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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시장에서의 배움

by 종업원 2016. 3. 14.

2016. 3. 8

 

 

도시에 사는 독신들이 그러하듯 나 또한 어리석게 ‘마트’에 발을 들여놓았고 때때로 그곳에 들러 할인된 상품들과 사지도 않을 물건들의 가격표를 쥐새끼마냥 몰래 염탐하며 아무도 탐내지 않을 기쁨을 맛보며 홀로 즐거워하곤 했다. 거대한 마트를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좁은 골목에서야 한줌의 호기심과 실체 없는 기쁨에 탐닉했던 그 어리석음을 마치 증상처럼 돌이켜보곤 했다. 오늘도 내가 한심한 인간이었음을 차마 뼈아프게 자각하지 못한 것은 실로 한심해서겠지만 어느새 습벽처럼 내려앉아 있는 자기 연민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가 몰아붙이지 않는다 해도 ‘독신’ (해야) 한다는 것은 세계가 갑자기 좁아져버렸음을 도리없이 수락해야 하는 일이다. 고적하고 적빈한 생활 속에서 스스로를 유기하고 또 유기했던 시간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마트에서 내가 하는 일이란 필사적으로 ‘사지 않으려는 일’이다. 당대의 ‘단가’를 눈으로 훑으며 화폐의 가치와 상품의 가치로 팽팽하게 당겨진 줄 위에 올라가 지갑의 형편(감각)을 예민하게 일깨우면서 한사코 물품들을 사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그렇게 애써봐야 터무니없는 (할인) 상품 앞에서 너무나도 허무하게 무너진다는 것도 환하게 알고 있지만 훨씬 체급이 큰 선수와 싸우는 일처럼 ‘한방 맞기 전까지는’ 어쩌면 오늘만큼은 이길 수도 있겠다는 한줌의 바람을 품고 대형 마트 곳곳을 날쌘 걸음으로 배회한다. 대형 마트는 옥타곤 같은 곳이라 만만한 상대가 드물다. 그런데 이 기이하고 무용한 싸움을 몇달 간 간헐적으로나마 하다보니 어느새 이곳이 시시하고 만만하게 보인다. 아무 것도 사지 않고 홀연히 마트를 빠져나오기를 몇 차례, 어느새 내 스텝은 나비처럼 날아 마트가 아닌 시장으로 향하게 되었다.

 

어제는 부평 (깡통) 시장에 들러보았다. 시장 특유의 활기에 취하기도 했지만 <국제시장> 여파 때문인지 관광객들로 점령당한 처지라 졸지에 나까지 관광객으로 오인 받아 공격적인 강매에 떠밀려 (비싼!) 어묵 세트를 사고 말았다. 마늘도 한 봉지 샀는데, 인근 충무 (새벽) 시장에 들러 둘러보니 마늘 또한 어중이떠중이 취급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자갈치 시장에서 사지도 못할 생선을 실컷 구경하고 돌아가는 길에 작은 생각 하나를 쥐게 되었다. 시장에선 마트에서처럼 고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 조금 속고, 또 조금 손해보면서 천천히 알게 된다는 것. 세상이 워낙 속악하다보니 ‘속는다’는 것이 준범죄행위에 노출된 것처럼 여겨지는 듯하다. 조금이라도 손해보는 것을 참지 못하고 곧장 사기라고 몰아세우거나, 손해 보는 이를 서둘러 ‘호구’라며 비아냥 거린다. 충무 시장에 이르러서야 조금 알게 된다. 조금씩 속으면서 겨우 배울 수 있다는 것을.

 

배움이란 축적하는 일이 아니다. 자신의 꼴을 담금질 하는 것은 팽창하고 확장하는 것(bulk up)이 아니다. 외국어를 배우는 것처럼 무작정 반복해 해보는 것은 자국어의 사고를 멈춰세워보는 일이며 뒷걸음질 쳐보는 것이기도 하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춤거리거나 뒷걸음질 칠 때만 배울 수 있다. 말하자면 손해볼 수 있을 때만 배울 수 있다. 오늘날 배움이 없다는 것은 그 누구도 손해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손해를 곧장 사기라 매도하고 혹여라도 남들에게 호구처럼 보이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그 불안정한 심리를 감추려 과잉된 자기방어로 누군가를 공격한다. 그런데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고 어울리는 것은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기 위해서이지 않은가. 관계 속에서 배울 수 있었던 것은 그 사이에 손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호구가 되지 않기 위해 사고 하는 게 아니며 손해보지 않기 위해 누군가를 애써 만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작은 손해와 속임에 나는 얼마나 분개하고 속앓이를 해왔던가. 엉킨 스텝으로 어리벙벙하게 시장을 헤매고 다니며 그간의 대인대물 관계 속에서 내가 행하고도 알지 못했던 어리석음의 이력이 환하게 다가오는 듯하다. 어마어마한 고수들이 평범한 모습으로 어울리는 시장에서 나는 조금 속았고 욕심 없이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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