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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곳간

안녕하세요―김연희, 『작은 시집』(꾸뽀몸모, 2015)

by 종업원 2015. 5. 15.

2015. 4. 25

 



 

안녕하세요.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우리는 이별을 예감'하지만 그럼에도 ‘안녕하세요’라는 말을 건넬 때 그것은 당신이 지금 내 앞에 ‘있음’을 알리는 말이 된다. 그 사실을 알리면서 당신의 ‘있음’을 내가 기꺼이 증명하겠다는 말이 된다. '당신이 여기에 있음을 내가 알아요, 그것을 알고 있는 나 또한 이곳에 함께 존재함을 당신께서 목격자가 되어 말해주시겠지요.' 상대에게 안부를 건네는 것만으로도 안심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안녕하세요’는 얼핏 그 무엇도 지시 하지 않는 텅 빈 말처럼 보이지만 서로의 존재를 증명하고 바로 그 존재의 있음에 대한 알림의 말이다. 공평하며 문턱이 없고, 맑다. 우리 삶 속에 이런 말이 있다는 것, 우리가 자주 이 말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삶 또한 공평하고 문턱이 없으며 맑을 수 있음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 이곳에 당신의 있음을 알아보고 그것에 예의를 표함으로써 나 또한 있음을 알리는 일. ‘안녕하세요’는 마주한 서로에게 ‘바로 이곳에 있음’이라는 존중의 씨를 뿌리는 일과 같다. 사귐이란 서로에게 뿌린 그 씨앗들을 잘 받아 안아 가꾸는 것이다.

 

‘안녕하세요’는 말의 씨앗이기도 하다. ‘안녕하세요’라는 말은 그 다음 말을 건넬 수 있는 말의 길을 연다. 이 말 속에 느낌표와 물음표, 마침표, 쉼표까지 포함되어 있음을 떠올려보자. 작지만 꽉 찬 말,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말. ‘안녕하세요’는 누구나 건넬 수 있는 말이지만 그 짧은 말 속에 마음을 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을 담되 마음을 담았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고 담아 건네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마음을 숨겨 담은 ‘안녕하세요’를 알아듣는 이가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마음을 담은 ‘안녕하세요’라는 씨앗을 자신의 텃밭에 심겠다고 잘 받아 안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인사는 기쁜 소식(복음福音)이 된다. 이 복음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도착한다. 우리 삶 속에 깃들어 있는 많은 ‘안녕하세요’가 있다는 것이다. 김연희의 시가 내게 ‘안녕하세요’라는 기쁜 소식으로 도착했다. 꾸밈없이 맑은 목소리로 내게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건넸다. 나도 전하고 싶다. ‘안녕하세요, 연희 씨.’

 

김연희의 시를 읽으며 시를 쓴다는 것이 씨앗을 뿌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를 읽는다는 것이 누군가(시인)가 건넨 씨앗을 받아 안아 내 삶 속에 심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씨앗에는 '발아의 힘'이 잠재되어 있다. 어떤 의욕의 발아를 서둘러 적어두고 싶다. '이 씨앗을 내 삶의 텃밭에서 잘 키워내고 싶다. 잘 보살피어 열매를 맺게 하고 싶다. 그 열매 속에 씨앗을 감추어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김연희의 시는 그것이 크고 어려운 일이 아니라 낮은 자리에서, 생활을 잘 돌보고 주변을 염려하며 손을 건네는 일이라 말하고 있다. 섬광처럼 도착하는 순간의 경험, 그것이 시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 앞에서, 그 주변에서 기다리고 서성이며 멀찍이 떨어져 감탄하기도 하며 섬광처럼 도착할 그 순간을 마냥 기다렸다. 김연희의 시를 읽으며 알게 되었다.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안녕하세요’야말로 섬광처럼 도착하는 말임을. 그러니 누구라도 그 마음을 받아 안을 수 있다는 것을. 시를 읽고 쓴다는 것이 감정의 섬세함과 언어의 유려함이라는 우열을 가리는 일이 아니라 ‘안녕하세요’라는 마음을 담은 맑은 말을 주고받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 ‘안녕하세요’와 같은 맑은 시가 있다. 섬광처럼 도착한 기쁜 소식을 알리고 있은 시가 있다. 무엇을 쥐고 무엇을 만들고 무엇을 매만지게 될지 알 수 없는 아기의 손을 노래하고 있는 시를 함께 읽어(받아 안아)보자.

