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의 곳간

백년을 걷는 걸음

by 종업원 2015. 3. 17.

 2015. 3. 16







 

1.

 제발트의 문장이 빽빽한 숲에 들어선 것처럼 걸음을 옮기는 게 쉽지 않다면 그것은 그 숲이 누구가의 기억 속에 들어서는 입구이기 때문이다. 제발트의 『현기증. 감정들』(배수아 옮김, 문학동네, 2014)을 읽는다는 것은 더 이상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는 시간 속에 들어가 시간의 더께로 뒤덮여 있는 기억의 숲을 천천히 걷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 걸음은 잠들어 있는 기억을 깨우는 발자국 소리며, 닫힌 동굴의 문을 여는 주문이다.

 


 

2.

"우리가 아는 것은 단지 K 박사가 베네치아에서 나흘을 머물렀다는 것, 그런 다음 산타루치아 역에서 기차를 타고 베로나를 향해 떠났다는 사실뿐이다."

―142쪽.

 

<K 박사의 리바 온천 여행>은 1913년의 카프카 행적을 뒤쫓고 있는 글이다. 제발트는 카프카가 남긴 기록들을 징검돌 삼아 당시 카프카가 걸었던 걸음 위에 자신의 발자국을 포개어 놓는다. 기억(록)의 단면을 이정표 삼아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다른 세계에, 다른 삶에 진입하려는 제발트의 문장에 의해 오랜 시간 계류되어 있던 기억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불안에 휩싸인 채 겨우 썼던 기록이, 병석에 누워 보냈던 편지의 구절이, 무기력에 허덕이며 흘기듯 남긴 노트가, 갈 곳 없었던 아픔의 시간이 지금의 시간과 연결되어 천천히 흐르게 된다.

 


 

3.

"나는 내가 아는 누군가가 방금 곁을 스쳐지나간다는 느낌에 수시로 빠져들었다. 그런데 이런-다른 명칭을 붙일 수 없는-환각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예외 없이 내가 수년 동안 한 번도 떠올린 적이 없는 사람들, 말하자면 이미 죽은 사람들뿐이었다. 또는 죽었을 것이 확실한 사람들, 이를테면 마틸트 젤로스와 외팔이 마을 서기 퓌르구트를 나는 보았다. 한번은 곤자가가세 골목에서, 다시 귀향할 경우 화형에 처한다는 선고를 받고 고양 도시에서 추방된 시인 단테를 보았다고 믿어버리기도 했다. 그는 한없이 걷고 있었다. (중략) 그런 돌연한 환각을 몇 번 겪고 나자 내 마음속에는 울렁거림과 현기증으로 묘사할 수 있는 희미한 우려가 싹트기 시작했다. 확실하게 붙잡고자 하는 장면들의 테두리는 점점 희미해졌고, 머릿속에 피어나는 모종의 생각들은 내가 채 인식하기도 전에 와해되었다. (중략) 밤늦게까지 걷고 또 걸음으로써 몸을 혹사하는 것 말고 그런 질병에 대항할 다른 방도는 떠오르지 않았다." 

37~38쪽.

 

 

오스트리가 빈의 골목을 끝없이 걸으며, 이탈리아의 오래된 길을 걸으며 '나'는 이미 사라지고 없어진 사람들이 옆을 스치고지나가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그저 환각일 뿐인 것일까? 울렁거림과 현기증이란 수백년도 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 거리 위에서 백년 전 누군가의 걸음과 지금의 걸음이 겹칠 때 발생하는 일과 같은 것이 아닐까. 오래된 도시의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그곳을 걸었던 무수히 많은 걸음과 겹쳐지는 일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백년을 걷는 일. 한쪽 발엔 기억을, 다른쪽 발엔 이야기를. 제발트는 누군가의 기억을 딛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만들며 수백년의 걸음을 걷는다. 오래 전 멈춰졌던 걸음을 잇고자 하는 이 시도는 오랜 시간 홀로 걸었을 그들의 걸음 곁에 다가서려는 애씀이며 홀로 걸어야만 하는 오늘의 우리 곁에 우정의 걸음이 있음을 알리는 일이기도 하다.

 

 


4.

제발트의 소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여행자들을 위한 것이며, 집이 없는 세상의 모든 이방인을 위한 것이자, 무엇보다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아픈 이들을 위한 것이다. 길 없음, 집 없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걷는다. '아픔'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걷는다. 그 걸음을 통해 길을 헤매었던 여행자들과 집을 빼앗기고 방랑해야만 했던 이방인들의 발자국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오늘’부터 아프기 시작한 이들의 유일한 친구는 ‘어제’부터 아파왔던 이들일 테니. '기억'은 길 없음과 집 없음, 회복불가능한 아픔의 거의 유일한 이정표다. 그 이정표를 따라 걷는 일은 그들이, 그리고 우리가 계속 걸을 수 있도록, 다시 만날 수 있도록 바스라져가는 이 길 위에 또 다른 이정표를 세우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