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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말과 입맛-권여선론

by '작은숲' 2020. 7. 19.

 

 

 

    먹는다는 것(1) 

 

권여선의 소설은 불안정한 삶의 조건과 세상에 대한 불신 속에서 위태롭 흔들리는 인물들로 가득하다.[각주:1] 손쓸 없는 운명에 붙들린 그들의 집요하고 지독한 응시엔 지난 과오를 회억하는 성찰의 기미가 얹혀 있지만 언제나 그보다 도드라지는 자기혐오나 출처를 알기 어려운 타인을 향한 과잉된 증오심이다. 기억을 헤집으며 곳곳에서 증오의 단서들을 쌓아올리지만 거의 모든 인물들이 증발해버릴 같은 느낌에 휩싸이는 것은 좀처럼 식지 않는 뜨거운 정념 때문일 것이다. 초기부터 줄곧 그런 작품을 써온 권여선의 소설세계에서 『토우의 집』은 다소 이례적인 작품처럼 느껴진다. 삼악산 남쪽면을 복개해 산복도로를 만들면서 생겨난 동네인 삼악동이 삼벌레고개로 불리는 이력을 차근차근 안내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명징하고 구체적인 삶의 실감으로 가득하다. 권여선의 다른 소설이 그렇듯 『토우의 집』 또한 기억을 이야기의 근간으로 삼고 있지만 회의하고 자책하며흔들리는 주체 전면에 내세우진 않는다. 사람의 기억이 아니라 어떤 집단의 전승된 기억을 딛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에 소설을 이루는 요소들은 흔들림 없이 견고하고 선명하다. 

 

윗동네와 아랫동네 사이의 형편의 낙차나 좁은 동네에서 부대끼며 사는 구성원들의 고만고만한 살림살이의 면면이 사실적으로 구현되어 있다 해도 권여선식의 생동감이 드러나는 아무래도 무언가를먹을때다. 무언가를 먹고 있는 인물은 그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와 무관하게 먹는 순간만큼은 생생하고 오롯하다. 사람살이의 생생함으로 가득한 『토우의 집』 에서 유독 생동감 넘치는 대목도 우물집에 이사온 새댁이 자신의 주인집 막내인은철 함께 어묵을 먹는 장면이다. 

 

 

우물집 대문 앞에는 커다란 은행나무와 돌멩이만 잔뜩 들어 있는 쓰는 우물이 있고, 앞집 수도와 뒷집 물통을 연결하는 파란 호스들이 틈에 걸쳐져 있고, 호스 중간의 새는 곳에 감아놓은 검정 테이프에서 가느다란 물줄기가 분사되어 골목길이 질척거렸다. 젖은 길을 일주일에 두어 번씩 해안가 출신의 여자가 뜨거운 오뎅이 담긴 들통을 들고 오뎅을 팔러 오곤 했다.

―『토우의 집』, 2223.

 

 

쓸모를 잃어버렸음에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는 우물과 집을 연결한 탓에 빨리 낡아버린 구멍난 호스가 걸쳐진 집들 사이로 오뎅 장수가 걸어들어온다. 새댁이 아이에게 오뎅 하나를 반씩 나눠서 주고 자신은 온전히 개의 오뎅을 먹곤지금껏 먹어본 오뎅 중에 제일 맛있다 , 낡고 오래되어 질척이던 골목길은 뜻밖의 솔직하고 천진한 감탄으로 인해 청량한 공간으로 전환된다. 그렇게 맛있으면 하나 먹으라는 오뎅 장수의 권유에 예전에 살던 방에서 구더기가 기어나왔다며, 겨우 이사온 집에서 커갈 애들을 생각하면 돈을 아껴야 하지 않겠냐며 야무지게 답하는 새댁의 모습은 어떤가. 생애 가장 맛있는 오뎅임에도 먹지 않겠다고 때의 새댁은 깍쟁이처럼 보이는 아니라 미래에 대한 건강한 확신으로 가득차 있어 당당한 기운에서 포만감이 느껴질 정도다. 재료를 속이지 않으니 반찬으로 조금 사라는 오뎅 장수의 권유엔 바깥에서 음식을 먹는 것이 지금과 같은 (어쩔 없이 먹는) ‘매식 아닌 (특별하게 나가서먹는) ‘외식이던 시절의 형편이 녹아 있기도 하다.[각주:2] 오뎅 개로 청량하고 충만한 국면으로 전환된 분위기 속에서 원이점심엔 먹냐 묻는다. 새댁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계란볶음밥하고 깍두기라고 말하자좋아요, 어머니”(24)라며 익숙한 원이 응답할 자리에 함께 있던 은철이 느꼈을 부러움을 충분히 짐작할 있다. 그건 간명하고도 세련된 정서에 대한 부러움일 텐데, 끼니의 메뉴를 묻고 답하는 친근한 모녀의 대화가 삼벌레고개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좋아요, 어머니라는 원의 자연스러운 대답은 계란볶음밥과 깍두기의 조합을 기억하는입맛’(혀의 기억) 점심 메뉴를 묻고 답하는, 당시엔 민주적이고 친밀한 모녀의 관계성을 보여주는입말’(말의 기억) 별개의 것이 아님을 환기한다. 계란볶음밥에 대해 조금 말해야겠다. 새댁은 계란을 번에 넣고 반씩 나눠서 넣는데, “눌은 놈도 있고 놈도 있어야 맛이 골고루”(76) 나기 때문이다. 새댁은 반구형 프라이팬이 풍뎅이처럼 새까맣게 반짝일 정도로 점심이면 비법 아닌 비법으로 자주 계란볶음 밥을 만들어왔다. 매번 먹는 계란 볶음밥인데도계란이 눌은 놈도 있고 덜된 놈도 있고 찔깃한 놈도 있고 보들한 놈도 있으니 맛나지?”라며 묻는 새댁과 어머니, 이건 찔깃한 놈이에요”(77)라고 답하는 원의 소박하지만 확고한 대화가 반복될 가족에게 계란볶음밥은화목하고 경쾌한 일상 환유가 된다.