 

 

포동포동한 손

 

보드랍고 흰 손

 

뜨거운 밥알에 데인 손

 

우리 아기 손

 

우리 아기들의 손

 

내가 만져본 아기들의 손

―김연희, 「손」 전문, 『엄마시집』, 꾸뽀몸모, 2013.

 

포동포동한 손은 아마도 하늘에서 내려왔을 것이다. 천천히 조용히 그러나 틀림없이 내리는 눈송이처럼 포동포동한 손은, 만져도 만져도 포동포동하다는 촉감이 사라지지 않고 포동포동함이 점점 더 커지기만 하는 그 손은 축복인 듯 슬픔인 듯 보드랍고 하아얀 것이어서 내내 잡고만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살아 있음(生)의 의지를 피력하는 손, 그러나 삶의 의지를 피력하는 순간 그 손은 세상의 혹독함과 마주해야 한다. 그리하여 포동포동한 손은, 보드랍고 흰 손은, 붉은 손이 된다. 뜨거운 손이 된다. 그 붉고 뜨거운 손이, 생의 의지로 충만하다는 것이 상처 받아야 하는 이유임을 알지 못한 채 그저 받아들여야만 하는 데인 손이 우리 아기 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아기 손을 잡는 순간 알게 된다. 이곳에 우리 아기들의 손이 우리와 함께 있다. 함께 있다는 것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세계의 막연한 촉감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 아기들의 손은 우리의 손과 함께, 생생한 감촉 안에서, 당장이라도 만져지는 구체적인 경험 속에서, 천천히 조용히, 그러나 틀림없이 쌔근거리는 얕은 숨으로 이 세상에 도착했다는 것을 이 시는 알리고 있다. 기쁜 소식처럼 도착한 아기의 손에 우리는 무엇을 건네주고 또 건네받아야 할까. ‘안녕하세요’라는 말의 씨앗, 마음의 씨앗.

 

 

넌 나를 닮았어

먼 거울을 보며 중얼거린다

아들의 얼굴이 나를 향한다

네 눈으로 무얼 보니

나는 너의 거울

너는 나의 거울

넌 나를 닮았구나

난 너를 닮았구나

이 넓은 지구

이 깊은 시간 속에서

너는 나를 닮고

나는 너를 닮다니

―김연희, 「그러나 먼 거울」 전문, 『작은 시집』, 꾸뽀몸모, 2015.

 

 

