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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하루의 절망

by '작은숲' 2016. 4. 30.

2016. 4. 30

 

 

임금노동을 하는 시간은 일주일 중 하루에 불과하다. 물론 매일 읽고 쓰며, 누군가를 만나고 어딘가로 다니며 무언가를 하고 있지만 ‘임금’을 받는 일은 하루에 불과하다. 고작 하루만 허락된다는 게 불안 하지만 그 하루에 안도 하는 날이 더 많아지고 있다. 하루에 기대고 있는 생계/생활은 위태롭다. 그리고 소중하고 애틋하다. 임금노동의 시간을 늘리기 위한 방법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더 많은 수입을 위해 작정하고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 신념의 문제라고만 말할 수도 없고 그저 열악한 상태라고 한탄할 수만도 없다. 지키고 싶은 가치와 열악한 지위 사이를 정처 없이 헤매야 하는 정서의 부침 속에서 조금은 마모되고 소진되어 가며 또 조금은 덤덤하게, 도리 없는 삶의 조건을 버텨낼 수 있는 힘이 조용히 쌓이고 있다는 것을 천천히 알게 된다.

 

이 하루는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시간도 아니며 남은 6일을 압도하는 절대적인 시간도 아니다. 전날부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신경을 조금 더 쓰고 당일엔 최대한의 에너지를 끌어올리되 그것을 다 쓰지 않을 수 있는 ‘거리감’을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단 하루만 허락되는 제한된 시간의 조건 속에서 ‘의욕의 과잉’을 경계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단 하루지만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수락하는 일이야말로 ‘의욕의 과잉’을 경계하는 방법인데, 그건 내몰린 탓에 속절없이 마모되거나 소진되지 않게 나름으로 고안해낸 자구책이라고 해도 좋겠다. 하루 실패하거나, 하루 성공한다. 그건 작은 실패이거나 작은 성공일 수밖에 없다. 비상하고 침잠하는 싸이클이 아니라 오르락내리락하는 운동성을 유지하는 일 속에서 변함없는 것이 하나 있다면 절망하는 일이겠다. 실패 속에서도, 성공 속에서도 나는 절망한다. 그건 ‘하루’라는 제한된 조건과는 무관하다.

 

대학에서 만나는 학생들은 대체적으로 무기력하고 수동적이며 연약하다. 놀라울만큼 완고하고 무례한데 그건 의도해서가 아니라 모르고 행하는 듯하다. 그리고 끝내 듣지 않으려 한다. 이건 그들을 폄훼하거나 비난하기 위한 규정이라기보단 강의실이라는 현장을 장악하고 있는 시절 정서에 대한 기술에 가깝다. 내게 수업이란 무언가를 가르치는 일이기에 앞서 이 정서나 태도들과 정직하게 대면하는 일이며 또 맞서는 일이기도 하다. ‘수업의 상태’를 짐짓 모른 척 하거나 그럴 듯하게 눙치지 않는 것이 ‘하루’를 대하는 나의 유일한 신념이다. 대학에서 무언가를 가르치는 자리에 선다는 것은 전염병처럼 퍼져 있는 무기력과 타인에 대한 무심함 속에 감춰져 있는 세밀하고 은밀한 저마다의 욕심과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 타인에겐 무심하며 무례하지만 자신에겐 더할 나위 없이 섬세한 형편을 매번 감지하며 수업을 진행하는 일이란 수업이 잘 되고 못되는 것과 무관하게 절망, 절망할 수밖에 없다. 절망을 조건으로 하지 않는 수업은 거짓말이며, 어쩌면 절망이야말로 가르치고 배우는 이들의 염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품게 한다.

 

오늘 하루도 무심한 듯 무섭게 집중하는 이들과 눈빛을 반짝이며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욕을 마음껏 발산하는 이들에 말없이 기대어 가르치는 자의 염치를 가까스로 지켜내었다. 내 말에 귀 기울이는 이에게 더 많은 말을 건네는 일, 뭔가가 더 필요한 이에게 바로 그것을 주거나 안내하는 일. 가르치는 사람이란 그 일을 하는 이를 가리키는 것일테지만 나는 쉽게 그럴 수가 없다. 가르치는 일의 쾌락을 탐닉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내 말이 정확한 곳에 가서 안착하는 일, 누군가가 내 말과 생각을 정확하게 캐취하는 것을 목도하는 일의 쾌감을 어찌 나라고 누리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는 무례한 이들에게, 무기력한 이들에게,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는 이들을 향해 말을 건네는 데 애를 쓰게 된다. 내게 ‘이틀’이 주어진다면, 아니 ‘삼일’이 주어진다면 다르게 말할 수 있을까? 내 말과 행위가 속절없이 바스라지는 것을 매순간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에 말과 행위가 더 먼 곳을 향해 뻗어나가고 목적지를 향해 더 힘차고 더 크게 증폭되는 것을 목도할 수 있을까? 아니, 누구의 성숙도 바라지 않는 이 교실에서 내 말과 행위의 증폭과 증식을 마음껏 허락해도 좋을까?

 

강의실에서 마침내 내가 절망하지 않게 될 때 불안과 소중 사이를 운동하는 ‘하루’도 함께 없어질 것임을 알고 있다. 내게 절망은 끝이나 파국의 선언이 아니라 매번 응답해야 하는 강의실의 윤리다. 오늘의 절망을 수락하고 다가오는 절망을 피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내 ‘하루’의 동력이다. '절망하기'라는 행위를 통해 희망을 지켜가는 일. 그것이 대학 강의실에서, 가르치는 자리에 서 있는 동안의 내 책무이자 책임일 것이다. 불성실한 관객이나 영리한 소비자들로 가득 차 있는 절망의 장소에서 내가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영혼이 소리 없이, 의도 없이 성숙할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내 ‘하루’의 절망이 누군가의 영혼의 성숙을 도울 수 있다면 그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며 오늘 내가 기꺼이 당도해야 할 장소다. 가까스로 지켜내야 할 내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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