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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노동

물 한 잔을 나누어 마시는 사람들

by 종업원 2017. 11. 1.

 

 

<유나의 거리> 23회

 
 
‘유나’는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미선’의 집에 얹혀 살며 가게 일을 돕고 있지만 본업은 따로 있다. 전설적인 소매치기 ‘강복천’이 유나의 아버지였고 이름값에 걸맞게 여러 차례 교도소를 드나들었기에 유년 시절부터 홀로 커야 했던 유나 또한 살아가기 위해선 소매치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2014년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유나의 거리>(김운경 극본, JTBC, 2014)는 매회 놀라움의 연속이었지만 특히 놀라웠던 것은 등장인물들이 물을 나누어 마시는 장면이었다. 돈 많은 유부남과의 전략적 교제를 통해 생계를 유지해온 미선이 제 손으로 하는 거라곤 패션 잡지를 보는 것이나 휴대폰으로 고스톱 게임을 하는 것 정도인데,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물 한 잔을 달라고 유나에게 부탁 한다. 미선이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다시 유나에게 컵을 돌려주었을 때 유나는 컵에 남은 물을 마저 마신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를 처음으로 보았던 극장에서 나를 사로잡았던 것이 바닥에 물을 뿌리는 무명 배우의 모습이었던 것처럼 <유나의 거리> 23회 후반부에 등장한 아무 것도 아닌 일상적인 한 장면에 나는 강렬하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물 한 잔을 나누어 마시는 사람들. <유나의 거리>가 그리고 있는 세계, 아니 지켜내고자 하는 세계가 저 한 장면 속에 응축되어 있음을 예감했다. 소매치기 패거리에게 쫓겨 폐업한 호프집에 숨어 들어온 유나에게 그곳을 지키고 있던 ‘창만’이 건넨 것이 ‘물 한 잔’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유나의 거리> 1회

 
아니나 다를까 <유나의 거리>엔 유독 사람들이 어울려 무언가를 나눠먹는 장면이 셀 수 없이 많이 나온다. 대개의 드라마에서 식사 장면이 화목함이나 가족적인 분위기’, 혹은 식사를 하다가 갈등의 계기가 되는 언쟁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에 반해 <유나의 거리>에서 식사 장면은 인물들이 (나눠) 먹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김운경 작가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다세대 주택에 모여 사는 닳을 대로 닳은 가난한 사람들은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저녁이 되면 포장마차에서 뜨거운 국물과 오이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신다. 거창한 음식은 아니지만 그들은 정말 열심히 먹는다. ‘창만유나가 단둘이 만날 땐 경양식 호프집에서 튀김과 맥주를 마시고 유나가 여자 후배들과 있을 때는 스파게티나 피자를, 소매치기 패거리들과 함께 있을 땐 감자탕을 먹는다. 뼈 사이에 남은 살을 발라먹는 감자탕은 강도와 달리 남은 것을 살뜰한 기술로 챙겨가는 그들 나름의 직업윤리를 은근히 반영한다. 비리 형사 출신의 달호와 소매치기에서 전향한 양순이 운영하는 노래방에선 유나가 방문할 때면 자주 국수를 삶는다. 손님이 없는 방에서 이 세 사람이 국수를 나누어 먹는 장면은 나루세 미키오의 <번개>(1952)에서 배다른 형제/남매들이 모여 모밀국수를 먹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고레다 히로카즈, 2015)의 초반 시퀀스에 아버지가 남긴 배다른 동생 스즈와 함께 대청마루에서 모밀국수를 먹고 있는 장면은 나루세적인 전통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다시 <유나의 거리>. 앙숙처럼 지내던 계팔칠복이 화해를 할 때 그들 앞에 해장국이 놓여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창만은 수없이 라면을 끓이고, 삶의 바닥에서 바락바락 살아가고 있는 도시 빈민들은 편의점 앞 간이 테이블에서 종종 한턱을 낸다.
 

 