서로의 눈을 통해 마주하게 되는 ‘닮음’이란 무엇일까. ‘안녕하세요’를 건네면서 우리는 조금 닮는다. 마음을 담아 그 말을 건넬 때, 서로의 있음을 증명하는 기운을 주고받을 때 우리도 모르는 사이 닮아간다. 닮았다는 것은 같다는 말이 아니다. ‘닮음’은 닿고 싶다는 마음에 기대어 있다. 서로에게 가닿고자 하는 열망, 애씀, 의지 속에서 닮음이라는 사건(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네게 인사를 건네는 그 최초의 말이, 아직 아무 것도 아닌 그 작고 미약한 마음의 씨앗이, 너무 가벼워 날개 없이도 이곳 저곳을 훨훨 날아다니는 그 마음의 씨앗이 어딘가의 틈에 안착해 뿌리를 내려 싹을 틔운다는 것을 나는 알[믿]고 있다. 김연희가 매일매일 적어간 시들이 그녀에게 도착한 씨앗을 보살피고 키워낸 바로 그 싹들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머금고 도착한 씨앗을 소중히 여겨 매일매일 어루만지고 보살펴 보금자리로 만든 씨앗들의 집, 말(言)의 집(寺), 그것은 『작은 시집』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김연희는 『작은 시집』을 늘 하던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망설임 없이, 특별히 두드러질 것 없는 어휘들로 채웠다. 그래서 그녀의 시는 아직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아 말간 아이의 얼굴을 닮아 있고 평범하기 이를 때 없는 남편의 등을 닮아 있고, 네 식구가 곤히 잠든 방에 차오르는 높낮이가 그리 다르지 않은 곤한 숨소리를 닮아 있다. 이를 닦다 말고 쓴 시, “엄마 나는 보배이지요? / 이 세상에 선물로 왔지요?”(「이를 닦다가」)라는 물음에 응답하는 시, 남편에게 하지 못한 말들이 쌓여 고인 시, 가끔 화장실 거울로 자신의 어제와 오늘을 들여다보게 되는 시. 섬광과 구원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시가 아니라 매일매일 작지만 맑은 일상 속에서, 아이 얼굴 속에서, 남편 얼굴 속에서, 화장실 거울 속에 담긴 내 얼굴 속에서 보이는 것들을 한 자 한 자 옮겨 적은 시. 일상을 꾸린다는 것이, 아이를 키우며 생활을 지키고 가꾼다는 것이 시를 쓰는 일이 될 수도 있음을 김연희의 『작은 시집』을 읽으면서 알게 된다. 잠들어 있는 가족들의 숨소리가 작은 방에 가득 할 때 잠깐 맺히는 것이 있다. 겨울 나무 가지에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열매가 바로 그 나무 가지에 주렁주렁 열리는 것처럼, 작고 포동포동한 손이 매만지고 가꾸어서 변하게 될 세상의 어떤 자리처럼.

 

오래된 영화를 보다 희미하게 들리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황급히 건너가 아이를 안고 “멀리 가지 않았다고 / 내가 널 두고 어디를 가겠냐고 / 다만 옆방에 잠시 갔었노라고”(「옆방」) 달래던 목소리를 떠올려본다. 늘 어딘가로 떠나고 싶지만 금세 돌아와야 한다. 옆방에 아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간절하다. 더 빨리 가야하고 더 빨리 돌아와야 한다. 이 시들도 그렇게 빨리 갔다가 빨리 돌아오는 호흡으로, 간절하고 소중하게 쓴 것일 테다. 김연희 시에서 ‘아이’의 소중함은 사람의 소중함으로, 그 아이가 자라는 세상에 대한 염려로 이끄는 마음의 길이 된다. 아이를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과 닿[닮]아 있다. 『작은 시집』에 근심과 염려의 정서가 흐르고 있는 것은 아이를 통해 보는 세상과 아이를 통해 봐야만 하는 세상과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연희의 시를 읽으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 우리 옆방에 아이가 있다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 수 있을까. 그런 염려를 머금고 간절해질 수 있을까. 그 마음이 이 세상을 바꿀 순 없겠지만 잠깐 데울 수는 있으리라. 오늘도 어딘가에서 간절하게 안부를 묻는 마음으로 서로를 따뜻하게 덮어 주고 있음을 예감하게 된다.

 

그러니 오늘 밤, 나는 조금 안심이 된다. 종일 상처 받고 비통함에 눈물짓던 나는, 그럼에도 잠들 수 있다. 오늘도 한편의 시가 쓰여지고 있고, 한 장의 그림이 그려지고 있으며, 한 곡의 노래가 울려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라는 마음의 씨앗이 이곳에 거듭 도착하고 있는 중이니 오늘 밤 나는 안심하고 잠들 수 있겠다. 닿[닮]으려는 애씀이 이 밤을 호위하고 있으니 바닥없는 잠 속에 머물렀다 다시 잠깰 수 있겠다. 눈을 뜨면 어느새 도착한 무게 없는 말간 씨앗 하나가 나를 향해 말을 할 것이다. 안녕하세요

  

 

  

 

 

 <문학의 곳간> 17회 별강문 / 2015. 4. 25 / 대신동 <산복도로 프로잭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