍼지는 소울음소리도 호격으로 울고 호격으로 부르고 있었다. 주여, 주여 부를 때 주는 응답하지 않았지만 그 호격 안에는 부르는 자가 예비한 응답이 들어 있었다.”

―104쪽.

‘육손이’가 읊던 기도문은 달아난 노비 ‘오동희’가 언문으로 지은 것이다. 제 어미에게서 받은 기도문을 읊으며 육손이는 제 상전에게 고한다. “부르니까…… 좋았고, 부르니까 올 것 같았습니다.”(107쪽) 차마 외치지 못하고 나직하게, 마치 신음처럼 감출 수 없어 새어나오는 기도문은 무언가를 부르는 일이며 어떤 부름에 응답하는 일이다. 그렇게 낮은 자리에서 서로가 서로를 부르고 응답하는 힘으로 ‘펼쳐지는’ 시간과 장소가 있다. ‘흘러간다는 것’은 펼쳐진다는 것의 운명이거나 비극이며 때로는 그 비용이기도 하다. 손쓸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힘에 휩쓸리고 이내 바스라지고마는 무력한 존재들의 운명.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어리석음 때문이 아니다. 서로를 부르고 응답한 힘으로 ‘펼쳐진’ 길을 따라 ‘흘러가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흘러가는 염원의 물살은 재앙의 아가리이면서 동시에 구원의 좁은 문이다.  

 

“천주교는 흐르는 강물을 따라서 흘러내려 오고 또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마포나루 새우젓 가게에서는 강물에 실려서 오르내리는 그 단순하고 분명한 말과 뜻의 흐름이 들여다보였다. 남한강과 북한강 물길이 합쳐지는 먼 상류 쪽 두물머리 마을 정씨네 집안에 고여 있던 한 소식이 한강의 여러 나루들을 거쳐서 서해의 먼 섬에까지 닿고 또 시선 배편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 소식은 물길에 실려서 내려왔고 시선배 돛폭에 걸리는 바람에 밀려서 올라가고 있었다.”

―159쪽.

 

펼쳐져 있는 것, 흘러가고 있는 것들에 특별한 주체성을 부여할 필요는 없다. 산과 강, 그리고 사람의 마음은 누가 만든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저절로 생겨난 것도 아니다. 인간은 그저 산을 타고 넘고 강을 건널 뿐이다. 겨우 산을 붙들고 있는 것, 가라앉지 않고 가까스로 건너는 행위를 통해서 산과 강의 ‘있음’을 사람살이 속에 새길 뿐이다. 자연과 인간은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어울리며 닮아간다. 그것들은 약하지만 분명하다. 그러나 김훈의 세계 속에선 무력하게 죽는다. 자연사(自然死). 민초의 분명함을 이야기 하고 있음에도, 그들의 모습을 산과 강에 겹쳐 놓음에도 무(기)력하게 죽어간다. 김훈의 역사관은 인간을 무력하게 만든다. 그것은 그가 ‘계급’의 잠재성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생동하기 때문이며 그 생동의 힘이 인간의 세계를 바꾸어 왔다. 모든 인간은 죽지만 그 죽음이 동일한 자연사인 것은 아니다. 모두 다르게 죽는다는 것, 다르게 죽을 것이라는 것 또한 생동의 증거다.

 

 

3. 뜨거운 허무주의

 

