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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곳간

보이지 않는 환대 : 백년의 걸음, 백년의 기억, 백년의 이야기―W. G. 제발트 『현기증. 감정들』(배수아 옮김, 문학동네, 2014)

by 종업원 2015. 4. 2.

2015. 3. 21

 

 

     

 

 

1

 

별강문을 쓸 때 작가나 작품 분석에 집중하는 것보다 내가 알고 있는 친구들을 떠올릴 때가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작가가 써둔 문장을 읽고, 밑줄을 치면서 나는 동시에 그 누군가를 필연적으로 떠올리게 된다. 문장을 읽고 밑줄을 친다는 것이 어쩌면 그 누군가를 떠올리기 위한 예비 행동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기도 한다. 구체적인 이름을 거론하는 경우는 없었지만 그간 썼던 별강문의 어떤 구절과 어떤 문장은 곁에 있는 그 친구가 없었다면 쓸 수 없는 것들이 적지 않다. 익명의 그 친구에게 선물하는 마음으로 별강문 한 귀퉁이를 채워가게 되는 것이다. 그 문장이 당사자에게 정확하게 전달되었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없었으면 쓰지 못했을 문장은 별강문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음과 동시에 <문학의 곳간>에 참여하는 다른 친구들에게 건네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 좁고 가난한 별강문이라는 지면(地/紙面)에서 서로 알지 못하는 이들이 서로에게 문장을 주고받는다. 그러니 별강문을 채우고 있는 이 검은 활자들을 ‘익명의 선물’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제발트의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누워 있는 친구들을 떠올렸다. 오랫동안 누워있어야만 했던 친구들, 차라리 누워버리고 싶은 친구들, 지금도 누워 있는 친구들, 곧 눕게 될 친구들 말이다. 이 별강문이 누워 있는 친구 곁으로 다가가는 (발)걸음을 닮은 문장이 되었으면 한다. 누워 있는 당신 곁으로 내가 지금 가고 있음을 알리는 발자국 소리, 노트에 문장을 급히 흘겨 적을 때 나는 서걱이는 소리가 가쁜 발걸음 소리로 전해졌으면 한다.

 

 

“스스로 삶을 떠나갈 능력이 가장 부족한 인간이, 침대에 누워서만 치유가 가능한 병에 걸렸고, 그에게 궁극의 구원을 베풀어줄 시장을 마주하게 된다면, 사냥꾼 그라쿠스가 그랬던 것처럼, 황홀한 무아지경 속에서 미소를 지으며 시장의 무릎에 손을 올리는 행위를 어떻게 피할 수가 있겠는가.”

W. G. 제발트, 「K 박사의 리바 온천 여행」, 159쪽.

 

 

 

 

 

2

 

나는 당신의 침대 가까이 다가가 누워 있는 당신을 일으켜 세울 마음이 없다. 그대로 누워 있어도 좋다. 일어나 앉아도 좋다. 나는 다만 그 곁으로 가 나지막이 이야기를 시작하거나 내게 전하는 나지막한 당신의 목소리를 경청할 것이다. 우리는 이전에도 달랐고 지금도 다르며 앞으로도 다르겠지만 당신이 누워 있는 침대를 붙잡고 있는 오른팔의 검은 그림자에 내 오른손을 겹쳐두고 싶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지만 그렇게 뒤늦게라도 그 손길과 발길의 흔적 위에 내 몸을 포개어 두고 싶다.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말하자면 서로를 포개어 둔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자아라는 세계의 문을 열고 누군가를 기꺼이 초대한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바꿔 말해 서로를 포개어 두면서 우리는 상처 받은 자아와 쓰러진 인격과 짓밟힌 존엄을 일으켜 세운다. 당신에 관해, 또 나에 관해, 우리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몸져누웠던 몸을 서로 일으킨다는 것이다. 당장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한다 할지라도 몸을 일으켜본다는 것은 잠들어 있는 의욕을 깨우는 일과 다르지 않은 것이지 않을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우리는 언제나 함께 서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끝나버릴 때 어쩌면 우리는 다시 몸져누울지도 모른다. 다시 무너진다 해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해도 지금 서로를 일으켜 세우는 일을 멈출 수는 없다. 기억과 이야기가 곁에 있으니 말이다.