 

한편 매일같이 모여 동네 소식을 공유하는 아낙들의 수다는 그들이 각자의 욕망을 충족하는 외엔 아무런 관심이 없는 탓에 동네 사람들에 대한 험담과 혐오 발화로 가득하고, 독재체제에 저항하기 위해 공모를 준비하는 새댁의 남편안덕규 일당(‘안바바와 다섯 명의 도둑’) 격발 직전의 총구처럼 위태롭기만 하다. 그러니계란볶음밥 안부를 묻지 않을 없다. 인혁당 사건으로 안덕규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애도조차 없는 폭력적인 조건 속에서 파괴되는 새댁만이 아니다. 정신이 거의 나가 버린 새댁을 대신해 안주인순분 원에게 계란볶음밥을 만들어주지만 그건 원이 지금까지 먹어왔던 것과는 다르다. ‘눌은 놈과 놈과 찔깃한 없는 계란볶음밥을 두고 항변하다 바깥으로 나간 원이굉음을 내고 터지는 수류탄”(275)처럼 우는 이유는 더이상 그와 같은 계란볶음밥을 먹을 없다는 사실이 회복할 없이 망가진 것들을 환기하기 때문이다. 새댁의 계란볶음밥이 사라진다는 원에겐화목하고 경쾌한 일상 붕괴를, 한쪽 다리를 절게 은철에겐억울하고 가혹하지만 바로잡을 없는 시련 의미한다. 원이 동생으로 삼은 인형말고는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는 실어증에 걸리게 되는 우연이 아니다. ‘() 사라지니 ‘() 사라지는 이런 정황은 권여선 소설에서먹는다는 소재 차원을 넘어 소설의 핵심에 육박해 있는 것임을 짐작케 한다.

 

 

 

음식의 고고학: 먹는다는 것(2)

 

무언가를 먹는 동안 그들은 혼자가 아니다. 어울려 먹는 것이 모든 행위의 목적이 없겠지만 먹는 행위가 의욕이든 말이든 발화점이 되는 분명해 보인다. 『토우의 집』에선 작은 것이라도 나눠 먹는 식문화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있는데, 특히 안덕규 무리는 흡사 먹기 위해 모이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골방에 틀어박혀 새댁이 내어주는 음식을 열심히 먹는다. 권여선 소설에서 먹는 것을 거부하거나 먹지 못하는 인물은 관계로부터 고립되어 있다고 봐도 좋다. 바꿔 말해 고립되어 있던 인물이 무언가를 먹기 시작한다는 관계성이 회복된다는 신호다. ‘입맛 찾는 과정에서 이력이 활성화되는 자연스럽다. 볶음밥 이야기를 조금 해야겠다. 계란볶음밥의 전사(前史) 「가을이 오면」의 김치볶음밥이었다. 제대로된 그릇 하나, 식용유나 기본 양념조차 없는 옥탑방의 문을 남자가 두드린다. 그는 두드러기와 히스테리 속에서 거의 먹지 않고 지내는로라에게 김치볶음밥을 만들어준 묻는다. “찔깃한 놈도 있고 아삭한 놈도 있으니까 맛있지?”(「가을이 오면」, 『분홍 리본의 시절』, 25) 비법은 김치를 한꺼번에 넣지 않는 . 계란볶음밥과 동일하다. 남자의 등장은 방문이 아닌 침입이라 여겨질 정도로 갑작스럽고 일방적이지만 김치볶음밥을 그릇에 각자 덜지 않고 냄비에 놓고 나눠 먹은 남자가 묻는 말에는 회복이 암시되어 있다. “그쪽은 좋아해? 이름은 어떻게 되고?”(26) 불쑥 내민 손과 같은 물음을 듣고 로라는햇배추로 끓인 된장국 떠올린다. 언젠가 어머니가 끓여주었던 가을 배춧국은순하고 깊고 구수하고 달큰한 ”(28)이면서 동시에 무책임하고 뻔뻔한 어머니에 대한맹렬한 증오를 솟구치게하는 애증의 음식이기도 하다.

 

권여선 소설에서 음식의 맛이란 혀에 남은 사적인 기억이 아니라 누군가가 먹여주고 누군가와 나누어 먹었던식역사 의미한다. 음식은 저마다가 맺어온 관계의 역사가 기록된 보고다. 그러니 맛에 대한 예민한 탐색은 관계 속에서 형성된 말을 복원하는 고고학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김치볶음밥(2007) 계란볶음밥(2014)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대수롭지 않은 소재의 변주처럼 보이지만 나는 김치볶음밥이 계란볶음밥으로 달라져야 했던 이유를 『레몬』(2019) 등장하는계란후라이 함께 탐색해보고 싶다. 비현실적일 만큼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던해언 비극적인 죽음으로 더이상먹지 않는상태가 되어 손쓸 없는 과거에 집착하는 동생 있다. 그녀는 언니의 마지막 목격자이자 유력한 살인 용의자인한만 찾아가 법이 중단한 심문을 이어가고자 한다. 법이 없다면 자신이라도 징벌을 내려야겠다는 . 살인자가 없다면 언니의 죽음은 자살이 되어버리기에 그의 불행을 비웃으며 저주를 퍼붓기도 한다. 언니의 마지막을 한만우의 기억을 통해서라도 재구성하려는 다언은 불구가 되어버린 그를 찾아가 언니가 죽은 그날에 대해 묻고 묻는다. 다섯번째로 그를 찾아갔을 한만우의 여동생선우 그녀를 막아서고 아무것도 없던 그녀는 잠깐 잠이 든다. 똑같은 이야기를 묻고 듣는 말고는 있는 없던 다언의 무력감과 피로감이 그녀를 졸게 만들었을 것이다. 잠에서 다언을 향해 선우가 묻는다.

