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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글쓰기

커다란 테이블에 그어진 선분

by 종업원 2019. 5. 29.



단단한 과일을 좋아하는 이유. 콩알정도의 작은 알맹이가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고 단단하게 커진 것도 신기하지만 그 속을 달콤한 과육으로 빈틈없이 가득 채웠다는 게 언제나 경이롭다. 부드러운 과일은 종종 꽃처럼 생각될 때가 있지만 사과나 배와 같은 단단한 과일을 베어물 때면 마지막 한입까지 흐트러짐 없는 단단함이 주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산뜻한 기분에 젖기도 한다. 단단한 과일을 쥐면 이 세상이 내게 허락한 작은 선물이 지금 내 손에 도착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 이 시간에도 단단한 과일은 오늘 몫의 단단함과 달콤함으로 충만하리라는 예감 속에서 무디고 느슨한 나의 하루를 매만져본다. 


  공간이 장소가 되어가는 시간성을 체감하는 자리. 그건 단단한 과일을 식료품 코너가 아니라 한 그루의 나무를 통해 매일매일 들여다보는 시간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살림살이처럼 공간 또한 애써 매만지지 않으면, 쓸고 닦지 않으면, 사람이 들고 나지 않으면 언제라도 폐허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봄밤에 피는 꽃을 일러 ‘식물이 동물로 도약’하는 순간이라 노래했던 시인도 있지만 공간을 쓸고 닦아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매일매일의 작은 노동이야말로 장소가 탄생하는 현장이지 않을까 한다. 공간에서 장소로의 이행은 더디게 진행되기에 그 변화를 알아채는 이는 거의 없다. 그런 이유로 모두가 기꺼이 각자의 손과 발을 보태지만 누구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공유지(the commons)가 이 세상 한켠에 있을 수 있다.  


누군가가 매만지는 살림살이가 공간을 채워가는동안 그곳은 의도 없이 장소가 되어간다. ‘회복하는 생활’ 한켠에 놓여 있는 커다란 테이블은 공히 그곳의 살림살이라고 할만하다. 공간의 한쪽은 무조건 커다란 테이블이 놓여야 한다는 데 모두가 동의했기에 웹으로 많은 책상을 검색해 주문을 결정하고 건물 입구까지만 배송되는 탓에 1층에서부터 4층까지 여럿이서 ‘뒤엉켜’ 그 커다란 테이블을 옮겼다. 며칠 뒤엔 또 다른 여럿이서 테이블을 조립하기 위해 이런 저런 궁리를 하며 삶의 중요한 결단이라도 내리는 것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테이블 다리를 고정시킬 자리에 구멍을 내었다. 간단한 조립설명서는 있었지만 다리를 고정해야 하는 자리가 어디인지 알려주는 표식이 없었던 탓에  좌우를 재며 ’중심’을 찾기 위해 표식을 늘려가다보니 테이블 아랫면엔 바둑판 같은 격자무늬가 만들어졌다. 그 격자무늬를 통해 중심을 찾은(중심이라 믿은) 후 모두가 짧게 환호했다. 평범한 테이블 아래엔 중심을 찾기 위해 좌우로 그어두었던 선분으로 가득하다. 그 직선들 덕에 안심하고 중심을 결정할 수 있었다.


테이블 아래에 남아 있는 중심 찾기를 위한 선분의 흔적. 오늘 이곳의 테이블 위엔 또다른 선분으로 가득하다. 이 테이블 위에서 무언가를 쓰고, 읽고, 음식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무수한 선분이 거듭 그어진다. 각자의 중심을 찾기 위해 집중하는 시간, 서로의 중심을 지켜주기 위해 배려하는 시간, 그렇게 지금의 중심이 아슬아슬하게 찾아지는 시간이 오늘의 테이블 위에 쌓여간다. 글쓰기 또한 무수한 선분들 사이로 아슴푸레하고 아슬아슬하게 나타나는 중심 찾기와 다르지 않다. 아니 책이라는 것이 꼭 이 커다란 테이블을 닮아있다. 이 공간을 장소로 붙들고 있는 살림살이의 무게중심인 것처럼 이 커다란 테이블은 각자의 삶속에서 쓰이는 한 권의 책과 다르지 않아보인다. 내가 썼지만 내 힘으로만 쓴 게 아님을 커다란 테이블-책 위에서 알게 된다. 단단한 과일이 익어가는 시간 속에도 무수한 선분이 그어지고 있을테다. 복잡하게 얽혀 있어 좀처럼 풀기 어려운 기억을 책이라는 형식으로, 손에 쥐어지는 선연한 물성으로, 사람의 손이라는 것이 책을 쥐고 펼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알맞은 볼륨으로, 책은 무언가의 장소가 된다. 그런 책 곁에서 사람 또한 잠시나마 장소가 될 수 있다. 


이 평범한 사각형 테이블 위에서 오늘도 사람들이 모여 김을 매고 밭을 가는 것처럼 무언가를 읽고 쓴다.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고 이야기를 나눈다. 각자의 뒷면에 남겨진 선분을 서둘러 드러내거나(고백) 서로가 감춰둔 선분을 애써 발견하려 하지 않고(심리주의) 잠깐 안심하며 곁의 사람을 향해 욕심 없이 선분을 긋는다. 문턱이 없는 이 평범한 테이블은 누구나 앉을 수 있는 공통의 자리다. 그 자리에서 만큼은 누구나 두려움 없이 선분을 그을 수 있다. 어떻게 긋고, 어디서 끝을 맺을지 알 수 없다고 해도 곁에 있는 누군가가 분명 점이 되어줄테니 안심하고 첫 선분 긋기를 시작할 수 있다. 테이블 위에 나타나는 점은 어떤 순간의 중심이자 누군가가 믿고 기댈 수 있는 중심이다. 한 그루의 나무에서 수많은 과일이 단단하게 맺히듯이 이 커다란 테이블 위에 그어지는 선분 속에서도 위계도 우열도 없는 중심이 맺힌다. 잘 익은 과일[중심] 하나가 커다란 테이블에 앉아 있는 누군가의 발아래로 굴러가 멈춘다. 누구나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이, 그 어떤 욕심도 없이 발아래로 굴러온 그 과일[점을 향해]을 베어문다[선분을 긋는다]. 


 

* 여기가 (우주의) 중심입니까?






*오즈 야스지로의 '다다미 쇼트'와 견줄만한 '테이블 쇼트'(테이블을 설치한 직후 그 자리에서 앉아서 찍은 이혜미 님의 사진). 모든 것을 아득하고 아늑하게 보이게 한다.



[회복하는 글쓰기 4기] <아직 세상에 도착하지 않은 책-쓰기> 2강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