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투쟁과 디아스포라 서사를 축으로 삼아 정영선의 『아무것도 아닌 빛』을 읽어내는 건 자연스럽다. 그 때문에 노인 빈곤과 코로나 팬데믹으로 사회 관계망이 차단된 모습은 국가와 역사라는 대문자 이야기에 휩쓸려 압사당하거나 마모된 이들의 현재를 보여주는 소설의 배경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야기를 이끄는 ‘안재석’과 ‘조향자’가 품은 갖은 사연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아닌 빛』을 읽는 동안 눈길이 머물렀던 곳은 한때 맹렬하게 타올랐던 기억의 자리가 아니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텅 빈 곳들이었다.
낙동강 끝자락에 기댄 낡고 오래된 아파트는 어딘가로부터 떠밀려 온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곳이었지만 점점 비어 간다. 안재석과 조향자가 휩쓸렸던 기구한 행보를 누구도 관심 갖지 않았던 것처럼 떠난 이들의 행방을 궁금해 하는 이는 없다. 그런 점에서 사라진 건 누군가만이 아니라 그간 부대끼며 살았던 ‘어울림’이라는 관계성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가 시작되고 끝나는 동안 유일하게 함께 하는 건 그 누구도 아닌 낙동강이다. 낙동강은 도심 외곽이라는 입지 조건이나 인물의 마음을 달래주는 풍경이라기보단 서사를 이끄는 보이지 않는 동력이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이야기 한 자락을 펼쳐본다. 조향자는 뜻하지 않게 ‘태극기 부대 알바’에 동원되어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로 돌아오는 길이다. 호주머니에 수당이 있으니 장을 봐야겠다 싶다. 에스컬레이터로 이어지는 마트를 가지 않고 굳이 지하철에 내려 몇 분 걸어야 하는 마트로 간 것은 이웃인 진명 엄마가 일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긴가민가한 탓도 있지만 아무래도 여러 곤란한 일이 생기는 일터인 터라 서로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게 쉽지 않다. 두 사람은 함께 걷는 것도 아니고 따로 걷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거리를 두고 걷는다. “전 강변으로 걸어 다닙니다.” 뒤에서 진명 엄마가 급하게 이 말을 건넨 의도가 함께 가자는 건지 잘 가라는 건지 판단하기 어렵다. 조향자는 잠시 망설이다 강변 쪽으로 몸을 돌린다. 그때 강변으로 통하는 굴다리 밖으로 전동휠체어가 연달아 나온다. 이들이 강물을 내다보며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가는 길이라는 걸 그곳에 자주 나왔던 조향자는 이미 알고 있다. 느티나무 쉼터에 진명 엄마가 기다리고 있다. 마트에서 본 것보다 덜 피곤해보이는 진명 엄마와 조향자가 나누는 대화엔 특별한 내용이 없다.
가족도 친구도 없이 가난한 채로 늙어가는 조향자에겐 내쫓기는 것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웃과 잠시 강변을 걷고 평범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저 장면을 다시 펼쳐본 것은 어느 날 사라져도 어찌할 바 없다 여기는 이들이 서로에게 기대며 흔적을 남기는 모습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삶에 쫓기는 진명 엄마가 강변을 바라보며 조향자를 향해 “바람을 쐬니 살 것 같아요”(170쪽)라며 건넨 말은 이 소설의 서사를 견인하는 데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지만 조향자가 기대고 있는 희미한 빛이 잠시 깜빡이는 순간이라 생각했다. 『아무것도 아닌 빛』은 희미하지만 아직 사라지지 않은 깜빡임으로 가득하다. 그 깜빡임은 존재감이 분명한 선이 굵은 서사엔 담아낼 수 없고 그런 이야기를 기대하는 이들에겐 좀처럼 읽히지 않는다. 『아무것도 아닌 빛』은 ‘밤하늘에 희미하게 반짝이는 작은 개똥벌레를 뒤쫓는 데’ 집중한다. 1
마찬가지로 이 소설에서 낙동강은 취약 계층의 발걸음이 가닿는 곳이면서 잠시나마 숨통을 틔게 하는 환경 정도로 그려지는 듯보이지만 막상 “강이 도시 바깥을 돌아 바다에 닿을 때까지 몇 줄기로 갈라지는지 아는 사람”(70쪽)은 없으며 강 근처에 사는 사람 또한 “매일 보지만, 매일 본다고 강을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전동휠체어를 탄 이들이 강으로 오는 까닭은 한적한 곳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강 근처에 사는 이들은 모두 강을 바라보지만 기대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조향자는 강을 보며 자꾸 ‘다리’ 이야기를 한다.