 

 

우리는 지금 막요, 계란 부쳐 먹으려던 참인데.”

계란말이요?”

아니, 계란후라이요.”

여동생이 거실 쪽을 향해 오빠 먹을 거지, 하자 ,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하나는 반숙에 소금 뿌리고요, 하나는 완숙에 케첩 뿌려요. 우리는요, 맨날 그렇게 먹어요.”

나는 침을 삼켰다.

나도 먹어도 돼요?”

진짜요? 개요?”

나도 먹을래요.”

여동생이 웃더니 몸을 돌려 가스레인지 위에 프라이팬을 올리고 불을 켰다. 몸을 돌려 냉장고 손잡이를 잡으며 물었다.

그럼 먹는 것도 우리랑 똑같이 먹을 거예요?”

, 똑같이요.”

오케이, 그럼 똑같이!” 

―『레몬』, 132133쪽.

 

 

언니의 죽음이라는 애도 불능의 상태 속에서 갑작스레 등장하는계란후라이 깃발처럼 나부끼며 현재를 증명하고, 망망대해에 있는 부표처럼 오롯하며 조난자에게 도착한 신호처럼 반짝인다. 중단하는 방법을 찾을 없어 지독하게 반복하던 다언의 내러티브는 계란프라이에 의해 마침내 단절된다. 『레몬』에서 인물들이 거의 유일하게 무언가를 함께 먹는 에피소드엔 다언이 오래전에 상실해버린 음식을 나누어 먹을 때의 친밀성이 깃들어 있어, 섬처럼 고립되어 있던 다언에게 누군가와 다시금 이어질 있는 관계의 동아줄을 내려주는 듯하다. 소박하고 경쾌해서 천진하게 느껴지는하나는 반숙에 소금 뿌리고요, 하나는 완숙에 케첩 뿌려요. 우리는요, 맨날 그렇게 먹어요라는 말은 『토우의 집』의계란이 눌은 놈도 있고 놈도 있고 찔깃한 놈도 있고 보들한 놈도 있으니 맛나지?”라는 새댁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요, 맨날 그렇게 먹어요 함께 무언가를 오랫동안 먹어온 이력만큼 단단한 세상에 없다는 , 그것이야말로 상대에게 가장 자신 있게 내보일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어지는오케이, 그럼 똑같이!”라는 경쾌한 맞장구는 음식을 나눠 먹으며 다져온 소박하지만 견고한 친밀성의 세계로 당신 또한 들어와도 좋다는 초대장이다. ‘무서울 만큼 말라 있던’ ‘뭔가를 먹은 날은 견딜 없는 죄책감에 시달렸던다언이신기하게도 집에 들어온 뒤로는 자꾸만 침이 고이고 배가 고팠다”(138) , 가난하고 불우한 남매가 보낸 초대장이 다언에겐 구원과도 같음을 있다.

 

노란색의 연쇄로 이어져 있다고 해도 좋을 만큼 『레몬』은노란 리본 환기하는 장면으로 채워져 있다. 다언이 입고 있던 노란 스커트, 「레몬과자를 파는 베티 씨」라는 , 반숙된 계란노른자의 단면, 노란빛과 노란 천사의 복수, 복수의 주문처럼 중얼거리는 레몬이라는 , 다언이 한만우의 집을 찾아가는 길에 금니빨 금수저 삽니다라는 팻말, 함께 나누어 먹은 계란프라이와 참외, 참외를 씹어 먹으며 마셨던 맥주, 환한 6월의 저녁 사양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언젠가는 소설로 쓰고 싶었다던인혁당 사건 대한 이야기를 2014년에 집필했고, 그해는 ‘4·16 세월호 빼놓곤 설명되지 않는다. 『토우의 집』엔 독재자가 자행한 잔혹한 국가 폭력의 면면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진 않다. 소설은 권력자의 부당한 폭력을 생생하게 표현하기보다 폭력 앞에서 슬퍼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탓에 손쓸 없이 파괴되어가는 영혼의 모습을 그리는 집중한다. 광폭한 권력자의 얼굴 대신 어울려 음식을 나누어 먹었던 이웃의 누구보다 잔인한 뱉는 출처가 있음을 섬뜩하게 그려낼 , ‘무고한시민들이 세월호 유가족을 향해 내뱉은 갖은 혐오 표현을 떠올리지 않을 없다. 앞서 말했듯 원은 계란볶음밥을 상실하면서 말을 잃는다. 입맛과 입말이 이어져 있던 세계가 파괴된 것이다. 『레몬』을 가득 채우고 있는 선명한 노란색은 소설의 주제가 아닌 소설 성립의 조건이 되었음을 말하는 듯하다. 여기서 계란프라이는 비극의 상징이 아니라 회복과 구원의 환유다. 함께 먹었던 계란볶음밥을 더이상 먹을 없게 것은 잔혹한 국가 폭력이 파괴한 것이 가족만이 아니라 세상이 보살피고 지켜온 삶의 가치임을 가리킨다. 원형적인 기억을 환기하는 토속적이고 전통적인 음식과 달리 누구나 일상적으로 만들어 먹을 있는 계란프라이는 권여선 소설이 우리 모두의 곁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표지이기도 하다. 상처받은 영혼의 회복과 죄로 덮여 있는 세상의 구원 가능성이 다언, 만우, 선우가 머리를 맞대고 나눠 먹는 계란프라이에 담겨 있다.

