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2. 29
오늘처럼 바람이 많이 불던 날, 한 친구와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두 시간을 넘게 걸었던 어느 때를 기억한다. 채식(vegan)을 하는 친구임을 알고 있던 터라 멸치 육수를 내지 않은 된장찌게나 먹을 만한 비빔밥 집을 찾기 위해 경성대에서 대연동까지, 대연동에서 다시 문화회관까지 매섭게 불던 바람을 견디며 오래도록 걸었다. 그때 농부가 씨를 뿌려 벼를 수확하는 지난한 과정과 긴 시간에 비한다면 한끼의 식사를 위해 이 정도 걷는 것쯤은 별 거 아니라며 유쾌하게 웃기도 했다. 세상엔 많은 쾌락이 있지만 ‘걸으며 대화하는 것’이 그 어떤 쾌락에도 비할바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 또한 일찍이 알게 되어버린 터라 한끼의 식사를 하기 위해 대화하며 걸었던 그 먼 길을 ‘고달픈 것’이라기보단 차라리 ‘애달픈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오늘도 채식으로 밥을 지어먹고 나와 초봄의 매서운 바람을 뚫고 한참을 걸으며 그날 그 친구와의 걸음이 상대에 대한 배려의 걸음이었을 뿐 ‘채식’이라는 힘든 싸움과 결기어린 삶의 태도엔 ‘입회’하지 못한 것이었음을 늦게서야 알게 된다. ‘비건’을 가까이서 만난 건 처음이었던 터라 조심하고 배려하고 싶은 마음이 우선 컸고 묻고 싶고 알고 싶은 것들도 많았지만 충분한 대화를 나누지 못했던 것은 아마도 그때엔 나 또한 채식에 대한 이해가 태부족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머릿속으론 이해하려고도 했고 이해한 부분도 적지 않았겠지만 한국 사회에서, 더군다나 부산이라는 완고한 일방향의 도시에서 채식주의자의 태도로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 더 알려고 하지 못했던 거 같다. 관계의 이력이 어느 정도 쌓였음에도 여전했던 과민함과 예민함이 못내 섭섭했고 또 얼마간은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도 없지 않았다. 어쩌면 서로가 간절했기에 절실하게 요구하거나 기대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간절함과 절실함을 밑절미로 하고 있는 어울림이 그러하듯 애써 쌓은 관계의 시간을 끝내 지켜내지 못하고 그 친구와 결별 아닌 결별을 하고 말았는데, 근황을 알지 못한다고 해도 오늘도 ‘채식’하고 있으리란 것만큼은 환하게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손수 밥을 지어먹는 데 열심을 부리다보니 전에 없던 재미가 샘솟고 뜻하지 않는 공부의 순간도 적지 않아 식습관의 조형을 생활의 중심으로 삼은지 1년정도 지나고 있다. 몇년전엔 6개월정도 ‘게으른 일식’을 하며 음식과 몸이 만나는 일이 여러모로 중요하다는 것을 희미하게 깨친 바가 있어 손수 밥을 지어먹는 일을 작은 공부 줄기로 삼아 꾸준히 전력해봐야겠다는 의욕을 지켜가다보니 자연스레 ‘채식’이라는 길목에 이르게 되었다. 나처럼 심심하고 재미 없는 사람이 집중하게 되는 건 당연하게도 ‘더 맛있는 걸 먹는 것’보다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에 집중하며 식습관을 메타화해 생활을 비평할 수 있는 계기로 삼는 데 골몰하는 편이니 ‘더 먹고, 잘 먹기’가 아닌 ‘덜 먹고, 안 먹기’에 집중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식재료를 알게 되는 기쁨보다 익숙했던 식재료를 중단하는 데서 오는 기쁨과 깨침이 갑절로 컸으니 식단은 점점 검소해지고 단촐해져갔다. ‘채식’은 그런 생활 태도가 이르게 되는 중앙역 같은 것이었다.
‘주중채식’으로부터 시작해 ‘비건 식단’도 꾸려보고, 밥상에 펼쳐진 ‘식물원’이 지겹게 여겨질 땐 ‘생선 주간’이나 ‘계란 주간’ 등의 원칙을 도입해 덜어내고 중단하는 일에 작은 동력을 마련해보기도 했다. 그 과정 속에서 의지 없이도 자연스레 알게 되었던 것이 있는데, 채식이라는 게 ‘결별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채식은 단순히 육류나 어패류 따위의 식재료로부터 멀어지는 것만이 아닌 고기를 먹는 자리, 고기를 구워 먹어야 하는 관계, 치킨이 필요한 습관, 고기를 원하는 몸의 상태 등과 헤어지기 위한 지난한 애씀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 자발적인 결별을 서둘러 못마땅해 하고, 무례하게 굴며, 해명을 요구하는 세속의 관계 속에서 ‘채식주의자’로 살아가는 일에 얼마나 많은 문턱이 있을지 더듬어 보게 된다. 어떤 채식은 취향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사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다. 필사의 애씀은 채식이라는 정체성을 고집하고 유지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채식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이 사회의 강압적인 구조 폭력에 대한 거부이자 저항이기도 하다. 떠났던 자리로 돌아가지 않기 위한 애씀이 어디 채식주의자들만이 겪는 부침이겠는가. 필사적이지 않으면 도리없이 힘겹게 떠나왔던 ‘그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퇴행의 자발적 수락) 폭압적인 구조 속에서 부대끼며 살고 있는 구성원이라면 모짝 그런 세계로부터 떠나오기 위해 오늘도 애쓰고 있지 않겠는가.
채식이 도리없이 퇴행할 수밖에 없는 세속의 비극을 예비하고 있는 위태로운 자리가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떠나왔던 그곳을 영영 잊어버리는 비움의 자리를 일구는 조용한 운동이었으면 한다. 노력한만큼 거두는 합리적인 결과가 아니라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를 부끄러움 없이, 욕심 없이 주울 수 있는’(空慧) 일상의 은총이 허락되는 삶터로 넓혀지기를 홀로 조용히 바라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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