 

 

 

 

“기억(Gedächtnis)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서사적 능력이다. 오로지 방대한 기억 덕택에 서사 문학은 한편으로 사물들의 흐름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그 사물들의 사라짐이나 죽음의 폭력과 화해할 수 있다.”

―발터 벤야민, 「이야기꾼 :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작품에 대한 고찰」, 『서사·서사·비평의 자리』 발터 벤야민 선집 9권, 최성만 옮김, 길, 2012, 439쪽.

 

 

“기억은 모든 이야기들이 서로 모여 마지막에 가서 이루는 그물망을 만들어낸다. 위대한 이야기꾼들이 늘 보여주었고, 특히 동양의 이야기꾼들이 즐겨 보여준 것처럼 한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에 연결된다. 그러한 이야기꾼들 속에는 자기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어느 구절에서도 새로운 이야기가 머리에 떠오르는 세헤라자데가 살고 있다.”

―440∼441쪽.

 

 

 

기억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인류의 능력임을 말했던 이는 벤야민이었다. 그는 기억-이야기를 특정한 개인의 위대함이 아니라 ‘사물들 사라짐이나 죽음의 폭력과 화해’할 수 있는 집단적 행위로 이해했다. 그것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야기를 이어가는 능력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며 그렇게 한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에 연결되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는 기억-이야기 공정술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했다. 기억-이야기는 초과하고 범람한다. 방랑하고 유랑한다. 잡을 수 없고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진다. 1980년 10월의 마지막 날 베네치아행 야간열차에서 ‘나’가 회상에 잠기는 대목을 제발트는 다음과 같이 썼다. “회상 스스로가―적어도 내 느낌으로는―내 정신 영역의 외부 어디에선가 점점 팽창하면서 한껏 솟아올라 그동안 머물러 있던 공간의 경계를 초과해버리더니 마침내 범람하는 강물처럼 나의 내부를 향해 마구 밀려들어왔다고 해야 하리라.”(「외국에서」, 82쪽) 여기서 말하는 회상이란 한 개인의 경험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기억을 포함하고 있는 것일 테다. 말하자면 Gedächtnis(기억)가 집합을 뜻하는 Ge-라는 접두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미 여러 기억의 저장고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처럼 개별자들의 회상 또한 집합 기억의 속성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낯선 이국의 거리에서 스쳐지나간 이들은 허상이 아니다. 현기증이 ‘나’가 흔들리고 있음을 알리는 표지라면 그것은 무언가가 내게 범람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내 안에 쌓여 있던 (집단) 기억이 나를 범람해 흘러넘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아는 누군가가 방금 곁을 스쳐지나간다는 느낌에 수시로 빠져들었다. 그런데 이런-다른 명칭을 붙일 수 없는-환각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예외 없이 내가 수년 동안 한 번도 떠올린 적이 없는 사람들, 말하자면 이미 죽은 사람들뿐이었다. 또는 죽었을 것이 확실한 사람들, 이를테면 마틸트 젤로스와 외팔이 마을 서기 퓌르구트를 나는 보았다. 한번은 곤자가가세 골목에서, 다시 귀향할 경우 화형에 처한다는 선고를 받고 고양 도시에서 추방된 시인 단테를 보았다고 믿어버리기도 했다. 그는 한없이 걷고 있었다. (중략) 그런 돌연한 환각을 몇 번 겪고 나자 내 마음속에는 울렁거림과 현기증으로 묘사할 수 있는 희미한 우려가 싹트기 시작했다. 확실하게 붙잡고자 하는 장면들의 테두리는 점점 희미해졌고, 머릿속에 피어나는 모종의 생각들은 내가 채 인식하기도 전에 와해되었다. (중략) 밤늦게까지 걷고 또 걸음으로써 몸을 혹사하는 것 말고 그런 질병에 대항할 다른 방도는 떠오르지 않았다.”

―「외국에서」, 37∼38쪽.