 

 

 

불확실한 세계에서 명멸하는 잠깐의 명료함: 먹는다는 것(3)

 

 

 

권여선 소설에서 음식은 잃어버린 장소를 찾는 필요한 지도 역할을 하거나 인물들을 안내하는 내비게이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남녀의 짧은 여행을 골자로 하는 「삼인행」(『안녕 주정뱅이』) 여정은 강박적일 만큼 무언가를 열심히 챙겨 먹는 기행(奇行)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랫동안 만나왔기에 더이상 손쓸 없는 관계의 복잡한 이력이 읽힌. 짧은 여행에서 이들이 강박적으로 음식을 챙겨 먹는 행위는 관계를 바로잡는다거나 관계에서 무엇도 희망할 수는 없다 해도 동행은 있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들이 먼길을 돌아 곳곳의 음식점을 거쳐간 이유는 기이한 식욕 때문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라도함께한다 감각을 더듬어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권여선 소설에서 먹는다는 함께 나눠 먹는다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니 말이다.

 

식욕을 잃는다는 삶의 좌표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반대로 잃어버린 맛을 되찾는다는 삶의 방향을 찾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푸르른 틈새』 에서 휴학을 하고 집에 틀어박혀헛구역질 하던 실직한 아버지가 함께 라면을 끓여먹는 장면을 다섯 페이지가 넘도록 공들여 묘사하는 것이 , 믿었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져 휴학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레가토』의정연에게권보살 매일같이 별식을 만들어주는 것은 인물이 놓여 있는 상이한 문맥에도 불구하고 음식을 먹는 것이 (관계성의) 회복이라는 가치와 연결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권여선 소설에서 음식은 저마다의 인물들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려주는 이정표라고 해도 좋다. 타인과의 관계 맺기를 최소화한 홀로 지내는 인물들에게맛이란 말은 빈칸 같은 단어”(「당신은 손에 잡힐 듯」, 『내 정원의 붉은 열매』, 131) 가깝다. 식욕이 없는 인물들은 대개 사람을 만나지 않고 폐쇄적인 생활양식을 고수한다.[각주:3] 후일담 형식을 취하고 있는 소설에선 토속적인 가정식이 원형적인 기억을 희구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특히 향과 맛이 강한 젓갈이나 삭힌 음식은 세계가 분리되지 않던 시절의 육친성을 강하게 환기한다. 연인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음식이 없을 없다. 대개는제육볶음과 해물볶음 반반’(「사랑을 믿다」, 『내 정원의 붉은 열매』) 같은 술안주 종류이지만 구운 굴비와 녹차밥(「층」, 『안녕 주정뱅이』)처럼 능숙한 기술이나 사려깊은 손길이 배어 있어 대체 불가능한 것도 있고, 별것 아닌 조합(훈제 족발과 새우젓)에서천상의 ’(『푸르른 틈새』) 경험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뿌연 기억 속을 정처 없이 걸으며 현재를 망각하곤 하는 권여선 소설의 인물들은 무언가를 먹을 때 만큼은 현재에 집중하고 눈앞의 현실에 충실하다. 그들이 누군가와 무언가를 먹고 있을 세상은 보다 명료해진다.

 

엄마와 언니로부터 버림받았지만 혹여나 그들이 돌아오지 않을까 기다리며, 그들이 남기고 빚을 갚기 위해 오늘도 전전긍긍하며 동분서주하는한 사람이 있다.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은 경험 때문에 좀처럼 사람을 사귀지 못하고 자신을 돌보지도 못하는소희’. 자학하거나 타인에 대해 끓어오르는 증오심에 속수무책인 소희에게 휴대전화 매장은 눈치보지 않고 오랫동안 머무를 있는 대피소 같은 곳이다. 건물에선사탕 한줌을 주머니에 넣고 까먹으며 인터넷을 수도 있고 커피믹스를 마시며 텔레비전도 있는 안락한 패턴을 구축하는 가능하다. 그러다 소희는 자신보다 먼저 그곳을 터전 삼아 지내온 듯한전문가할머니를 발견한다. 당연히 할머니도 소희의 사정을 금세 알아챈다.

 

 

손이 그래?

다쳤어요.

조심해야지.

.

 

껌을 씹으며 소희는 여행 잡지를 보고 할머니는 병풍 모양의 경전을 본다. 소희가 고개를 들자 할머니도 고개를 들었다. 소희가 희미하게 웃자 할머니의 얼굴 주름도 조금 옆으로 움직였다. 저건 할머니가 웃는 거다. 대화가 된다 매가리가 없다 무나아안하다 생각이 없다, 그런 말대신 조심해야지, 하고 말해준 사람이 웃는 . 고개를 들자 이번에는 할머니가 씹는 박자에 맞춰 고개를 까딱거리고 있다. 소희는 할머니가 없는데, 없는 할머니와 마주앉아 기차를 타고 가는 같다. 이백 칠십오 손님 창구로 오십시오, 이백칠십육 손님 창구로 오십시오, 하는 소리도 도착할 이름을 알려주는 방송 같다. 문득 소희는 새처럼 목을 빼고 어디까지 왔나 확인하듯 창밖의 거리를 내려다 본다. 할머니가 아흐 어하 소리를 내며 하품을 한다. 그건 아직 멀었다, 소희야, 하는 같다

―『문학과사회』 2017년 봄호, 「손톱」, 91쪽.

