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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러져가는 이야기를 듣는 것, 구조 요청에 응답하는 것 : 대피소의 문학(1)

by '작은숲' 2017. 12. 9.

 

 

 

 

 

 

1. 필사의 글쓰기

 

 

이토록 오랫동안 참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던 시대가 있었던가. 용산 참사 이후 조간朝刊은 부음訃音 같다’(이영광, 유령 3)던 한 시인의 말이 몇 년 사이에 조간은 부음이다라는 절망으로 좌초되어버린 듯하다. 아침에 누군가의 부음을 듣는 것이 아니라 부음 없이는 아침이 오지 않을 것만 같다. 오늘 우리가 맞이하는 아침은 누군가의 죽음에 빚지고 있는 것이리라. 무력(無力)해지기 싫어서 무력(武力)을 외면하고 무력감(無力感)과 대면하지 않으려 피해다니다보니 겨우 잊지 않겠습니다정도의 말만을 읊조릴 수 있을 뿐이다. 누군가에겐 필사적이고 간절한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이 세상에서 가장 무기력한 말처럼 느껴질 때가 잦다. 그건 잊지 않겠다는 말이 무기력해서가 아니라 그 말을 인용하는 이곳의 무기력을 가리킨다. ‘잊지 않겠다는 말은 의지의 표명이기에 앞서 약속에 대한 요청이다. 누군가가 응답하지 않으면 이 말은 성립할 수 없다. 필사적으로 말하는 이와 필사적으로 듣는 이. ‘잊지 않겠다는 말이 성립하는 장소엔 언제나 두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 무릅쓴 필사(必死)가 가망 없는 세계를 지탱한다. 필사의 힘은 개별자의 창조적인 역량이 아닌 차라리 누군가가 남긴 흔적에, 바꿔 말해 필사(筆寫)에 기대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필사적으로 지켜내는 힘이란 이 세계의 비참을 듣고 말하는 것으로부터, 이어 쓰고 옮겨 쓰는 일에서부터 발아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참사 시대의 이야기 공정술은 필사(必死/筆寫)’를 경유하지 않을 수 없다. 필사의 글쓰기, 그것은 지금 르포라는 이름으로 이곳에 도착해 있다.

 

 

                                    

 

 

 

필사적으로 듣고 말한다는 것, 이어 쓰고 옮겨 쓰는 것은 당면한 문제를 서둘러 해결하거나 대안 도출을 위한 시도이기에 앞서 문제에 머물며, 문제를 살아내는 일이다. 끝끝내 듣고 말하는 필사라는 행위가 지켜내는 곳은 이라는 장소다. 참사 곁에 머물며 참사를 살아내는 일, 그건 피해자의 망막에 새겨진 마지막 영상의 목격자가 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필사란 목격한 것을 증언 하고 기술하는 일이기도 하다. 도미야마 이치로는 세계의 가능태를 시체 옆에 있다는 것에서 찾았다.[각주:1] 시체와 일체화될 수도 없고 시체로부터 도망칠 수도 없는 상태에서 살해당한 자 바로 옆에 있는 자의 목소리로 기술(記述)하는 일. 그는 누군가의 죽음을 막지 못한 겁쟁이들의 연대를 통해 말이 있는 곳을 확보해가는 것으로부터 폭력에 대해 저항할 절박한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 말을 오늘의 참사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 머물며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상태로 바꾸어 가는 일이라 옮겨 볼 수 있겠다.[각주:2] 곁에 머문다는 것은 참사의 연대기(年代記)를 연대(連帶)의 기록으로 이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온기 대신 차가운 시체와 마주보는 일, 기쁨과 웃음 대신 슬픔과 절규를 끝까지 듣는 일이란 참사의 시간을 피해자와 가해자로 분절하고 구분하는 것이 아닌 아직, 다행인 자의 자리에서 함께 살아낸다는 것이다. 유가족들 곁에서, 해고자들의 곁에서, 빼앗기고 추방당한 이들의 곁에서, 아직 다행인 자들이 끝내 듣고 쓰는 글이 오늘의 르포다 

 

 

 

2. ‘으로 만든다는 것

 

 

