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6. 29
한적하게 걷다보면 갑자기 ‘써야겠다’는 생각에 휘감길 때가 있다. 나는 이 의도 없는 찰나를 무심히 좋아한다. 욕심내지 않고 수단으로 대하지 않는 한 이 찰나가 무표정한 친구처럼 내 곁에 있어주리라는 예감 속에서 애틋함이나 아쉬움 없이 조금 더 한적하게, 무심하게 안심할 수 있는 것이다. 오솔길이나 외진 곳을 책을 보며 걸은 지 두달정도가 되어간다. 유난떠는 것처럼 보일까 오래전부터 생각만 하고 짐짓 꺼려왔었는데, 핸드폰을 보면서 걸어다니는 사람이 지천인 곳에서 책을 보며 걷는 게 무슨 흉일까 싶어 차가 다니지 않거나 길이 험하지 않는 곳에 산책할 땐 읽으며 걸었다. 무엇보다 기온이 올라간 탓에 오르기도 전부터 마음이 지쳐버리곤 했던 도서관에 올라가는 길에 적지 않은 동기부여를 해주는 이점도 있었다. 이명 증상 때문에 이어폰으로 음악 듣는 것을 중단 하기 전엔 늘 뭔가를 들으며 걸었는데 그때 음악 없이 걸어야 하지 않을까, 여러 차례 생각했던 것처럼 산책을 책을 읽으며 한다니, 산책이 독서의 수단이 되어버린 것 같아 자기 검열도 여러 차례 해봤지만 해보고 싶은 걸 하고 생각해보자라는 가벼운 마음을 가져본 것이다. 오늘은 어제에 이어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을 읽으며 도서관까지 올라갔다.
처음엔 생소하기만 했던 '걸으며 읽기'에 집중했다면 지금은 거의 한 손에 책을 들고 다니는 수준이다. 밀도가 높지 않고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은 책을 한권 뽑아들고 읽다 말다 하며 오르막길을 걷노라면 말이 없어도 불편하지 않은 친구 하나가 곁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때론 걸으면서도 한껏 홀로일 수 있는 충만감을 느끼기도 한다. 정좌하고 읽어야 하는 글이 있는가 하면 쓰면서 읽어야 하는 글도 있다. 그뿐인가, 가끔은 서서 읽으면 더 좋은 글, 화장실에서 보게 되는 글, 버스에서 펼치게 되는 글, 잠들기 전에 읽는 글, 멀리 갈 때 챙기게 되는 글,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읽는 글, 긴장을 완화할 목적으로 읽는 글, 산책하며 읽기 좋은 글 등등 읽기의 방식은 무궁무진하다. 정작 책상에 앉아 뭔가를 읽고 쓰는 시간이 생각만큼 늘지 않는 게 흠이라면 흠일 수 있지만 이전과 달리 ‘읽는 행위’에 의미의 무게를 조금 더 부여해보고자 하는 의욕을 부려보고 있는 즈음이니 만큼 가끔은 그저 외국어 단어를 외운다는 마음이 되기도 해서 걸으며 읽는 것이 애를 써 무언가를 ‘익히는 몸’을 조형하는 데에 적지 않은 동력이 될 때도 있다.
걷고 있기에 보이는 문장이라는 것도 있음을 슬며시 알게 된다. 페이지를 끝까지 넘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걷기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읽기 방식을 찾아보는 와중에 생각지 못했던 문장이 눈에 들어올 때가 있는 것이다. 독서라는 게 원래부터 그런 우발적인 휘말림이라는 은밀한 쾌락을 쫓는 행위이기도 하겠지만 수석을 수집하는 호사가들처럼 그저 무심한 돌멩이 무더기 속에서 유별난 형상을 보게 되는 경험에 빗대면 좋을까. 가끔 나도 모르게 어떤 문장을 어루만지게 되는 일이 있는데 그건 걷다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를 무심히 주워 세심히 바라보다 슬며시 매만지며 흙먼지를 털어내어보는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것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치며 걸어다니는 것일까. 얼마나 많은 문장들을 읽어내지 못하고 황새마냥 겅중겅중 넘어다니는 것일까. 흙먼지 뒤집어 쓰고 버려져 있는 듯한 돌멩이 하나를 멈춰서서 줍는 일. 귀한 것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허리 숙여 줍고 자세히 들여다보며 슬며시 매만져보는 일. 돌멩이는 변함없이 돌멩이일 뿐이지만 처음으로 돌멩이를 들여다보고 매만지는 일은 귀하고 드문 경험이다. 많은 것들을 무심히 지나쳐가는 산책길 위에서 멈춰서 돌멩이 하나를 줍는 일 속에 생활의 알짬이 쟁여져 있음을 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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