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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이명(耳鳴)이라는 정동(情動)

by '작은숲' 2016. 6. 1.

2016. 5. 30/6. 1



공사 소음 때문에 잠에서 깬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웅웅웅. 멀리서 육중한 기계 소리가 초여름 햇살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지난 여름, 광안리보다 피서객의 방문이 많았다는 송도는 올해 더 요란할 것이다. 작년에 비해 바다를 바라보며 망중한을 즐기는 일의 빈도가 확연히 줄었다. 매일 밤과 새벽 끊이질 않는 해변의 폭죽 소리가 생활 소음정도로 데면데면하게 여겨지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며칠 전 산책을 하다가 바다 중간에 교량의 지지대 같은 것이 박혀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작업 소리일까. 아니면 느닷없이 입구를 폐쇄하고 때아닌 케이블카 복원 공사를 하고 있는 암남공원에서 들여오는 소리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인근 건물의 리모델링 공사 소리일까. 막연한 듯하지만 분명히 육중한 이 웅웅거림의 출처를 분명히 파악하긴 힘들었지만 어디에서 들려오는 것인지 분별하는 게 큰 의미가 없어보였다. 웅웅거리는 기계음이 내 귀에서 나는 소리라는 걸 도서관에 올라가서야 알게 되었다.  


이명증(耳鳴症). 몸이 허해졌을 때나 고혈압, 알콜 중독에 의해 발생하기도 하며 귀의 질환으로 발생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간 없던 증상들이 몸을 통해 출현하는 빈도가 잦다. 반나절은 모른 채, 반나절은 모른 척 지냈는데, 이틀 째는 머리가 울리고 무기력해져서 누워서 보냈다. 삼일 째는 ‘문학의 곳간’을 진행해야 해서 다시 짐짓 모른 척 했고 사일 째는 웅웅웅 하는 소리가 다른 소리로 바뀌는 듯해서 예의 주시 하며 보냈다. 오일 째, 다행히 소리가 조금 잦아들었다. 한쪽만 들리고 다른 쪽은 멈춘듯도 하다. 지난 토요일, 민주공원의 숲에서 진행했던 ‘문학의 곳간’ 28회를 준비하면서 ‘웅웅웅’ 하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 걱정을 하니 A가 자기도 그런 소기가 들린다고, 이 소린 이명증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나는 소리라고 해서 잠깐 안심을 했었다. 버스를 타고 퇴근할 때 귀가 편해진 듯하여 증상이 완화 되었나 싶어 잠시 반색했지만 버스의 엔진 소리에 묻혀 이명을 감지하지 못했던 것일 뿐 증상은 그대로였다. 지하철에서도, 택시 안에서도 소리는 그치지 않았고 집안에서도, 거리에서도 웅웅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서 나는 것인지 바깥에서 나는 소음인지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명에 시달리는 탓에 작은 소리까지 허투루 넘길 수 없어 집중해서 듣다보니 각종 소음에 얼마나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는지 새삼 절감하게 된다. 귀가 울려 음악도 듣지 못하고 이런 저런 생활 소음을 최소화 해봐도 도시 곳곳에서 작동하고 있는 거대한 기계들이 내는 굉음을 막을 방법은 없다. ‘웅웅웅’ 하는 소음이 이명이 아니라는 것이 안심해야 할 일이 아니라 어쩌면 절망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애써 창문을 닫았다해도, 혹은 도심과 꽤 떨어진 숲속까지 육중한 공사 소음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면, 더군다나 그 소음이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인지 그 출처를 짐작조차 할 수 없음에도 그저 아무렇지 않게 ‘생활 소음’쯤으로 치부하며 무심해지는 편을 선택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로운 것이라면 이 일상적인 소음이야말로 모두가 공통으로 앓고 있는 이명과 같은 것이지 않은가. ‘층간 소음’에 ‘칼부림’까지 나는 형편을 떠올려본다면 거대한 기계적인 소음에 이토록 무심하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종일 소음을 견디느라 지친 피로가 애꿎은 ‘층간 소음’을 향해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이리라. 어쩌면 이 칼부림은 구조의 문제는 쉽게 눈감지만 눈앞의 불합리함엔 한발짝도 양보할 수 없는 쪼그라든 시민성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육중한 굉음, 이 일상적인 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상태.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응답이 도착하는 시간을 견뎌내질 못한다. 발원지를 알 수 없던 육중한 소음의 출처는 속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딘지 알 수 없지만 분명 곳곳에 편재한 육중한 굉음은 지면과 바퀴의 마찰음과 같은 것이지 않을까. 말하자면 세상과 기계의 부대낌. 갈 수 없는 곳을 가려고 하고, 더 빨리 도착해 독점하려는 욕망이 쉼없이 뚫고 부수고 무너뜨린다. 뒤늦게 알게 된다. 이 일상적인 웅웅거림은 무언가가 파괴되는 소리라는 것을.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라는 것을. 누군가가 쓰러지는 소리라는 것을. 이명이 몸으로부터의 신호인 것은 분명하나 그게 내 몸을 돌보라는 신호인 것만은 아닌 듯하다. 지금(도) 무언가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 누군가가 쓰러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라면 그것을 수신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해야 할까. 증상을 경유해서만 도착하는 진실이 있다면, 실수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진실이 있다면, 이명이라는 이 오인된 정보가 내게 알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타인으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된 개인들의 세계로 진입하지 못하는 비명들이 쌓이고 쌓여 어디에도 닿지 못해 무너진 자리에 계류되어 진동한다는 것. 웅웅거림이 비명이 되지 못한 목소리들의 요동침이기도 하다면 이명은 귀가 들을 수 없는 진동에 반응하는 정동(affect)이라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건 ‘병’이면서 ‘힘’이다. 진원지를 알 수 없는 육중한 소음, 그 진동, 그 약동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는 절망적인 사태의 신호이면서 곳곳에 편재해 있는 장전(잠재)된 힘이다. 이 세상의 표면을 덮고 있는 것은 분명 보이지 않는 절망이겠지만 그 절망의 자리에 계류된 목소리들이 기꺼이 머물면서 진동한다. 그 진동이 계속된다는 것은, 웅웅거리는 공통의 이명이 지속된다는 것은 언젠가, 누군가가 스위치를 찾아 올린다면 기다렸다는 듯 잠재되어 있던 전류가 곳곳으로 흐를 수 있다는 신호를 멀리서, 쉼없이 보내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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