장기투쟁의 일상화를 일러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는 기구의 기능불능이나 사회적 협의 체계의 부재라는 현상을 지적하는 일은 필요하다. 현상을 조망하고 종합하여 진단함으로써 현실을 재구성하는 일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현상에 기댄 현실감현장에 이르는 길을 열어주는 것은 아니다. 모두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워 겁박하는 현실은 너무 가까이 있지만 모든 참사의 현장은 아득하다. 이 거리, 이 간극, 이 낙차야말로 참사 시대의 공통감각이라고 불러야할 지경이다.‘현상을 주목할수록 현장이 더 멀어지고 고립되는 것은 진단하고 조망하는 자리당면한 자리의 낙차를 자기 질문으로 사유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사에 대해 이야기하면 할수록 현장과 멀어지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문제는 참사에 관해 충분히 이야기 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참사를 듣고 쓰는 방식에 있다. 어떤 현상을 조망하고 진단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론 현장에 진입할 수 없다. 갖은 이론으로 무장한 진단의 인플레는 외려 참사를 조망하는 이곳과 조망될 뿐인 저곳을 구분하는 사회심리적 장벽을 쌓는 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언뜻 눈에 띄지 않는 현상 하나를 언급하며 이야기를 이어가보자.

 

 

많은 문예지에서 여러 해에 걸쳐 르포라는 글쓰기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왔음에도 여전히 르포의 자리가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건 일차적으로 문예지가 완고하고 보수적인 장르적 프레임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그보단 문예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제도) 문학이 현장과 접속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먼저 이렇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말하고 쓰는 문법이 파괴되어버린 참사의 시대에 시와 소설, 그리고 비평은 어떻게 여전히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머물러 있을 수 있는가. 현상을 주목할수록 현장으로부터 더 멀어지는 역설. 현상을 조망하는 자리와 현장의 당면한 자리의 낙차를 사고하는 것이야말로 참사의 시대를 살아내고 있는 이곳의 글쓰기, 그 행위의 공통 조건일 것이다. ‘참사 이후의 문학은 이러한 공통 조건의 인지와 수락 없이는 지금-이곳에 도착할 수 없다. ‘참사 이후의 문학은 바로 (제도) 문학 바깥을 배회하고 있는 다종한 존재들의 목소리와 접속할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바깥의 목소리를 듣고 응답하는 일은 굳게 닫혀 있는 제도의 성문을 여는 시스템의 결정이 아닌 성문 바깥으로 나가고자 하는 개별적인 시도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약탈당하고 내몰려 바스러져가는 존재들의 목소리 곁에서 듣고 쓰고자 하는 시도는 이미 곳곳에서 시작되고 있다. 한 작가는 세월호 참사가 상()으로 맺혔다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대로 두 눈에 들러붙어 세상을 보는 눈 자체로 변할 것 같다는 예감 속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지난 한 달간 많은 걸 보고 들었다. 보지 않으면 놓칠 것 같았고, 놓치고 나면 속을 것 같았다. 되도록 모든 걸 보고, 누가 어떤 식으로 말하고 있는지 기억해두려 했다. 지금 진도에 사실은 차고 넘치나 진실아직 다 드러나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그사이 나는 망가진 문법더미 위에 앉아 말의 무력과 말의 무의미와 싸워야 했다. 어떤 말도 바닥 속으로 가 닿을 수 없고, 어떤 말도 바로 설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납득시킬 만한 말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마냥 그렇게 주저앉아 있을 수많은 없어, 2년 전 이자영씨[‘쌍용차 해고 투쟁노동자 이창근씨의 아내 : 인용자]를 떠올리며 내가 가까스로 발견해낸 건 만일 우리가 타인의 내부로 온전히 들어갈 수 없다면 일단 그 바깥에 서보는 게 맞는 순서일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바깥에 서느라 때론 다리가 후들거리고 또 얼굴이 빨개져도 우선 서보기라도 하는 게 맞을 거 같았다. 그러나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 그렇게 조금씩 바깥의 폭을 좁혀가며 으로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김애란,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김애란 외 11, 눈 먼 자들의 국가, 문학동네, 2014, 17~18.

