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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도시락의 세계

by 종업원 2018. 2. 14.

2018. 2. 14




작년까지만 해도 손도 대지 않았던 ‘도시락’을 요즘은 가끔씩 먹는다. 매식은 거의 하지 않는 편이지만 원고 마감과 강좌 준비 때문에 근래는 대충 때우는 수준으로 끼니를 챙기다보니 오늘처럼 도서관에 올 경우엔 핑계 삼아 이것저것 먹어보게 된다. 오늘 저녁은 ‘한솥도시락’에서 제육치킨 도시락을 먹었다. 다대동 매장은 대체로 한산한 편이어서 책 한 권을 챙겨가서 느긋하게 먹는 편인데, 오늘에서야 ‘도시락의 세계’에 입회한 느낌이다. 직사각형의 스티로폼 용기 아랫쪽엔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밥의 영역과 그 주변을 다섯 개의 반찬이 호위하듯 에워싸고 있는데, 넘칠듯한 기운 속에서도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정확하게 나뉘어 담겨 있다. 모든 칸이 명징하여 하나도 허투루 담기지 않았다. 도시락이 구축하고 있는 엄밀함의 세계. 나는 한톨의 밥도, 조금의 반찬도 남김없이 첫술을 떴을 때와 같은 감흥을 유지하며 마지막 수저질 마쳤다.


제작년 가을에 일본 후쿠오카에 잠시 다녀올 일이 있었는데, 그때 쇼핑몰을 구경하다가 오만구천 엔이나 하는 도시락을 보고 잠시 감동했던 적이 있다. 높은 가격에 놀랐지만 ‘도시락’에 대한 역사와 전통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가격임을 금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땐 잠시 짐작조차 가지 않는 일본의 도시락 문화를 막연하게나마 헤아려보았을 뿐이다. 그리곤 곧장 한국의 도시락 문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편의점을 중심으로 소비되는 도시락은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계층이 구매하는 이른바 ‘흙밥’이라는 이미지가 겹쳐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얼마나 편협한 생각인가. 직사각형 안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는 또다른 사각형들을 들여다보면서 허투루 놓인 게 하나도 없음을 알게 된다. 허투루 놓인 게 없으니 허투루 볼 수도, 허투루 먹을 수도 없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분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자주 생각하게 된다. 내게도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시절이 있었고, 그땐 참으로 열심히 분투 했었지만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다. 어느 날 나는 잠에서 깨자마자 이제는 할 수 있는 것의 목록보다 할 수 없는 것의 목록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을, 시간이 흐를수록 그 비대칭한 기울기가 더욱 가팔라지리라는 것을 단박에 알게 되었다. 그건 아마도 이 세상을 주관하고 있는 엄밀한 원칙들에 대한 작은 두려움이자 큰 경외감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이었을 테다. 조금은 허술해보이는 사람의 느슨한 말속에도 엄연한 원칙이 있고 엄밀한 세계와 맞닿아 있다는 것. 엄연한 원칙과 엄밀함이 주관하고 있는 세계 속에서 오늘도 내 생활은 정처없이 부유한다. 


도시락을 깨끗이 비우고 읽던 페이지를 마저 읽으려고 했으나 고등학생 무리가 들이닥쳐 욕설과 말이 구분되지 않고, 고성인지 괴성인지 규정하기 어려운 무시무시한 소음을 내는 탓에 책을 덮고 잠시 메모를 했다. 그들이 내 옆자리에 앉은 터라 어울려 도시락을 먹는 모습을 짐짓 모른척 하고 보았는데, 아무도 서로의 도시락을 침범하지 않는다. 결코 나누어 먹지 않는다. 도시락의 엄밀함이란 실로 무시무시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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