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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2月 (1-4/계속)

by 종업원 2019. 2. 19.

 

2019. 2. 15

2.0_강원도 어느 골짜기에서 얼음벽 등반을 한 뒤 쉬지 않고 한달음으로 온 세희와 함께 했던 1월의 어느 밤. 전과 달리 꽤 많이 바뀐 거실을 둘러보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내심 아쉬워하길래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낮은 탁자 하나와 미니오디오세트 외엔 아무것도 없었던 휑한 이전의 거실을 두고 도시 주거지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미니멀한 거실의 고유성이 사라졌다는 대답을 해왔다. 넓은 나무 테이블을 놓고 책장을 들여 서재에 쌓여 있던 책들을 가지런하게 정리해놓고서 이제서야 그럴 듯한 거실의 모양새를 갖추었다고 생각했는데, 사라져버린 거실의 고유성을 조용히 애도하는 눈빛과 마주하게 되었다. 20년지기와 간만의 만남이 낯선 곳에서 도착한 사람과 하룻밤만 나눌 수 있는 대화를 하는 마음이 되어버려 서재에 들어가 노트북을 가지고 나왔다. 스무 살일 때 서로가 너무 달라서 매번 새로운 것과 만나는 데서 오는 흥분과 배움의 감동으로 충만했던 그 시절의 마음이 어두운 겨울 밤 그곳에 찾아와 우리와 함께 했다. "여행을 하다보면 평화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어. 이 세상이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기 때문이야." 올해 여행 2.0을 준비 중이라는 여행작가 박로드리고 세희의 전언.  

 

 

2. 16

잘못 걸려온 전화에 묻는 안부_이른 아침에 걸려온 전화. 나이가 지긋해보이는 어르신의 목소리다. 주말 택배 일을 하시는 분인가 했는데, 잘못 걸려온 전화. 이후 네 번 정도 반복해서 전화를 거시길래 번호를 확인하고 20년간 이 번호를 써왔으니 전화번호를 잘못 옮겨적으신 거 같다고 말씀 드렸다. 몇년전부터 1년에 한두 번 나이 지긋하신 분으로부터 전화를 받아왔었는데 오늘처럼 충청도 사투리를 쓰시는 분이었던 거 같다. 외부 소음이 적지 않고 다급해보이는 어조, 몇번이나 다시 전화를 거는 걸로 봐선 다른 지방에서 해당 번호를 옮겨 쓴 분을 만나러 온 게 아닌가 싶다. 옮겨적어 놓은 번호를 불러달라고 하니 내 휴대폰 번호와 동일하다. 아마 고령으로 잘못(그러나 정확하게 내 번호로) 불러주신 듯한데, 틀린 줄 알면서도 몇번이나 다시 전화를 건 한 충청도 말씨를 쓰시는 어르신의 다급한 목소리가 번호를 잘못 적어준 고령의 어르신이 아직 생존해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잠깐 안심이 되었다. 스스로가 있고자 하는 자리에서 모두들 무사하시라. 나직하게 안부를 물었다.     

 

 

2.17

오늘의 주인공_‘ 나물의 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때론 맛있게 먹어야 하고 때론 애써 삼켜야 한다. 그러다보면 나물 새겨져 있는 곡진한 역사에 고개를 끄덕이는 날도 생기는데, 이렇게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에 대해 경외감을 느낄 나조차 모르는 사이에 스민 생활의 보수성에 대해 위화감을 느끼곤 한다. 생활을 엄정하고 귀하게 여기되 마냥 좋아하거나 탐닉할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분명한 것은 나물에 으로 점철되어 있는 세계란 힘으로 운명 바깥으로 나가볼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웬만큼쎄지않고선 나물의 으로 완고한 식탁에 들어설 수도 없다. 모두가 조금이라도 다른 삶을 살고자 아등바등 하고 있지만 그런 안간힘만으론 나물의 바깥으로 나가기 어렵다. 아등바등하는 삶이야말로 나물의 배분하는 시민권에 가깝기 때문이다. 아주 가끔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을 만나는데, 언제나 헤어질 때가 되거나 헤어지고 나서야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내가 나물의 이기 때문에 다른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한 것일테다. 뭔가를 도울 있다는 생각까지 눌러야만 들을 있는 목소리가 있다. 때론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는 것이 돕는 일일 때도 있다. 모두가 주인공일 없고, 매일매일 주인공일 수도 없다. 눈알조차 굴리지 않고 잠자코 있어야 때를 알아차릴 있어야 한다. 지금  곁 오늘의 주인공들이 있기 때문이다

 

 

2. 18

변덕부리지 않는 스텝_어느 날부터기분이라는 마음의 상태보다 상태에 따르는 것이 되었다. 바깥으로 나가 걷는 순간 완전히 다른 기분이 된다. 하루도 빠짐 없는 기분은 변덕이 없다. 산책이 주는 충만함의 감각이 아래에 쌓여 있는 이유도 있겠지만 아무래도스텝 밟을 때의 리듬감이 온몸을 감싸기 때문일 것이다. 몸의 중심을 느끼면서 그것을 옮겨보는 것이 스텝이다. 앞뒤로 몸의 중심을 옮기다보면 출렁이는 기분이 찾아온다. 하지만 쏠림이 없고 몸속 어느 자리에 차곡차곡 쌓이는 느낌이 든다. 그러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달리게 된다. 폐활량의 눈금 언저리를 넘실되지만 결코 수위를 넘지 않는 상태는 5 정도 지속된다. 이내 지하철 역이나 체육관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몸을 움직여 중심을 감각하는 일은 중요하다. 변덕은 생각이나 마음의 영역의 문제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몸의 변덕 또한 통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한결 같은 기분을 몸에 기억시키는 일은 누구나 해볼 있는 일이다. 몸의 중심은 한결 같이 고정시켜 놓아야 아니라 매번 이동시킬 있어야 한다. 움직이는 중심을 감각하고 이동을 조율할 있을 몸이라는 장소에 안정감이 깃들게 된다. 자신의 스텝을 가진다는 것은 몸의 영점을 찾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화의 영점, 관계의 영점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중심 또한 매번 이동시킬 있어야지만 변덕 없는 관계를 조형해나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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