 

 

참사는 구성원들을 각자의 자리에 꼼짝 못하게 붙박아 무기력하게 만든다. 글을 쓰는 이에겐 망가진 문법더미 위에 주저앉게 만드는 일이겠다. 문법이 파괴된 자리에서 쓰는 행위의 무능과 무기력을 회피하지 않고 그 한계와 마주한다는 것은 안전한 자리’(/우리/공동체/제도)를 포기 하고 바깥으로 걸어나가는 이행의 결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바깥에 선다는 것, 바꿔 말해 타인의 고통과 마주하는 일은 자신의 한계와 대면하는 비용을 치르지 않고는 불가능한 경험이다. 김애란은 그 무릅쓴 가까스로의 시도를 바깥의 폭을 좁혀가며 밖을 옆으로 만드는 일이라고 했다. 거리를 두고 현상을 진단하거나 서둘러 현실을 초월하지 않고 바깥으로 나--가는 일은 자기 한계를 무릅쓰고 감행하는 시도이자 그 한계를 쓰기라는 행위의 조건으로 수락하는 뜻을 품은 걸음이기도 하다. 이건 글쓰기의 갱신이나 실험적 글쓰기와 같은 글쓰기 자체의 문제로 수렴되지 않는다. 기왕의 글쓰기가 이루어지던 조건 바깥으로 나가 예측할 수 없고 제어할 수 없는 막막한 을 구체적인 으로 조형하는 시도 없이는 글쓰기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무엇보다 다른 누군가의 (기대어) 서지 않고는 글쓰기라는 행위가 성립할 수 없다는 참사 이후의 글쓰기 토대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을 품고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물음을 다음과 같이 옮겨 쓰고 싶다. 존재의 고유한 (texture)’(beside)’이라는 공통 장소 없이는 지켜낼 수 없다. ‘가만히 있어라라는 체제의 명령과 자신의 안위를 보존할 수 있는 익숙하고 안전한 자리를 박차고 바깥으로 나가는 행위들의 연대를 통해 구축하는 임시적인 전선에 가깝다. 그러니 마냥 온전하거나 안전한 곳일 수 없다. 온갖 무능과 무기력으로, 실패와 절망으로 넘쳐나는 곳이 곁이며 그곳은 이질적인 개별자들의 무늬()가 뒤엉켜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예측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이질적인 것과의 뒤엉킴, 그 침투와 물듦을 수락할 수 있을 때 고유성 또한 가까스로 지켜낼 수 있다는 역설은 문법이 파괴된 세계에서 새롭게 구축되고 있는 참사 이후의 문법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곁은 온기로 유지되는 안락한 보금자리가 아니라 늘 초과하고 범람하는 장소다. 오늘의 르포야말로 바로 그 초과와 범람의 장소에서쓰이고 있으며 초과와 범람으로쓰이고 있다. 

 

 

 

3. 바깥에서 쓰이는 이야기

 

 

르포는 세계의 비참과 마주해 그것을 기록하고 어떤 식으로든 응답해야 하는 도덕적 책무나 개별적 윤리의 영역을 이미 넘어서 있다. 참사의 시대에 씌어지고 있는 거의 모든 르포에 하나가 아닌 여럿의 목소리들이 웅성거리고 있다는 것을 환기해보자. 이 웅성거림은 다양한 욕망들의 충돌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할당되고 한정된 장소를 뚫고 바깥으로 나오고자 하는 의지의 증거다. 르포는 쓰는 이의 역량을 초과하며 끊임없이 쓰는 행위를 침범해 지금이라는 시간과 쓴다는 것의 행위성을 문제 삼는다. 르포가 쓰는 행위에 대한 초과와 침범, 근본적인 것에 대한 문제 제기를 수락하는 글쓰기라면 그것은 쓰인 글이 아니라 쓰고 있는 글이며 계속해서 써나가야 하는 연쇄의 글이자 끊임없이 다시 쓰고 새로 써야 하는 과정의 글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르포는 특정한 장르로 한정 지을 수 없고 구획해서도 안 된다. 르포는 제도 바깥에서 쓰이고 있는 구술과 증언, 기록과 고발을 목적으로 하는 글쓰기만이 아니다. 초과와 범람, 침투와 물듦을 조건으로 하는 글쓰기를 특정한 현상으로 진단하고 르포라는 장르로 구획해 제한된 범주로 설정하는 것은 기존의 문학 제도가 노정하고 있는 한계를 대타항을 통해 임의적인 방식으로 갱신하고 내부의 존속과 유지를 위해 르포를 구성적 외부로 호출하는 전략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르포라는 장르의 출현에 주목할 게 아니라 곳곳에서 시도되고 있는 르포적인 글쓰기의 양태들을 포착해 흩어져서 고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시도들을 연결함으로써 지속가능한 전선의 형태로 구축하는 일이다.

