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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어느 부족의 이사

by 종업원 2018. 1. 12.

2017. 12. 23



  오랜만에 들른 본가 옥상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기이할 정도로 변함없었지만 저 멀리 보이는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가 곧 폐교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986년 늦봄, 연산 7동 ‘고개만디’에서 또 다른 만디인 성북고개로 이사 왔을 때 아버지는 이라크에 있었고 어머니는 파출부부터 식당 주방일까지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일용직 노동자였다. 먼 이국 땅에서 아버지가 보내온 ‘딸라’에 빚을 더해 생애 처음으로 ‘내 집’을 장만한 어머니는 하루에 ‘세 탕’까지 뛰고도 고스톱을 치러 다닐 만큼 삶의 의욕으로 넘쳤다. 이농한 도시 빈민 출신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내 부모 역시 부자가 되지 못했다. 다만 육체 노동의 세월 속에서 유일한 재산이었던 ‘몸뚱이’가 빠르게 마모되어 두 사람 모두 나란히 병을 얻게 되었을 뿐이다. 가난은 사람을 자꾸만 벼랑으로 내몬다. 가난이라는 습관은 나아진 형편 속에서도 벼랑 주변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 떠날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만든다. 내 부모는 그렇게 성북고개에서 30년을 넘게 살았다. 다행히 우리는 그곳에서 튼튼하게 자랐지만 벼랑까지 내몰려 한발짝도 더 물러설 수 없었던 내 부모의 악다구니는 더욱 매서워져만 갔다. 여느 주말과 다름없이 고스톱판이 열렸던 문민정부 시절의 어느 토요일, ‘고무 다라이’에 생선을 가득 이고 현관문 앞까지 올라온 할머니가 있었다. 그날의 풍경이 잊히지 않는 것은 썩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지독했던 생선 비린내 때문이 아니라 그 생선 장수 할머니에게 내 어머니가 아까워서 쓰지 않았던 찻잔을 꺼내 커피를 대접했던 기억 때문이었다. 가난이 흔했던 그 시절엔 선한 사람들도 가난만큼 흔했다. 사소한 잘못에도 가차 없이 손찌검을 했던 내 부모에 대한 기억이 아리고 애틋한 건 가난한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내내 선하고 부지런했던 품성 때문일 것이다.


  변함없을 것 같았던 옥상 위에서 바라본 동네 풍경에 어울리지 않는 빌라가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골리앗 크레인까지 등장한 건 작년 이맘 때쯤부터였다. 이 동네의 시간이 흐르지 않게 꽉 붙들고 있는 것만 같았던 낡은 좌천 아파트보다 크고 높은 아파트가 빠른 속도로 완공되어가면서 성북고개의 표정도 어느새 달라지고 있었다. 책장 아래에 방치되어 있던 낡은 가족 앨범을 정리하다가 아마도 지금의 내 나이 정도 되어보이는 젊었을 적 당신의 사진을 보시곤 ‘이 사람은 누구냐’며 내게 반문 하시는 어머니의 실명된 오른쪽 눈의 어둠을 나는 알지 못한다. 가족이 아니고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확연하게 달라진 어둡고 주름진 얼굴에서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옛 얼굴의 흔적을 애써 찾아보려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세월의 더께만이 선명할 뿐이다. 퇴행성 디스크나 뇌졸증은 완치가 불가능한 병이라는 것을 내 부모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표현처럼 ‘더러운 병’에 걸렸다고 해서 누워 있을 수만도 없다. 예전과 다른 몸을 끌고 ‘찌그덕’거리며 성북고개를 부지런히 오르내리는 동안 느꼈을 통증과 고통이 분진처럼 얼굴에 내려앉았을 것이다. 몸은 전보다 배로 느려졌지만 늙음은 곱절의 속도를 내며 주름의 협곡에서 가파르기만 하다. 늙음에도 가속력이 있다는 것 또한 내 부모의 얼굴을 통해 알게 된다. 당신의 얼굴조차 제대로 알아보지 못 할 정도로 가파르게 늙어버린 얼굴엔 차마 내가 알지 못하는 통증과 고통의 긴 세월이 낙인처럼 새겨져 있을 것이다. 나무의 나이테처럼 여러 겹의 흔적으로만 남겨져 있을 뿐인 그 문양을 나는 한 문장도 읽어낼 수가 없다. 그 난독증이 죄스럽고, 무섭고, 안타깝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자식을 키우고 살림을 꾸려나갔던 이들의 괄괄한 목소리, 호방한 웃음소리, 술 취해 내지르던 울분 섞인 고성. 그 부족의 언어를 우리는 미처 배우지 못했다. 그들이 곁에 있다고 해도 그 부족의 언어는 더 이상 배울 수 없다.


  31년 간 성북고개 시절을 끝내고 부산진역 근처의 작은 아파트로 이사하던 날, 내 부모에게 생소했던 건 아파트 생활이 아니라 고개만디가 아닌 평지에서의 생활이었을 것이다. 긴 세월을 보냈던 곳에서 이렇다 할 이별의 절차도 없이 집을 옮기게 되어 혹여나 서글픈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되어 조심스레 심경을 여쭤보니 내 아버지는 지하철역이 걸어서 2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아서 여간 편한 게 아니라며 흡사 아이 같은 미소를 머금고 말씀을 하신다. ‘편한 것’을 찾지 않고 살아온 단단한 생의 이력 앞에서 서글픔이나 이별의 애틋함과 같은 말랑한 정서 따위는 아무런 힘이 없다. 애지중지 하던 세간의 대부분을 버리고 온 어머니 또한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사백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마련했던 자개농은 26년을 썼으니 충분하고 냉장고와 세탁기 또한 쓸 만큼 썼으니 미련이 없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지난 날 이 높은 집에 무거운 자개농을 어떻게 운반했을지 상상이 가질 않는다. 더 쓰고 싶어도 옮길 수 있는 사람이 없어 가져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 한다. 혹여나 몇 십 만원이라도 받을 수 있을까 되팔 수 있는 방법을 수소문 해봤지만 운반비가 더 든다고 하니 버릴 수밖에 없다. 집안 곳곳엔 그간 버리지 않았을 뿐 버려야 했던 것들 투성이었다. 고장 나지 않았기에 차마 버릴 수 없었던 것들로부터 마침내 놓여나게 되었으니 얼마나 후련하셨을까.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선 아련한 추억처럼 보이는 것들도 가까이에서 보면 영락없는 짐이다. 이사를 일러 ‘의사(疑似) 죽음 체험’이라고 하지만 내 부모에게 만큼은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드문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일찌감치 부모 등에서 내려와 독립한(그러나 내 이모의 표현으론 병든 부모로부터 도망쳐 나온) 내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이라곤 그동안 짊어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을 수 있게 돕는 것 말고는 달리 없는 듯하다. 미련 없이, 부끄러움 없이 살아온 이름 없는 이 부족의 굽은 어깨와 허리, 어눌한 말과 이야기를 당당한 문양으로 새기는 일은 이제 그들의 몫만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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