 

 

 

오스트리아 빈의 골목을 끝없이 걸으며, 이탈리아의 오래된 길을 걸으며 ‘나’는 이미 사라지고 없어진 사람들이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그저 환각일 뿐인 것일까? 울렁거림과 현기증이란 수백 년도 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 거리 위에서 백년 전 누군가의 발자국(걸음의 기억)과 지금의 발자국이 겹칠 때 발생하는 일과 같은 것이다. 지금의 발자국이 오래된 걸음의 기억을 깨운다. 아니 오랜 걸음이 지금의 걸음을 버텨내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상처 받은 이가 걷는다’는 말에 기대어 본다면 오래된 도시의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그곳을 걸었던 무수히 많은 걸음의 기억을 깨운다는 것이다. 상처 받은 이와 상처 받았던 이가 걸음으로 서로를 일으켜 세운다는 것이다. 물들이는 걸음과 물올리는 걸음. 걸음의 겹침, 걸음을 포갠다는 것은 누군가가 남겨둔 오랜 걸음의 기억을 깨우는 일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백년을 걷는 일, 백년을 깨우는 일, 백년을 일으켜 세우는 일. 제발트는 누군가의 기억을 딛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만들며 수백 년의 걸음을 걷는다. 그것은 오랜 아픔과 상처의 기억을 일으켜 세우려는 노력과 다르지 않다. 오래 전 멈춰졌던 걸음을 잇고자 하는 이 시도는 오랜 시간 홀로 걸었을 그들의 걸음 곁에 다가서려는 애씀이며 홀로 걸어야만 하는 오늘의 우리 곁에 ‘익명의 걸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일이기도 하다.

 

 

 

 

 

3

 

춥고 깊은 산속을 홀로 헤매었을 그 외로운 걸음을 뒤늦게 생각하게 된다. 사냥꾼 그라쿠스. 그 깊은 숲에서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그의 얼굴에 굵은 주름으로, 영영 열리지 않을 것만 같은 다문 그 침묵의 표정을 만들었으리라. 산과 숲을, 이곳과 저곳을, 동물과 사람을, 세상의 거의 모든 경계를 고독하게 넘나다녔던 이, 사냥꾼 그라쿠스, 세상의 모든 환우(患友)들[아픈 이들의 걸음은 닮아 있다.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가 나를 알아본 것은 어린 시절의 얼굴 덕분이 아니라 내 할아버지의 걸음걸이가 지금의 내 걸음걸이와 놀랍도록 똑같았기 때문이라고, 엥겔비르트의 문을 나서면서 할아버지도 나처럼 일단 멈추어서서 날씨는 살피는 버릇이 있었다고 했다.”, 「귀향」, 197쪽]. 제발트가 사냥꾼 그라쿠스를 1813년에도, 1913년에도, 1980년에도, 1987년에도, 심지어 2013년에도 떠올렸던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계속 걸어야 했던 사람, “밤늦게까지 걷고 도 걸음으로써 몸을 혹사하는 것 말고, [그런] 질병에 대항할 다른 방도는 떠오르지 않았”(38쪽)음을 곱씹으며 항해를 끝낼 수 없는 영원한 방랑자. 제발트의 기억-이야기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여행자들을 위한 것이며, 집이 없는 세상의 모든 이방인을 위한 것이자, 무엇보다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아픈 이들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된다. 길 없음, 집 없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걸었던 이들. 아픔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걸었던 이들. 지금도 걷고 있는 우리. 오직 상처 받은 이들의 걸음을 통해 길을 헤매었던 방랑자들과 먼 이국으로 유랑해야만 했던 이방인들의 걸음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오늘’부터 아프기 시작한 이들의 유일한 친구는 ‘어제’부터 아파왔던 이들일 테니. ‘기억’은 길 없음과 집 없음, 회복불가능한 아픔의 거의 유일한 이정표다. 그 이정표를 따라 걷는 일은 그들이, 그리고 우리가 계속 걸을 수 있도록, 다시 만날 수 있도록 바스라져가는 이 길 위에 또 다른 이정표를 세우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지금 누워 있는 아픈 친구들이여. 당장 몸을 일으켜 세우지 못한다 할지라도 귀를 기울여주기 바란다. 누워 있는 그 자리로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해주기 바란다. 누워서라도 그 소리에 귀 기울이는 보이지 않는 환대를 나는 회복이라고 부르고 싶다. 아직 누워 있는 그 말을 당신이 누워 있는 침대 곁에 선물로 놓아두고 오고 싶다.

 

 

 

    <문학의 곳간> 16회 별강문 / 2015. 3. 21 / 공간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