 

 

안전하고 할당된 장소 바깥으로 나--으로 조형해가는 시도는 참사 현장의 내부에서만이 아니라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미 진행되고 있다. 소설이라는 범주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참사의 현장 내부로 들어가기 위한 시도이자 쓴다는 행위를 통해 쓰기의 바깥으로 나가고자 하는 시도로 읽을 수 있는 한 장면을 아래에 인용 한다.

 

 

꿈속에서 난 처음부터 알고 있어. 그 비행기가 그런 비행기라는 걸. 그걸 먹으면 모두 흙으로 변하리라는 걸. 그걸 아는 사람도, 음식이 주어지지 않는 사람도 나뿐이야. 그런데 난 누구에게도 먹지 말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

경은 말했다. 곳곳에서 비명이 들리고 울음이 시작되지만 그녀는 감히 어떤 것도 느낄 수 없다고. 그녀 옆자리 남자의 손끝이 부서지고, 손바닥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손목이 사라지는 것을 본다. 그가 입고 있던 희 셔츠가 바닥으로 펄럭이며 내려앉고, 바짓가랑이로 원래는 그였던 것이 빠져나오고, 그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흙으로 변해 통로로 흘러나오는 것을 그녀는 가만히 보고 있다.

그러고 나면, 경은 중얼거렸다. 내가 정말로 왜 그 비행기를 타고 있었던 건지 알게 돼.

안전벨트가 풀린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고는 통로를 걸어가, 맨 앞자리부터 시작한다. 흙이 된 사람들을 원래의 형체로 돌려놓는 것이 그녀의 일이다.”

윤이형, 러브 레플리카, 러브 레플리카, 문학동네, 2016, 179.

 

이 소설이 2014년 여름, ‘참사 이후에 발표된 작품임을 환기하지 않더라도 2014416일 진도 앞바다에 세월호가 침몰하던 그 무력하고 비참한 시간이 망막에 돌이킬 수 없이 새겨진 이들이라면 이 장면이 한 작가가 구축한 문학적 공간을 초과해 참사의 현장으로 범람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눈앞의 죽음을 막을 수 없는 무력한 상태, 옆자리의 사람이 바스러져 내리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끔찍한 시간은 의 고유한 경험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바로 옆에서 들리는 비명에 감히어떤 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란 죽음 옆에서 홀로 살아남은 겁쟁이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 참혹한 현장을 외면하지 않고 가만히 보고 있다는 것인데, 이 응시 속에 타인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하는 무기력만이 아닌 무기력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려는 의지가 장전되어 있음을 예감하기 때문이다. ‘의 꿈 이야기 속엔 언젠가 가 해주었던 진흙 인형이야기가 섞여 있다. 망상증과 허언증 사이를 오가며 부유하는 의 모습에서 나는 비정상적인 환자가 아닌 타인의 기억과 말이 를 찢고 들어와 뒤섞여버려 구분할 수 없는 상태를 유지하려는 존재의 고투를 보게 된다. 어떤 죽음을 옆에서 지켜봐야만 했던 속수무책의 상태에서 무기력으로 침잠하지 않고 무기력과 마주함으로써 바스러진 죽음의 잔해를 원래의 형체로 돌려놓는 장면을 두고 애도 작업이야기 공정술이 이미 분리 할 수 없는 상태로 이어져 있다고 말해도 좋으리라.