김훈은 미약한 존재들이 보이지 않는 세계에 이끌려 넘을 수 없는 산과 강에 제 몸을 던지는 일을 ‘이끌리는 힘’이라 말하고 있다. 단순해서 단단한 것, 김훈식으로 바꿔 말하면 ‘매’와 ‘밥’의 세계. 매의 명징함이 무서움을 눈앞에 당도해 있는 실체로 구현한다면 밥의 명징함은 말(이론)로써 논증하지 않고 손으로 무심히 두드리기만 해도 끝없이 열리는 세상의 이치가 주는 경이로 구현하고 있다. 닿을 수 없는 것에 닿고자 하는 열망, 빠져죽을 것을 알지만 검은 바다로 이끌리는 힘(『공무도하, 문학동네, 2009)을 거부할 수 없는 상태를 김훈은 무력(無力)한 것이라 말하고 있다. 무력하다는 것은 ‘이끌리는 힘’이 그러한 것처럼 도리없는 것이며 속절없다. 풀어 말해 여리고 연약해서 쉽게 바스라지는 것이면서, 규정할 수 없고 닿을 수 없는(無) 힘이기도 하다. 김훈이 소설을 쓰는 이유 또한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얼기설기 엮인 욕망들이 쉼 없이 또 다른 뿌리에 젖줄을 대고 기를 쓰며 가지를 쳐 감히 헤아려보겠다는 다짐을 단박에 무력하게 만들어버리는 세속의 뒤엉킴을 그저 ‘던적스러운 것’이라 반복해서 말하는 것을 일러 ‘뜨거운 허무주의’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뜨거운 허무주의란 말하자면 ‘더운 물’ 같은 것이다. 펄펄 끓어 김이 올라오는 물을 끼얹는다고 해도 불씨는 옮겨 붙지 않는다. 더운 물은 세상의 촛불들이 그간 지켜온 길고 복잡한 이력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며 흔적도 없이 없애버리고 저 스스로 또한 금세 식어 더러운 고랑으로 흘러들어 처음부터 낮고 더러운 하천에서 나고 자란 것이라 위장하며 저의 태생을 잊는다. 이것이 김훈식의 허무주의다. 이것이 김훈식의 소설 쓰기다. 더운 김이 뿜어져나오는 짐승 내장의 참혹할정도로 명징한 생명력. 우리가 김훈식의 허무주의에, 그의 소설에 이끌리는 것은 인간이 짐승의 내장 앞에서 생경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짐승의 내장은 짐승 바깥에서 더욱 명징해지되 그 명징한 생명력을 지켜낼 수 없다. 더운 김을 내뿜으며 인간 앞에서 기이한 이끌림의 출처는 되겠지만 인간(세속)의 내장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짐승의 내장을 먹어치운 인간의 내장. 인간의 내장을 먹어치우는 세상의 내장. 그것이 김훈이 말하는 역사다. 그것이 김훈이 말하는 자연사 하는 계급이다.

 

 

4. 창호지에 언문으로 쓴 기도문

 

늙은 소작농의 아내가 동네 과부와 소박데기 몇 명을 모아놓고 천주교 경문을 외우고 십자가에 향을 피우다가 발각된다. 소작농의 아내 오동희는 달아났고 겨우 살았기에 기도문을 직접 지어 과부들에게 퍼뜨렸다. 오동희는 자신이 지은 기도문을 언문으로 종이에 적어서 나누어주었고 그 기도문은 금강을 건너서 충청, 경기까지 퍼져나갔다. 누군가가 끝없이 불렀을 것이다. 나직하고 조용하게, 쉼 없이 불렀기에 퍼져나갈 수 있었으며 마침내 펼쳐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의 가슴 속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그 가슴 속에서 흘러넘쳐 더 큰 물살을 만들었을 것이다.

 

“주여, 주여 하고 부를 때 노비들은 부를 수 있는 제 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물겨웠다. 호격에는 신통력이 있어서 부르고 또 부르면 대상에게로 건너갈 수 있을 듯 싶었다. 들판에 퍼지는 소울음소리도 호격으로 울고 호격으로 부르고 있었다. 주여, 주여 부를 때 주는 응답하지 않았지만 그 호격 안에는 부르는 자가 예비한 응답이 들어 있었다.

마재에 심부름을 다녀온 육손이가 조아나루 오가네 집 종으로 묶여 있는 제 어미한테서 오동희의 기도문을 얻어왔다. 창호지에 언문으로 쓴 기도문이었다.”

―159쪽.

 

창호지에 언문으로 쓴 기도문. “주여 우리를 매 맞아 죽지 않게 하소서”라는 저 높은 곳을 향한 염원을 담은 기도문보다 쉽게 구겨지고 찢어지며 쉬 번지는 그 흔한 종이 위에 낮고 하찮은 언문으로 무언가를 썼다는 것에 더 눈길이 간다. 창호지가 너덜해질 때까지 주고받은 이력. 쉽게 바스라지고 흩어지며 언제라도 불살라 없어져버릴 수 있음을 알기에 부르고 또 불렀을 것이다. 그렇게 건네고 건넸을 것이다. 어찌 기도문만 그러하겠는가. 이름 없는 수많은 이들이 바로 그 창호지에 언문으로 쓴 것들을 건네고 또 옮겨적으며 이곳의 염원을 지켜오지 않았겠는가. 끝없이 구겨지고 더럽혀지면서도 나직한 읊조림을 멈추지 않는 오늘의 기도가 틀림없이 이곳을 향해 오고 있는 중이지 않겠는가. 미약하고 작은 일들에 정성을 다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 오고 있음(再臨)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문학의 곳간> 23회_김훈, 『흑산』(학고재, 2011)_양산 김비&박조건형 주거 작업실_2015. 1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