나루세 미키오, <번개>(1952)
고레에다 히로카즈,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가족이 아닌 이들이 모여서 음식을 나누어 먹는 장면은 김운경표 드라마의 서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인데, 초유의 국가부도 상태인 IMF가 터졌던 1997년에 방영되었던 비운의 드라마 <파랑새는 있다>(KBS)에서도 먹는 장면만큼은 아쉬울 게 없을 정도로 나온다. 그 시절까지만 해도 TV에서 음식을 먹는 장면은 입속에 음식이 들어가는 모습을 클로즈업 하거나 먹는 소리를 과장되게 증폭하는 방식으로 남이 먹은 것을 관람하지는 않았다. ‘먹방이라는 이 기괴한 포르노가 일상적인 것으로 안착하기 전에 먹는 모습엔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라는 조건이 전제되어 있었다. 김운경은 함께 어울려 무언가를 나누어 먹는 행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없이 사는 사람들이 콩 한쪽이라도 나누어 먹는 모습은 이웃사촌이라는 전통적인 미덕을 반복하거나 강화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음식을 나누어 먹는 행위를 통해 어울림을 바탕으로 하는 사람살이의 희망을 조형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파랑새는 있다>의 특이성은 사람들이 어울려서 음식을 나누어 먹는 장소가 동네 구멍가게 앞의 간이 테이블이라는 점에 있다. 밤무대 MC 앤디 김의 부인이 운영하는 동네 구멍가게는 자주 동네잔치가 벌어지는 마당으로 변한다. 동네에 방문한 손님을 맞을 때면 언제나 그 테이블 위엔 다과가 준비되어 있고 오랜만에 만난 지기와는 불고기를 함께 구워먹고, 가게 앞에서 음료수와 빙과류를 나눠 먹는 장면은 무시로 등장한다. 지금은 대형 프렌차이즈 마트나 편의점이 골목을 죄다 점령해버린 탓에 구멍가게를 찾을 순 없지만 구멍가게라는 것이 결국 100원을 남기는 장사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파랑새는 없다>의 주요 배경이 되는 서울 변두리 다세대주택의 주인집에서 베푸는 호의는, 평범한 일상 속에 깃들어 있는 비범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아침부터 이웃집에서 밥을 얻어먹으면서도 한 그릇을 더 요구하는 절봉에게 당연하다는 듯 한 그릇 가득 국수를 담아주는 손길이나 바깥에서 돌아온 병달에게 저녁 먹었냐는 안부부터 건네는 일상적인 대화는 먹방이 우리에게서 무엇을 강탈해갔는가를 서늘하게 가리킨다.
 
 

    
 
‘노인들을 위한 콜라텍’이라는 공간을 전면에 다룸으로써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기에 아무도 알 수 없었던 노년의 문화를 사실적으로 포착한 놀라움은 <파랑새는 있다>에서부터 이미 예비되어 있던 것이었다. 주말 드라마에서는 처음으로 밤무대 가수와 차력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으니 말이다. 오래전 한 친구의 혼인식 뒤풀이 자리에서 신부였던 그 친구가 즐겨 불렀던 ‘방랑자’라는 노래를 다시 들으며 자신이 지향하는 삶의 양식이 그 노래 속에 담겨 있음을 뒤늦게 알아차릴 수 있었는데, 돌이켜보면 내 어머니가 친지들이 모인 자리에서 매번 반주도 없이 사력을 다해 유행가를 부를 수 있었던 것 또한 ‘18번’ 속에 자신의 삶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오랜 노동으로 병들어 망가져버린 ‘몹쓸 몸’을 이끌고 아버지와 함께 수정산 약수터에 올랐을 때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먹고 노래 한 곡조를 뽑아야겠다고 새삼 과잉된 의욕을 부렸던 건, 그리하여 기어코 ‘꽃을 든 남자’를 목청껏 부르다가 갑자기 오열을 했던 건 우울증 때문이 아니라 그 노래에 실려 있던 꿈과 희망이 무너져버렸음을 돌이킬 수 없이 알아버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18번’이란 삶의 나침반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 모두에게 18번은 필요하다. <파랑새는 있다>의 밤무대 가수와 차력사에겐 ‘레퍼토리’라는 것이 있다. 늘 같은 노래, 같은 차력으로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대에서 부를 노래 한 곡을 업데이트 하는 데 얼마나 많은 비용과 노력이 필요한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얼핏 ‘그 나물에 그 밥’ 같은 똑같은 종류의 차력이거나 눈속임 같은 알량한 묘기처럼 보일지라도 병달과 절봉이 매일 아침 약수터에 올라 훈련을 빼놓지 않는 것은 매일매일의 성실한 훈련(삶) 없이 무대 위에서 실수 없이 레퍼토리를 완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 1부와 2부 사회를 진행하는 엔디 킴의 멘트 또한 늘 같지만 그 뻔한 레퍼토리가 무대 위의 가수와 차력사의 기운을 돋우고 잠시라도 각박한 세상의 틈바구니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무대 아래 취객들의 흥을 돋우며 세상살이의 시름을 달랜다. 밤무대 가수와 차력사, MC의 레퍼토리는 매뉴얼화된 기계적인 프로그램이 아니라 이들을 먹여 살려온 밥줄이자 대도시 한켠에 스스로의 힘으로 일구어온 텃밭이다. 얼핏 뻔해보이는 이들의 ‘레퍼토리’를 두고 어느 누가 삶의 빈곤을 보여주는 표지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건 ‘한 사람이 일구고 있는 세계’의 엄중함이 깃들어 있는 존재의 장소며 애씀의 산 역사다. 물 한 잔을 나누어 마시는 사람들이 소리 없이 지켜내고 있는 어울림의 세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