 

 

타인의 고통이 의식 바깥인 꿈속에서 반복 상영될 때, 손쓸 수 없던 시간 속으로 누군가의 기억을 불러들여 산산조각나버린 존재들의 형체를 조형하여 돌려주는 일. 그런 행위의 지속은 강박이나 분열이 아닌 참사 시대를 살고 있는 개별자의 정체성이 어떻게 해체되고 재구성되는지, 그 의지가 어떤 방식으로 관철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읽을 수 있다. 손 쓸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무너지고 바스러지는 것은 타인의 신체만이 아니다. ‘라는 정체성 또한 옆에서 죽어가는 타인과 함께 바스러진다. 바스러진 타인의 잔해를 원래의 형체로 돌려놓으려는 행위에 의해 재구성되는 것 또한 타인만이 아니라 라는 존재이기도 하다. 나의 삶이 타자의 죽음에 이양되어 연루되는 애도 작업이란 참사의 시대를 살아내고 있는 존재들의 주체화 과정이기도 한 셈이다. ‘를 설명하는 것이 타자들의 고통겪기(suffering)와 인과적 관계를 맺고 있기에 인간은 언제나 의 곁에서, 너를 향해 말하면서 비로소 가 될 수 있는 근본적인 취약성에 노출된 존재라는 것이다. '자기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무능과 고통을 인정하면서도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실천'[각주:3]은 듣고-쓰는 행위가 이루어지는 장소 곳곳에 이미 편재해 있다. 오늘의 르포는 그 실천의 중심에서 흘러넘치는 끓는점이다 

 

 

 

4. 구조 요청의 동력학

 

애기, 여깄어요!”

 

세월호가 기울어 가라앉고 있었을 때 단원고 손지연 학생이 찍은 동영상에 담겨 있는 이 목소리는 “6살 아이의 부모가 아이를 찾고 있으며, 아이를 발견한 사람은 소리 쳐서 위치를 알려 달라.”는 선내 방송을 듣고 아이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 여학생들이 외친 것이었다. 그들이 끝까지 지켜 주었기에 5살의 여자 아이는 누구보다 먼저 구조 보트에 태워져 육지까지 올 수 있었다.[각주:4] 그런데 키즈룸 왼편 B-19 객실 복도에 있던 아이는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었다. 그들은 남매였지만 여동생 권○○ 양만 생존할 수 있었고 오빠 권혁규 군은 아직 진도 앞바다 아래에 가라앉아 있다. 같은 시각 단원고 조태준 학생은 공포에 질려 울며 , 우리 죽어요?”라고 묻는 권혁규 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아가 너 살릴게.”[각주:5] 조태준은 팔뚝의 핏줄이 터질 때까지 승객들을 구했지만 그때 구하지 못한 아이 생각이 날 때면 자신이 살인자가 되어버린 것 같다며 괴로워 했다(“끝까지 살린다, 살리겠다라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어른들 몫까지구명조끼입고 얼굴만 간신히 동동 떠갖고 있는데 물속도 어느정도는 보였어요. 그 남자애가 보이더라고요. 근데 손이 안 닿아요. 손이”, 80). 10개월 동안 15만장에 가까운 기록과 3테라바이트가 넘는 자료를 분석해 산산조각 난 진실의 조각을 하나하나 찾아서 재구성한 기념비적인 저작 『세월호, 그날의 기록』(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 진실의 힘, 2016)엔 참사 당일 910분경 객실 복도에서 학생들이 권○○ 양에게 구명조끼를 입혀주는 장면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위급한 상황에서도 학생들은 권혁규 군과 권○○ 양을 챙겼다. 104분 키즈룸에서 대기하던 손지연 학생은 3층에서 육성으로 애기! 애기!”를 찾는 남성에게 소리쳐 알린다. “애기, 여기요! 애기, 여깄어요! 애기 2명 다 여기 있어요!”(『세월호, 그날의 기록』, 152)

 

                            

 

 

 

