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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글쓰기

살림살이의 글쓰기

by 종업원 2019. 7. 2.

 

냉장고에선 음식이 썩어간다. 다행이다. 음식 쓰레기를 모아둔 통을 이틀만 잊어도 그곳에 구더기가 꼬인다. 다행이다. 아무리 표백하려고 해도, 감추려 해도 기어코 드러나는 것이 생활의 이치다. 생활 속에 썩어가는 것이 보인다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표식에 가깝다. 아직 썩지 않았을 뿐인데 우리는 냉장고에 넣어두면 모든 것이 싱싱하게 유지된다고 쉽게 믿어버린다. 손쉬운 믿음을 심문하는 것이 냉장고에서 썩어가는 음식이다. 신경 쓰지 않으면, 돌보지 않으면 분명히 썩는다는 것을냉장고안에서라도 배울 있다면 다행이지 않은가. 음식물 쓰레기에 꼬인 구더기는 무너진 생활의 증표가 아니라 무언가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생활이 보내는 긴급한 신호다.  

 

겨우내 얼었던 얼음이 녹을 그곳은 진창이 된다. 얼음 위에 남아 있던 발자국과 흙먼지가 뒤섞이기 때문이다. 얼음이 녹는다는 꽃이 핀다는 신호인 것만은 아니다. 웅크리고 있던 몸을 펴고 아픈 몸에서 회복하는 몸으로 이행한다는 저절로 찾아오는 순리가 아니라 나빠질 수도 있다는 위험과 마주할 있는 의지를 가질 때만 가능한 행위다. 봄은 진창과 함께 오고 회복 또한 나빠질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할 때만 가능하다. 누구나 생활이 있지만 아무나 생활을 감각하는 아니다. 생활이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수신하기 위해선 생활 속에 있어야 한다. 생활 속에 머물기 위해선 생활의 면면과 마주해야 한다. 생활 속에서 썩어가는 것과 구더기가 기어가는 모습을 수락할 있을 생활로부터 배울 있고 생활을 존재의 버팀목으로 삼을 있다. 생활은 힘이 세다. 돌보지 않으면 결코 함께 없고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영영 것이 없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보살피지 않으면 썩는다는 명징한 논리는 글쓰기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글쓰기라는 말속엔글짓기라는 관습화된 습성이 남아 있다.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는 것보다 뭔가 그럴듯한 것을 만들내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강박과 압박 속에서 모두가 글을 쓴다. 생활의 문법에 비춰보면 글쓰기가 명징해진다. 가꾸고 보살핀다는 그럴 듯하게 꾸며내는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고 모습을 수락하는 것이다. 그럴듯한 문장으론 생활을 보살필 없다. 표백된 문장은 썩지 않는다. 무언가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강렬한 표식인 구더기 따위는 근처에 수도 없다. 포토제닉한 글쓰기, 희망적이고 교훈을 주는 글쓰기, 훈훈한 내용과 미담이 넘치는 글쓰기를 무턱대고 나쁘다고 수만은 없다. 그러나 결코 썩지 않는 글쓰기, 표백된 글쓰기엔 생활이 빠져 있다. 마주하며 버텨내고, 부대낌 속에서 보살핀 각자의 이력이 지워져 있다. 대신 세상의 주인이 되어 우주가 돕는 같은 착각 속에서 막연한 성취감에 도취될 뿐이다. 추상적인 목표와 동기부여의 에너지로만 가득하다. 구체적인 생활을 지우면 마음껏 추상적으로 비약할 있기 때문이다.

 

생활이 도대체 무어냐고, 모든 것들이 생활이 아니냐고 힐난 섞인 하소연을 하고 싶어질 수도 있겠다. 이렇게 접근해보는 어떨까. 생활이란 살림살이의 목록과 다르지 않다고. 카페에 들어섰을 우리는 쾌적한 인테리어와 마주할 살림살이를 감각할 수는 없다. 살리고 보살핀 이력이 쟁여져 있는 곳이 생활이라는 장소다. 그러니 이런 연쇄를 통한 확장도 가능하다. 관계의 살림살이, 생각의 살림살이, 희망의 살림살이, 나아가 세상의 살림살이. 몸을 움직여 쓸고 닦는 행위와 관계 속에서 부대끼며 어울린 경험이살림이라면 그곳엔 애닳음과 애끓음의 시간도 스며 있을 것이다. 아무리 애써도 되는 것들, 그럼에도 오늘 조금 애써보는 수행성이 살림살이의 목록을 조형한다. 그런 이력이 족쇄나 벗어날 없는 수렁처럼, 때론 얼른 벗어나고 싶은 지옥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생활을  돌본다는 아무리 애써도 쉽게 썩어버리는 , 언제라도 무너질 있는 것을 수락하며 함께 살아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모임을 꾸린다는 것은 서로의 살림살이를 나누는 것이기도 하다. 갖은 프로젝트가 살림살이를 대체해버려 이제는 모두가 부대낌 없이 매끄럽게, 상처 받지 않고도 만난다. 언제라도 지울 있고, 돌이킬 있다. 차단 하기를 통해 눈앞에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관계를 맺는 것이친추팔로워처럼 더하기의 연쇄를 떠올리기 쉽지만 어울림이란 많은 것을 선택할 있는 기회의 확장이 아니라 선택의 강도를 최고도로 유지하는 것에 가깝다. 말하자면가위바위보같은 말이다. 살림살이의 현명함은 많은 선택지를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선택지를 기꺼이 수락하는 힘으로부터 나온다. 가위. 바위. . 누구도 가지(제한된) 선택지를 벗어날 없다.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나이가 많은 사람이든 적은 사람이든 가위를 내거나 바위를 내거나 보를 낸다. 그리고 결과를 수락하고 다음을 함께 기다린다. 대단히 새로운 방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뻔함 수락하는 , 고만고만해 보이는 결과를 수용하고 밀고 나갈 마주하게 되는 예측불가능한 힘들이 있다. 평범함 속에 깃들어 있는 비범함이 출현하는 곳은 보살피고 부대낀 이력으로 조형한 생활이라는 장소다. 그곳을 지켜내는 힘은 살림살이에서 온다.

 

▶ 고치 '나비학당' 글쓰기 수업 별강문_2019. 5. 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