 

 

 

비슷한 처지처럼 보이는 사람은 서로의 형편을 비교해 상대적 우위를 점쳐보거나 타인의 불우한 모습에서 자신의 미래나 과거를 확인하는 폐쇄적인 상상을 하지 않는다. 어디로도 없어 휴대전화 매장을 대피소 삼아 쉬고 있는 이들에게 그곳은 잠시나마 어딘가로 떠나는 열차가 되기도 한다. 번도 만난 없지만 마치 같은 부족인 단박에 서로를 알아본 이들이 그곳에서 공유하는 서로에 대한 염려와이다. 토속적이고 전통적인 음식에 깃들어 있는 원형적인 기억이나 육친성의 경험에 기대지않고, 연고가 없는 사람이 껌을 씹으며 공유하는 잠깐의 명료함이 권여선 소설이 이후에 도착하게 역의 이름을 비추고 있는 듯하다.

 

 

 

 

토한다는 것

 

서른 살의 , 년간 살았던 자취방을 떠나기 위해 이사를 준비하는 며칠의 시간을미옥 대학 시절을 기억하는 집중한다. 기억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나의 대학생활은 그날의 구토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있다.”(『푸르른 틈새』, 27) 권여선의 소설이 야말로구토없이 설명할 없고 시작되지도 않는다. 인용한 문장은 대학 입학 미옥이 소주를 마시고 처음 토한 날을 가리키지만 한편으로는아야 이유들이 싸워야 하는 이유”(『레가토』, 324)였던 시대를 거쳐온 세대의 풍경을 능히 짐작할 있게 한다. 자신을 이해하기도 전에 앞질러 세상을 향해 투신해야 했던 이들의구토 방황하는 청춘의 통과제의 처럼 보이지만 폭압적인 세상에서 파괴되는 존재의 상처를 가리키는 것이 기도 하다. 토한다는 먹었던 음식을 게워내는 생리적 반응만을 뜻하지 않는다. 급히 삼키긴 했지만 몸이 감당할 없는 것이 있다. 『푸르른 틈새』 『레가토』에서처럼 대의와 조직 논리로 점철된 시대 분위기 속에서 보이지 않는 폭력에 상처받는 영혼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대의에 의한 폭력은 아니지만 『토우의 집』에서 순수하고 맑은 영혼이었던 원이 반복해서 토하는 장면은 일상 속에 잠복해 있던 보이지 않는 폭력이 어떻게 어린 영혼을 파괴하는지 말하고 있는 듯하다. 권여선 소설 속에서 구토는 대개 불가항력적인 힘에 무력하게 굴복하여 쓰러지는 몸의 형상을 취하는 보이지만 그 쓰러짐 속에선 안으로 들어온 무언가를 바깥으로 밀어내는 의지의 또한 발현되고 있음을 놓쳐서는 된다. 여기서 구토는 감당할 없는 것에 대한 굴복이 아니라 힘을 다해 의사를 표명하는 적극적인 거부 행위에 가깝다.

 

앞에서 말했듯 권여선 소설에 나오는 음식엔 인물이 맺어온 관계의 이력이 기록되어 있다. 때문에 무엇을 먹어왔는지 살피는 일은 어떤 관계성이 존재에 스며 있는지 살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때 입은 맛을 기억하는 기관이 아니라 말을 기억하는 기관에 가깝다. ‘토한다는 부대낀다는 것이다. 소화할 수도 없고 온전히 뱉어낼 수도 없는 부대낌(affect)’ 조금 밀고 나가보자. 역사라는 소화기관이 있다. 역사의 위장 속에서 소화되지 않고 바깥으로 역류하는 개인도 있을 법하다. 기억되는 것을 거부하며 요동치는 존재 말이다. 역사의 일부분이 된다면 시민권을 할당받을 수 있겠지만 소화되기를 거부하는, 혹은 역사의 식도를 거슬러올라 역류하는 존재는 안에 머물 수도 없고 바깥으로 나가지도 못한 요동친다. 권여선 소설 속에 빈번히 등장하는 구토에서 나는 무엇보다 요동치는 , 소화되기를 거부하는 힘을 읽어내고 싶다. 그런데 요동치는 힘을 역사에 대항하는 문제적인 개인만이 독점할 있는 아니다. 주체의 의지와 무관하게 안을 찢고 바깥으로 나오려는 힘은 역사() 개인() 사이에서 발생하는 부대낌에서 연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디에서도 분명하게 말하고 있진 않지만 권여선 소설을 읽다보면 문제적인 개인이 역사의 위장을 헤집고 다닌 결과로서의 구토만이 아니라, 역사 내부에도 자신의 힘으로 저스스로를 찢으며 거슬러오르는 힘이 있음을, 의도와 목적을 망각한 비주체적인 힘에 의해 역사가 이끌리는 경우도 있음을 예감하게 된다.

 

관계라는 지평 위에서 구토에 대해 조금 명료하게 이야기한 장을 마무리하자. 권여선 소설에서토하고 싶은 것을 가만히 참는 눈빛”(「수업시대」, 『처녀치마』, 162) 가진 인물을 만나는 어려운 일이 아니. 어떤 이를 만난 뒤에는 토사곽란에 시달리는가 하면 반대로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결코 토하는 일이 없는 경우도 있다.[각주:4]  『토우의 집』의 내내 토하는 원의 곁에서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쉽게 먹어치워왔던 것들이 무엇이 었는지 헤아리게 된다. 소설의 결말에 다다르면 원의 구토는 잦아들지만 원은 더이상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는다. 아마 앞으로도 말을 하지 않고 최소한의 음식만을 섭취할 것이다. 음식을 나눠 먹던 입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폄훼하고 구경거리로 소비하는 혐오의 말이 삼악동에 퍼져 있다. 동네 사람들이 게걸스럽게 먹어치운 것들 때문에 원은 내내 토해야 했다. 상식, 정상, 보편을 주식(主食) 삼아 먹어치워왔던 우리의 곁에 상처받기 쉬운 여린 영혼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타인의 고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이 실은 뭔가를 먹는 , 소비하는 것은 아닐까 염려하며 권여선은 말한. 당신의 고통 속에서 나온 손이 우리의 목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당신의 것과 비슷하지만 자그만 , 당신의 새끼 비슷한 고통을 살그머니 끄집어낸다고.[각주:5] 입은 누군가의 고통을 먹어치워버리는 난폭한 기관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의 고통이 미끄러져 들어오는 기관이 되기도 한다. 입이 고통이 교통할 있는 통로가 내내 품어왔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안의 타인의 고통에 의해 이끌려 나오기도 한다. 게워냄의 글쓰기, 혹은 부대낌의 글쓰기라는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는 소설이 있음을 권여선의 작품을 읽으면서 알게 된다.