그 누구도 구조하지 않는 곳에서 한 아이를 살려낸 것은 여기, 아이가 있다!’는 목소리였다. 커다란 배가 우리 눈앞에서 가라앉는 동안 아무도 그들의 구조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고, 참사 현장에서 구조 요청을 외친 이들만이 누군가를 구했다. ‘살려달라!’는 외침보다 앞서 있던 여기, 아이가 있다!’는 목소리가 구한 것은 한 명의 아이만이 아니다. ‘여기, 아이가 있다!’는 목소리는 모든 말이 비명과 괴성으로 와해되어버리는 참사의 현장에서 가까스로 사람의 말을 구해낸 것이다. 누구도 구하지 못했다는 무능과 함께 그 누구도 임박한 미래의 우리를 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공포가 모두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런데 구조 요청은 무기력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416일 세월호에 타고 있던 단원고 학생들의 여기, 사람이 있다!’는 외침은 구조 요청이 응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응답(respond)을 발명하는 일(invention/ability)이라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이들에 의해 구조 요청은 다른 문법을 가지게 되었다. 누군가를 부름으로써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일이자 그 누군가를 이쪽을 향해 올 수 있게 이끄는 힘. 그것이 구조 요청이라고 말이다. 이 구조 요청의 동력학에서 나는 불가항력적인 재해에 의해 모든 전력이 차단되어버린 암흑 속에서 보게 된 은하수를 일컬어 다른 종류의 전력이라고 한 레베카 솔닛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각주:6] 그건 잠재되어 있던 것의 가능태를 가리키는 것일 터, 솔닛은 그 전력을 타고 즉흥적이고 집단적며 국지적이지만 협동적인 다른 종류의 사회를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이 흘러든다는 것을 재난 현장을 기록한 역사 더미 속에서 발견했다.

 

 

그날우리는 누구도 구하지 못했지만 구조 요청에 대한 응답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아직 구해야 하는 목소리가 있다. 세월호 생존 학생들은 참사의 현장 속에서 구조 된 게 아니다. 구조 요청의 힘으로 누군가를 구하고 자신의 힘으로 탈출 했다. “분명히 기억하는 건 애들이 배에서 탈출한 거라는 거. 나온 아이들을 그냥 앞에서 건진 것 뿐이지 적극적으로 배에 들어가서 뭘 어떻게 했거나 그런 게 없으니까. 그걸 구조했다고 말할 순 없잖아요.”[각주:7] 살아 돌아왔다는 것을 죄책감으로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이들과 탈출하지 못한 희생자들의 유가족들(부모와 형제 자매들)은 그 어떤 진실도 밝혀지지 않은 세월호에서 아직 내리지 못했다. 416일에 멈춰버린 날짜를 살아가야 하는 이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희 유가족은 지금 세월호를 두 번 타고 있습니다.”[각주:8] 죽을 때까지, 아니 눈감아서도 가지고 가야 하는 고통을 예감하며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끌려 다니지는 않을 거예요. 이걸 끌고 살 것 같아요.”[각주:9] 내릴 수 없던 배에 다시 올라타야 했고 참사가 있던 날에서 멈춰버린 시간에 끌려 다니는 게 아니라 끌고 살겠다는 이들의 목소리는참사 이후의 구조 요청이다. 수동적인 능동성을 내장하고 있는 이 무릅쓴 구조 요청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앞질러 응답한 건 르포. 구조 요청의 자리로 가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기록하며 지키고 있었다. 그들의 곁에 머물며 비명으로 좌초되는 목소리를 지금까지도 들어올리고 있다. 필사적으로 지켜내고 있는 그 곁으로 가야 한다. 

 

 

 

5. 대피소를 짓는 글쓰기

 

 

르포 작가 김순천은 나는 왜 르포문학을 하는가라는 글에서 자신의 글쓰기 시작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의 비명과 사람들의 비명을 위로하고 함께 하기 위한 원초적 형태의 글쓰기의 시작이었다. 처음부터 르포문학을 하기 위해 현실로 뛰어든 게 아니라 현실로 뛰어들어 글 작업을 하다 보니 그것이 르포문학이 되었다. 어쩌면 나에게 르포문학은 모든 것이 무너지고 끊어진 세상에서 기존의 글쓰기 어법으로는 설명해낼 수 없는 자리에서 존재하는 어떤 것인지도 모르겠다.”[각주:10] 나와 너의 비명을 위로하고 함께 한다는 것, 그건 르포가 긴급한 구조 요청에 서둘러 응답하는 글쓰기라는 것을 의미한다. 구조 요청에 대한 긴급한 응답은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이 흩어지지 않도록 옮겨 쓰는 일에 의해 성립한다. 지금 누군가가 듣지 않으면 이 목소리와 이 이야기가 사라질 수 있다는 긴급함으로 쓰는 일, ‘여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일, 그렇게 곁을 지키는 일, 줄여 말해 문제를 함께 살아내는 일. 그러기 위해선 쓴다는 행위의 자의식을 내려놓고 우선 타인의 목소리가 기거할 수 있는 장소를 구축해야 한다. 이것이 르포에 무엇을 쓸 것인가보다 누구의 이야기를 들을 것인가라는 물음이 앞서 있는 이유다.

