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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노동

불이 켜져도, 불이 꺼져도―<흐트러지다 乱れる>(1964)

by 종업원 2017. 10. 11.

2017. 10. 10

 

 

 

 

 

 

나루세 미키오(成瀬巳喜男)의 <흐트러지다 乱れる>(1964)에서 선명하게 남아 있는 두 장면. 영화 초반, 카메라는 전쟁으로 불 타버린 집터에 기둥을 세우고 17년 동안 남편도 없이(결혼하고 반년만에 필리핀에서 전쟁으로 사망) 시집살이를 해오며 가게(동시에 가계)를 꾸려온 레이코(다카미네 히데코)의 불꺼진 부엌을 비춘다. 바깥에서 새어들어온 불빛으로 대충의 윤곽을 드러내는 설정이지만 나루세는 그런 정황은 살리되 마치 17세기 회화처럼 음영의 효과를 극대화시켜 가지런히 놓여 있는 주방의 면면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담아낸다. 부엌에 불이켜지자 정갈하고 빈틈없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풍경이 펼쳐진다. 그건 영화 내내 카메라가 비추던 가게 내부에 도열해 있는 술병들과 식료품만큼 체계적이진 않지만 17년(다시 말해 전쟁을 겪었을 때부터 고도경제성장을 이룩한 1960년대 중반까지)을 한결 같이 묵묵한 성실함으로 가계(가족과 경제)를 꾸려온 전전(戰前) 세대, 다시 말해 전후(戰後) 재건을 이룩하는 데 중요한 축이었지만 보이지 않았던 한 여성이 구축해온 세계이기도 하다. 카메라는 겨우 1~2초정도 그 모습을 담아내고 있을 뿐이어도 내게는 오랫동안 보고 있어도 다 감상하지 못할 것만 같아 걱정부터 앞서는 절경처럼 보였다. 

 

 

 

레이코가 시집 올 때 고작 7살이었던 시동생(코지)이 어렵게 들어간 직장도 전근을 가기 싫다는 이유로 그만 둬버리고 25살의 룸펜으로 빈둥되고 있었던 이유가 형수를 사랑하기 때문임을 고백해버린 밤. 언제까지라도 형수 곁에 있고 싶다는 코지의 이야기를 카메라는 등을 돌린 채 말없이 듣고 있는 레이코 뒤쪽으로 견고한 부엌의 세계를 흐릿하게 놓아둔다. 그리고 그날 밤, 다시 ‘바깥’에선 결코 알 수 없는 부엌이라는 세계의 풍경. 불이 꺼져 있던 부엌의 불을 켰던 앞의 쇼트와는 반대로 불이 켜져 있던 부엌의 불을 끄는 쇼트가 놓인다. 그 부엌을 떠나야 하는 시간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리는 불길한 암시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식기와 보온통은 언제라도 그 자리에 있을 것처럼 견고하기만 하다. 

 

 

 

영화의 도입 시퀀스를 장악하고 있던 슈퍼마켓 세일 홍보 트럭과 거기서 울려퍼지는 밝은 곡조. 전쟁의 기억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정갈하고 유복해보이는 거리를 슈퍼마켓 홍보 트럭이 질주한다. 자신의 가게에선 8엔으로 들여온 달걀을 11엔에 팔고 있는데 슈퍼에선 5엔에 판다며 절망하던 이웃 가게의 주인은 어느 날 밤 자살을 해버린다. 전후 재건을 위해 사력을 다해 살았던 전전(戰前) 세대에게 그 트럭과 흥청거리는 곡조는 생활을 밀고 들어오는 탱크이거나 장송곡이었을 것이다. 업어키우다시피 한 시누이들이 권한 재혼이 구멍가게를 슈퍼로 전환했을 때 자신의 자리가 모두에게 곤란해져버리기 때문임을 뒤늦게 알아차린 레이코에게 17년의 세월이란 무엇이었을까. 현실의 격랑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여성을, 그러나 누구보다 강단있고 강인한 여성을 그리는 데 탁월한 나루세는 함께 했을 때 거의 실패 한적 없는 다카미네 히데코를 앞세워 다시 ‘물을 뿌리는 사람들이 일구어내는 세계’를 조형하고 있다. 전전에서 전후로 넘어가는 격랑 속에서 전쟁의 흔적은 감쪽 같이 사라지고 누군가가 일구어온 성실함의 세계 또한 휩쓸려 사라진다. 한 여성이 지켜내온 세계에 랜턴을 비추며 불을 켜고, 불을 끄는 나루세의 행위는 영화의 깜빡임으로, 그렇게 경고등의 역할을 한다. 술에 취해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코지의 시신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가는 레이코의 절박하고 절망적으로 흔들리는 표정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