 

 

 

응시한다는 것: 단식광대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토해낼 없는 것이 있다. 소화되지(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것들. 가끔 치밀어오르지만 바깥으로 뱉어낼 수는 없는 응어리진 것들 말이다. 권여선 소설의 많은 인물은 조용히 앉아 기억 하는 몰두한다.[각주:6] 손쓸 없이 지나버린 시간을 기억하는 종일 집중 하는 인물이 작품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잠자코 앉아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들여다보고 있다고 해서 행위를 서둘러 성찰적인 것이라 간주해선 된다. 이들이 참회나 반성을 하기보단 과거에 과잉 몰두함으로써 현재를 탕진하는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를 탕진하는 이 과도한 기억하기는 지나간 것을 손쉽게이해해버리려는 관성적인 삶의 양식을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다. 과거에 모르고 행했던 아둔함을 반성함으로써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외려 현재를 중단시켜버리려는 과도한 몰두에서 시위나 투쟁의 기운이 전해질 정도다. 잠자코 앉아서 과거를 응시하는 인물의 모습은 먹은 것을 게워내는 단계를 지나, 이미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려 분리하기가 어려운 타자와 대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응시가, 중단이, 이해를 거부하는 시위가단식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도 그녀의 시간을 강제로 구획하거나 갑작스럽게 중단시킬 수없었다. 자기 앞에 년의 시간이 안개 평원처럼 드넓게 펼쳐져 있다는 실감한 뒤부터 그녀는 오로지 과거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녀는 멍하니 앉아 오래전 일들을 떠올리곤 했다. 아니, 오래전 일들이 아무때나 불쑥불쑥 떠오르곤 했다. 그녀는 시간 가는 모르고 과거에 깊이 몰입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몽유에서 깨어나듯 현실로 돌아오곤 했는데, 그럴 때면 몹시 화가 났고 없는 원한에 사로잡혔다

「이 모」, 『안녕 주정뱅이, 89쪽.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난 시간을 가만히 응시하는 모든 시간을 할애 하는 인물의 행위는 그렇게 함으로써 현재를 지워버린다. 어쩔 없이 과거에 붙들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응시엔 무언가를 지켜내기 위한 필사 적인 안간힘이 깃들어 있다. 가족으로부터 인생을 강탈당한 여성이 그들과 절연한 오직 자신을 위해 전체를 집중하는 장면은 그이가 췌장암 말기의 시한부여서가 아니라 쓸쓸하고, 안타깝고, 때론 섬뜩하지만, 드물고 귀하게 느껴진다. 끝내 과거의 자신과 화해하지 않고 기억하기를 지속함으로써 온전히에게 충실할 있었던 삶이 응시 속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차라리 그때의 완전히 수동적인 무기력 상태가 편하고 안전했다는 생각도 든다. 그때 나는 오직 언니에 대해서만 생각했고, 세상에 그보다 절박한 일은 없다는 언니와 관련된 희미한 기억 하나를 떠올리기 위해 며칠을 거기에 붙들려 있곤 했다

『레몬』, 73쪽.

 

 

『레몬』 또한 자신의 삶을 포기한 언니의 죽음에 붙들려 있는 다언의 집요한 응시가 가까스로 붙든 구원 가능성의 기미를 우리에게 전한다. 현재 라는 시간을 거부하고 무용해 보이는 행위를 지속하면서 온전히 자신에게 몰두하는 권여선의 소설 인물은 프란츠 카프카의 「단식광대」를 떠올리게 한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지만 먹기라는 제도화된 삶의 양식을 끝까지 거부하며 굶기를 선택하는 광대(예술가)처럼 권여선 소설 인물들의 기억하기를 결코 이길 없는 자아의 열세 속에서도 세속의 논리에 대항해 어떻게든 대등해지고자 하는 고투로 읽을 있다. 권여선 소설에서 응시한 다는 것은 단식이 그러하듯고요하게 가만히 있는 것이라 해도 존재의 규정성을 벗어나기 위한 사나운 움직임[각주:7] 가깝다.

 

 

 

 

 

 

 

〔과거란인용자〕 무서운 타자이고 이방인입니다. 과거는 말입니다, 어떻게 해도 수정이 되는 끔찍한 오탈자, 씻을 없는 얼룩, 아무리 발버둥쳐도 제거할 없는 요지부동의 이물질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기억이 그렇게 엄청난 융통성을 발휘하도록 진화했는지 모릅니다. 부동의 과거를 조금이라도 유동적이게 만들 있도록, 육중한 과거를 흔들바위처럼 이리저리 기우뚱기우뚱 흔들 있도록, 이것과 저것을 뒤섞거나 숨기거나 심지어 무화시킬 있도록, 그렇게 우리의 기억은 정확성과는 어긋난 방향으로, 그렇다고 완전한 부정확성은 아닌 방향으로 기괴하게 진화해온 것일 있어요.” 

