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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절망을 익히는 장소

by '작은숲' 2016. 3. 7.

2016. 3. 6

 

 

소박한 식단을 꾸리고 그것을 생활에 내려앉히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오랫동안 애를 써 조형한다해도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것이 생활이다. 생활을 나름의 의지로 꾸려갈 때 생각지 못했던 기쁨을 누린다면 그건 당장은 인지하고 있지 못하지만 늘 감수하고 있는 위태로움이라는 비용에 대한 선물일 것이다. 한끼의 밥상을 차리는 일이 마냥 즐거울 때가 있는 이는 언제라도 한끼의 밥상을 차리는 일이 지옥에서의 시간만큼이나 힘겹게 느껴지기도 한다는 것을 안다. 몸의 변화가 내 힘으로 조율될 수 있는 게 아닌 것처럼 생활의 물매 또한 애쓴다고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금씩 오르락 내리락 하는 몸을 잘 살피지 않을 때 그 작은 물결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파도로 변해 몸을 덮쳐 쉴새 없이 휘몰아친다. 몸에 없던 변화가 감지될 땐 납작 엎드려 숨죽이고 있는 게 가장 좋다. 그건 거대한 군단을 피해 몸을 숨기는 것이기도 하고, ...몸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자아’의 뒤늦은 반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생활이 삐걱거릴 땐 특별한 방법이 없다. 안간힘을 쓴다고 해도 울기고 있는 생활을 당장 바로 잡기란 어렵다. 그렇다고 한동안 숨죽이고 숨어 있을 수도 없다. 생활엔 숨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기울어가는 생활을 가만히 대면하는 것 외엔 다른 방도가 없다. 무기력해보이는 대면만이 기울어진 생활을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무너지고 있는 생활의 면면을 하나하나 다 지켜보는 일. 생활이 무너지는 원인은 하나가 아니다. 천천히 드러나는 생활의 틈과 누수의 자리. 안다고 메울 수 없는 그 결락의 자리를 살피며 다시 매일매일을 다지고 쌓아올리는 수밖에 없다. 크게 절망하지 않고, 낮고 경미하게 절망하는 일. 절망하되 절망을 두려워 하지 않는 일. 생활이 일상적인 절망을 배우고 연마하는 장소임을 조용히 알게 된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골목과 골목 사이를 바삐 옮겨다니며 발걸음을 재촉해도 도리없이 붙들리게 되는 냄새가 있다. 낡고 가난한 다세대 주택 어느 한칸에서 스며나오는 생선 굽는 냄새. 생선 냄새만도 아니고, 기름 냄새만도 아닌 무언가가 천천히 노릇하게 익어가는 냄새가 좁고 낡은 집을 넘어 온 동네로 퍼져 곳곳에 스미는 냄새. 혼자 먹는 밥일지라도 막 익은 밥을 주걱으로 헤집으며 밥그릇에 퍼 담을 때 설명하기 힘든 달콤함과 노곤함에 흠뻑 취하곤 하지만 생선 굽는 냄새에서 내가 느끼는 것은 허기도 아니고 ‘집밥'에 대한 향수도 아니다. 골목에 퍼지는 생선 굽는 냄새는 내가 영영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주술처럼 나를 옭아맨다. 이 가난한 세상을 외면할 수 없다는 주문이자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절망의 방향임을 알면서도 가야 한다는 세속의 채찍질. 좁고 복잡한 골목을 피해 달아나도 다시 골목이다. '이 세상이라는 질병'의 보균자처럼 이곳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 약한 불에 생선을 올려놓고 구석구석 잘 익어가는지 살피며 오랫동안 그 앞을 지키는 사람이 있어야만 생선 구이가 상에 오를 수 있다. 오늘의 밥상에 겨우, 생선구이가 올라와 있다는 건 절망이다. 절망이되 희미한 구원의 흔적이기도 하다. 골목 너머에 골목 밖에 없다는 것이 절망이되 구원으로 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