 

 

완성된 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 쓰이는 것, 동시대적 세계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르포를 김순천은 순간문학이라고 명명한다.[각주:11] 이때의 순간문학은 동시대-현장성을 염두에 둔 말이겠지만 그 속엔 더 유연하면서 즉흥적이고, 평등주의적이고 위계적이지 않으며, 모든 구성원이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기여할 여지가 많은 형태’(레베카 솔닛, 458)가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거리를 두고 사후적으로 현상을 진단하는 것이 아니라 곁에서 현장의 목소리가 바스러지지 않도록 붙들어두는 데 애를 쓰는 르포는 영구적이라기보단 임시적이고 고정적이기보단 유동적이다. 르포는 긴급히 세워지는 텐트나 끝까지 내몰린 이가 오르는 망루를 닮아 있다. 언제라도 철거될 수 있는 이 위태로운 조건 속에서 지금 씌어지고 있는 르포는 누구라도 기거할 수 있는 대피소가 되고자 하는 희망을 품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대피소shelter라기보단 asylum에 가까운데, 사회적 구속이나 제한에서 일시적으로나마 해방될 수 있는 곳이자 속박과 핍박을 받는 이들의 회복을 돕는 윤리적인 의의를 가진 정치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대피소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을 때, 사태가 이미 벌어진 뒤에 사후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곳이 아니라, 선택의 자유가 허용된 상태에서 구축되어야 한다. 그런 이유로 대피소는 재난과 참사의 표지만이 아니라 바깥으로 내몰릴 수 있는 존재들을 상상하고 예감할 수 있는 공동체의 감응능력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개별자들을 고립시켜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만드는 폭력에 맞서 바스러져가는 이야기를 듣는 것, 구조 요청에 응답하는 것은 이곳에 함께 대피소는 짓는 일과 다르지 않다.

 

 

_《문학들》 44호, 2016년 여름호에 기고

 

 

 

 

 

 

  1. 1. 도미야마 이치로, 손지연 외 옮김, <<폭력의 예감>>, 그린비, 2009. [본문으로]
  2. 2. 미류, 「슬플 수만은 없는 연대기」, 416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금요일엔 돌아오렴>>, 창비, 2015, 343쪽. [본문으로]
  3. 3. 주디스 버틀러, 양효실 옮김, <<윤리적 폭력 비판-자기 자신을 설명하기>>, 인간사랑, 2013 [본문으로]
  4. 4. 오준호, <<세월호를 기록하다>>, 이지북스, 2015, 105~106쪽. [본문으로]
  5. 5. 조태준[구술], 배경내[기록], 「이 형아가 너 살릴게」, 416 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다시 봄이 올 거예요>>, 창비, 2016, 79쪽. [본문으로]
  6. 6. 레베카 솔닛, 정해영 옮김, <<이 폐허를 응시하라>>, 펜타그램, 2012. [본문으로]
  7. 7. 장애진[구술], 이호연[기록], 「제 일이지 않아요?」, <<다시 봄이 올 거예요>>, 243쪽. [본문으로]
  8. 8. 문종택[구술], 김순천[기록], 「대통령과의 5분간의 통화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긴 고통」, 416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금요일엔 돌아오렴>>, 창비, 2015, 187쪽. [본문으로]
  9. 9. 박예나[구술], 미류[기록], 「남아 있는 사람들이 없어요」, <<다시 봄이 올 거예요>>, 220쪽. [본문으로]
  10. 10. 김순천, 「나는 왜 르포문학을 하는가」, <<실천문학>> 108호, 2012년 겨울호, 59쪽. [본문으로]
  11. 11. 이설야, 김순천 대담, 「한국 르포작가 대담」, <<작가들>> 54호, 2015년 가을호, 142쪽.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