「역광」, 『안녕 주정뱅이』, 168~169쪽.

 

 

자신을 찢고 자기 밖으로 나오는 , 자신을 역류하는 , 내뱉고 나서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과의 부대낌. 권여선 소설 인물들의 자기부정과 타인에 대한 증오심을 증폭시키는 탓에 폐쇄적인 자기회로 안에 침잠할 있는 위험이 적지 않다 해도 자기 욕망에 충실한 자아의 변덕과는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집요한 응시를 신뢰할 수밖에 없다.

 

 

 

부른다는 것: 느닷없이 나타나는 존재의 이름

 

모든 딱딱한 것이 녹아 없어지는 역사라는 소화기관에서 끝내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건 사람의입말이다. 권여선 소설에서 개인의 좌절된 욕망이 언어로 육화되어 돌출하는 방식으로 등장하곤 하는 입말은 각자가 가진 고유한 멜로디처럼 소설 전체를 주관하는 경우도 있고 말장난과 같은 형식으로 느닷없이 나타나기도 한다. 입말은 소화되지 않고 게워낼 수도 없으며 존재의 의지와 무관하게 존재에게 들러붙어 자신을 드러낸다. 표준과 보편이 주관하는 말의 위계에서 입말은 최말단에 자리하고 있지만 권여선 소설에서 입말이 가지는 힘은 언제나 독보적이다.

 

 

할망구라고도 부르고만우절이라고도 불렀지만 그의 가장 빛나는 별명은 「한오백년」에서 왔다. 노래의 1절은 한만우로 시작한다는 게 친구들의 생각이었다. 하안만우우우 세사아앙 야속하안 임아, 하는 식으로. 발음만 애매하게 처리하면 완벽했다. 별명의 호소력이 너무 강렬해서 만우절이나 할망구는 점점 도태되고 그를 부를 때면 다들 하안만우우우 하며 명창이 푸는 소리를 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나는 그의 존재를 몰랐다. 그는 3이었고 나는 1이었으니. 그럼에도 기억을 되짚어보면 학교 복도 어디쯤에서 그의 이름을 불러대는 애절하고 우스꽝스러운 노랫소리를 가끔 들은 적이 있다

『레몬』, 11쪽.

 

 

가난한 집의 아들이어서 가장 역할을 도맡아야 했던 한만우는 소녀에 대한 소박한 마음을 간직한 탓에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어 평생을 불행하게 살다 이른 나이에 암으로 생을 마감한다. 무엇을 해도 자연스럽지 못한 몸짓과 타인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어눌한 말투를 지녔지만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취조를 받는 와중에도 자신이 일하는 가게의 사장님을 염려하는 심성을 가지고 있다. 『레몬』은 다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는 탓에 한만우의 면면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아니다. 해언과 그이의 죽음을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의 불행한 사정이 각자의 목소리를 통해 비교적 명료하게 드러나는 것에 반해 한만우의 경우는 누군가가 알아봐주거나 이해해주지 않는다면 그가 감당해온 슬픔이 논의의 대상으로도 취급되지 않는 터라 그의 불행한 삶이 더욱 비극적으로 느껴진다. 다만 한만우는하안만우우우 세사아앙이라는 구슬프고 청승맞은 방식으로 모두가 그를 희화화해 부를 때만 잠시 드러날 뿐이다. 권여선은 『레몬』에서 한만우를 부르면 부를수록 그를 조롱하게 되는 세속화된 입말의 잔혹한 구조를 반복해서 환기한다안타까워할수록 외려 모욕하고 조롱하게 되는 세속의 구조가 한만우를 부르는 사람들의 입말 속에 새겨져 있다. 특별한 의도 없이도 입에 쉽게 붙어버리는 입말의 속성은 사람살이 안에 야만적인 폭력성이 병균처럼 침투해 있어 만지면 만질수록 덧나는 비극적인 구조를 냉담하게 가리키고 있는 듯하다.

 

     

 

한때는 처가 식솔 모두를 먹여 살렸지만 실직한 뒤론 존재감이 옅어진 미옥의 아버지는 술이 들어가면 있거라! 유달산아아! 목포의 아가씨들 아아! 손수건이나마아 헌언덜어 다오오!”(『푸르른 틈새』, 162)라고 18 노래를 부르며이년들아! , 손재우! 죽었다구!’라는 주정을 반복한다미옥은 그것이 무력하기만 주정뱅이 아버지가 있는 가장 분명한 발화임을 알고 있다. 어떤 존재의 입말은 주정이나 발악에 가까운 발화로 나타나고 어떤 이의 입말은 누군가를 조롱하고 희화화하는 쓰이지만 무엇보다 입말은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멜로디가 있다”(「사랑을 믿다」, 78) 것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다. 권여선의 소설엔 존재의 서명 같은 입말뿐 아니라 말장난이나 연상작용처럼 느닷없이 출현하는 입말도 자주 등장 한다. 「삼인행」의 장면이다. ‘ 만종분기점을 지날 뜬금없이 박종철 열사가 생각난다는 말을 하며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인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났을 처음엔종철아, 종을 쳐라하는 분위기였다가 전두환이 맞불작전으로 김만철 일가의 귀순 사건을 터뜨리는 바람에만철 , 종을 그만 쳐라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만종이란 지명은 만철과 종철을 동시에 환기시키고, 만칠지 종칠지 오락가락하던 그때 시절을 생각나게 하고, 그러다보면 잡힌 박종철 열사의 영정사진이 오롯이 떠오른”(50) 것이다.

