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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7월 생활글(1-3/계속)

by 종업원 2019. 7. 16.

2019. 7. 16

[젓가락의 내러티브]


서울에서 친구가 왔다. 마침 와인과 맥주가 넉넉해 따로 장을 보지 않고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술안주를 만들었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먹은 음식의 목록. 순대볶음, 키위 , 사과 , 하나, 마늘빵, 라면 그릇, 핸드드립 커피 . 그리고 와인 병과 맥주 . 도착하자마자 세수는 하지 않고 이빨부터 닦는 여전하다. 사귄지 20년이 넘었지만 만날 때마다 생각지 못한 것들을 알아간다. 때는 무심하고 거친 모습이 자주 눈에 들어왔지만 이제는 굳이 드러내지 않는 세심함과 섬세함이 많이 감지된다.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마치 인덱스를 붙여가는 차근차근 말을 풀어놓는 방식에 청량감을 느낀다.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피로조차 단순화하지 않고 피로의 출처를 세심하게 헤아려 전달하는 대화의 내러티브가 주는 몰입의 강도에 안정감을 느낀다. 


자주 내어놓는 메뉴이지만 언제나 맛있다는 순대볶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떤 음식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어떤 음식은 여전하다는 생각을 했다. 고기를 구워 먹는 여전히 부대끼는 면이 있어서 육고기가 먹고 싶을 (고기)순대볶음을 먹는 편이다. 스트레스가 쌓인 , 온전히 시간을 (흘려) 보내기 위해 필요한 메뉴 또한 순대볶음이다. 그런 메뉴를 한계절에 두번 방문하는 친구에게 내어놓는다. 일상적으로 만드는 메뉴여서 맛엔 초조함이나 과욕이 없어 안정감을 준다. 메뉴의 역사가 2014년에 본격화되었음을 이야기를 나누면서 분명히 알게 되었다. 각자의 형편과 계획은 조금 가라앉아 있는 듯했고 2인용 카약을 타고 노를 젓는 것처럼 대화를 하다보니 정서의 해수면이 조금 상승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새벽 3시를 지나던 즈음 라면이 먹고 싶다고 해서 재빨리 그릇을 내어 주었다. 뚝딱! 만들어 내어놓는 리듬이야말로 요리가 주는 작지만 분명한 기쁨이다. 취기가 조금 올라온 탓에 라면을 먹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게 되었는데,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그릇을 비우는 동안 젓가락도 허투루 놀리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인스턴트 음식은 대개 젓가락 이후엔젓가락질의 강도 현저하게 떨어지기 마련인데, 모든 젓가락질이 목적에 충실했다.  한번은 면발에 집중했고, 면발을 씹는 동안은 계란을 건져내기 위해 집중력을 발휘했으며, 다음엔 황태포와 면을 함께 집어올려 라면맛의 바리에이션(variation) 조율했다. 어떻게 젓가락도 허투루 놀리지 않는 건지 물어보니 잠시 고민을 (젓가락질을 멈추진 않고) 거의 마지막 젓가락질에 이르러 이렇게 답했다. “내게 이런 라면을 끓여준 사람이 없다.” 혹여나 국물에 빠트릴까 염려하며 그릇 표면을 활용해 계란 노른자를 건져올리던 조심스런(강도 높은) 젓가락질에 어떤내러티브 흐르고 있음을 감지했다.  



2019. 7. 10 

[작별 연습, 작별 운동]


어제도 사람들과 헤어졌고 오늘도 헤어질 참이다. 이별의 명수(名手)가 될 순 없다해도 이쯤이면 누구나 작별의 명수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선물의 명수들이 죄다 여성 동료들이었던 것처럼 작별하는 능력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이렇다할 말도, 눈길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목례만 겨우 하는 내 작별 인사와 달리 손을 맞잡거나 자연스레 포옹을 하는 그들의 작별 능력이 늘 부럽기만 하다.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것은 웬만큼 해본 탓에 어색하지 않은 정도는 되지만 살갑게 작별하는 건 아무래도 아직은 어렵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속엣말을 꺼내놓는 한국식(?) 작별 문화가 대화가 아닌 고백에 기댄 관계 맺기와 은근히 연결되어 있다 생각하는 측면도 있겠고, 만나는 동안 충분히 대화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조금은 기이한 대화 문화와 거리를 두고자 하는 태도에 기인하는 측면도 있겠지만 뭔가 모자라거나 얼핏 무성의해보이는 작별 인사를 애써 건네면서도 마음 한켠엔 살가운 작별 인사를 건네는 능력을 배우고 싶은 바람도 품게 된다. 살가운 작별을 하되 후유증이 없는 작별, 현명한 작별이 가능할까. 살을 맞대지 않고 말을 맞대는 것만으로 충분한 작별도 가능할까. 잘 만나는 능력은 시대의 미덕이어서 배우기 쉽지만 잘 헤어지는 능력은 개인의 사연쯤으로 축소되어 있는 탓에 배우고 익히는 것이 쉽지 않다. '어떻게 작별하는가'는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와 연동되어 있다. 어색함과 궁색함 속에서라도 각자의 작별 연습, 또 작별 운동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19. 7. 8

[점멸하는 장소, 점멸하는 희망]


오후 늦게 도착한 낱강 신청 문자. 언젠가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는 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잠시 '들렀다'가 얼굴만 보고 간 분이 있었는데 그때 전달 받은 것이 '다과'만이 아니라 '들렀다가 가는 마음'이기도 했던 것처럼, 그 문자는 저녁 나절에 생긴 잠깐의 시간동안 참석할 수 있는 모임이 가까이에 있음을 알리는 연락이기도 했던 것. 


늦은 저녁, 어떤 건물은 너무 환해서 들어가기가 주저되고 어떤 건물은 불이 꺼져 있어 들어갈 수가 없다. 작은 [읽기] 모임은 불을 꺼놓고 있는 읽기의 시간에 전력이 흐를 수 있게 돕는 작은 발전소 같다. 누구나 각자의 스위치를 올리기만 한다면 꺼져 있던 권리에 불이 들어온다는 자명한 사실. 한 마디도 허투루 하지 않았던 낱강 신청자의 말을 경청하면서 지금 한 사람이 말로써 밝히고 있는 장소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말하기와 경청하기라는 자가발전기로 점멸하던 시간. 매일 점멸하는 장소가 있다고, 그렇게 켜졌다가 꺼지기를 반복하는 희미한 희망이 있다고 말하는 모임. 그런 염원 하나를 사람들 곁에서 말없이 적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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