 

권여선의 소설을 읽다보면 계급적인 격차나 지적인 차이 때문에 말귀를 알아듣지 못해 본래의 뜻과 전혀 상관없는 단어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환기하는 장면과 자주 만나게 된다. 그런 어긋남은 관계의 격차가 입말 앞에서 선명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입말엔 무언가를 먹어온 입맛의 이력이 쟁여져 있어서 좀처럼 바꿀 수도 지울 수도 없다. 입맛과 입말엔 공통의 무언가를 나눈 이력이 새겨져 있지만, 때론 차이를 명료하게 만드는 문턱이 되기도 한다. 입맛과 입말은 계급적, 젠더적, 지역적 차이화의 산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말장난처럼 보이는 연상작용은 불청객처럼 갑작스레 일상에 침범하는 불행을 닮아 있다. 우연히 어떤 기억을 떠올리고 그때부터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기억에 몰두하는 인물들의 양상은 히스테리적인 증상이라기보단 입말이 가지는 힘에 의해 개개인의 삶이 예측할 없는 방식으로 정향된다는 것을 말한다. 입말의 예측 불가능함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인 존재의 무게가 돌이킬 없이 우리 삶을 뒤흔드는 것을 의미 한다. 「역광」의 장면이다. 보리밥에 짜고 맵게 졸인 강된장과 연한 줄기의 열무김치를 넣고 밥을 비벼 먹다가 문득 입이 짜서 오이로 입가심을 했는데, 그때 뜬금없이 입안에 온통 은은한 버터의 맛이 퍼진 경험을 두고유사와 인접이 협조하여 만들어낸 복합적 결과”(166)라고 말한. 예상치 못한 ()맛을 두고 유사성과 인접성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은 입맛과 입말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권여선 소설의 특징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언니의 죽음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해 오랫동안 정지된 삶을 살아야 했던 다언의 삶이 다시금 흐를 있게 것은 한만우의 죽음에 빚지고 있다. 다언은 한만우의 죽음을 경유함으로써 언니의 죽음을 애도할 수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불행하게 살다가 죽었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있는 최선을 다했던 한만우의 힘겨운 삶처럼 언니의 또한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완벽했던 미의 형식이 파괴된 아니라 생생한 삶의 내용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다언은 비로소 이해할 있게 것이다. 언니와 어떤 연결 고리도 찾기 어려운 한만우의 삶이, 그의 불행이, 그의 죽음이 정지되어 있던 다언의 삶을 흐를 있게 것이다.

 

 

『문학동네 100호, 2019년 여름호에 기고

 

 

 

 

 

 

 

 

 

 

  1. 이 글에서 다루는 권여선의 소설은 다음과 같다. 『푸르른 틈새』(살림, 1996), 『처녀치마』(이룸, 2004), 『분홍 리본의 시절』(창비, 2007), 『내 정원의 붉은 열매』(문학동네, 2010), 『레가토』 (창비, 2012), 『토우의 집』(자음과모음, 2014), 『안녕 주정뱅이』(창비, 2016), 「손톱」(『문학과사회』 2017년 봄호), 『레몬』(창비, 2019). 이하 본문에 쪽수만 밝히고 필요한 경우 작품명을 병기 하였다. [본문으로]
  2. “그때만 해도 남의 돈을 받고 음식을 파는 사람들은 적어도 보통 사람들보다는 요리 솜씨가 출중 했고 식재료도 대부분이 국산이어서 손님을 속이고 말고 할 게 없었기에, 돈이 없어 못 사 먹는 게한이었지 요즘처럼 피 같은 돈을 내고 매식을 한 뒤 쓰레기를 먹었구나 싶은 생각에 화가 치밀거나 식당을 나오면서 주인의 파렴치한 얼굴을 새삼 쏘아보게 되는 일은 드물었다.”(권여선, 『오늘 뭐 먹지?』, 한겨레출판사, 2018, 136쪽) 이 책은 경우에 따라서 음식문헌학 혹은 음식사회학 등의 관점 에서 다양한 독해가 가능한 음식 산문집이다. [본문으로]
  3. 비교적 근작인 「이모」(『안녕 주정뱅이』)의 경우엔 사정이 조금 다르다. 평생을 가족을 위해 살아온 한 여인이 가족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한 채 남은 생을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삶에서 ‘요리’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요리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정성을 다하는 것이기 때문 이다. 정성을 다해 일인분의 요리를 만들며 충만한 삶을 감각하는 「이모」는 권여선 소설의 변모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라는 점에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본문으로]
  4. “신기한 인물을 초청해 식탁의 한 자리를 내주는 기쁨을 만끽하듯, 한영은 천하일품이란 고전적 인물을 끌어들여 나와 합석시키기를 좋아했고 나는 번번이 순진하게 그 인물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신비한 인물과 합석한 날은 절대로 토하는 일이 없었다.”(『푸르른 틈새』, 202쪽); “나는 한영을, 휴가를 나오면 나를 잠시도 무릎에서 내려놓지 않고 내 옆에 꼭 붙어서 나를 토하지 않게 해주고 나를 귀애해주고 내 입에 맛있는 반찬을 넣어주고 내가 머리를 기를 수 있도록 해주던, 옛날 옛적의 아버지로 여겼다.”(같은 책, 215쪽) [본문으로]
  5. 권여선, ‘작가의 말’, 『토우의 집』, 334쪽. [본문으로]
  6. “기억은 깔끔한 청소를 해주는 대신 지저분한 죄의식이나 강박을 낳고, 그게 현재로 계속 침투해 들어와 현재를 교란하고, 그렇게 과거의 습격과 현재의 진압의 불완전한 반복이 제 소설의 테마였던거 같아요.”(권여선·심진경 대담, 「권여선과 함께 ‘레가토’를」, 『창작과비평』 2012년 여름호, 364 쪽) [본문으로]
  7. 윤여일, 『광장이 되는 시간』, 포도밭출판사, 2019, 211쪽.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