의지와 상관없이 다가오는 어떤 것을 느낄 때마다 강바닥에 내린 다리의 기둥을 보는 것 같았다. 어딘지 모르지만 깊숙이 뿌리를 박은 뭔가가 강 아래로 더내려가지 않게 하는 것처럼, 자신이 멀리 가지 않도록 밥을 먹이고 잠을 재우는 것 같았다. (72쪽)
그들이 남기고 간 강물 위로 김해로 건너가는 다리가 보였다. 그뿐 아니다. 구포, 물금에서도 강을 건너는 다리가 있고 해가 기울면 물속에도 다리가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조금 흔들리긴 했지만 기우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게 걸어도 될 것처럼 선명했다. 동준을 뿌릴 때도 물속에 다리가 있었다. 아버지는 저기 물속 다리를 건널 수 있겠네. (중략) 아들도 물속 다리를 건넜을 것이다.” (170쪽)
원폭 피해로 오랫동안 앓다가 요양원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한 남편 동준과 자살한 아들 병호의 유골을 뿌린 곳도 강이었다. 조향자에게 낙동강은 누군가를 떠나보낸 애도 장소이지만 그곳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떠내려가지 않고 이곳에 버티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 소설에서 강은 ‘흐름’과 ‘버팀’의 정동이 생성되는 장소이자 시간과 사건이 축적되는 ‘몸’이다. 역사라는 격랑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미약한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저항이 아니라 가까스로 버텨내는 일이다. 힘과 권력이 아귀다툼하는 역사의 틈바구니에 끼인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의 끈질긴 생의 의지는 특별할 것이 없기에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아닌 빛』 전체를 관류하는 낙동강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의 저장고라 봐야 한다. 흐르기에 무엇도 쓸 수 없을 거라 생각되지만 흐르기 때문에 무엇이라도 쓸 수 있다. 마치 양피지(palimpsest) 위에 덧쓰기를 반복해서 지우고 쓴 것들이 축적되고 쌓여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는 것처럼 말이다. 강은 그곳에서 그저 변함없이 흐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러 존재가 남긴 것들의 흔적이 뒤섞이며 어울리고 부대끼는 정동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양피지로서의 강, 정동적인 장소로서의 강은 『아무것도 아닌 빛』의 ‘쓰기’와 맞닿아 있다. 강이 한줄기로 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여러 줄기로 갈라져 흐르는 것처럼 이 소설 또한 여러 시점과 서술의 교차를 통해 이야기를 쌓아간다. 빨치산과 디아스포라라는 굵직한 서사 또한 가만히 들여다보면 미약한 이들의 작은 이야기가 이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설 전체를 통어하는 힘 있는 서술자를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잔해와 같은 희미한 깜빡임을 뒤쫓으며 그 어디에도 기록된 바 없는 존재들의 드러나지 않은 궤적을 그려내는 것이 정영선의 소설 쓰기라 읽었다. 그런 이유로 강은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의 잔해가 쌓이는 비극적인 장소가 아니라 연약한 존재가 모이는 돌봄의 장소다.
‘아무것도 아닌 빛’은 안재석과 조향자의 지난 시간을 애도하는 비유가 아니다. 희미하지만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서 깜빡이는 빛은 기구한 운명의 비극성을 가리키는 표지라기보단 보이지 않았지만 서로에게 기대어 살고 있(었)다는 걸 가리킨다. 안재석은 “어떤 것도, 누구에게도 기대지말자는 다짐은 늘 하지만”(19쪽) 그이를 살게 한 건 배신한 동료(박동배)에 대한 복수심이 아니라 누군가의 돌봄에 있다. 같은 의미로 안재석이 품고 있던 복수심은 배신당했다는 분노를 기반으로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버려졌다’는 상실감을 바탕으로 한다. 박동배가 입원한 요양병원으로 가서 안재석이 한 일이 “박 동무의 고환을 들고 그 아래 뭍은 묵은 오물을 닦”(43쪽)는 돌봄이었던 건 우연이 아니다. 안재석에게 중요했던 건 이념이나 신념이 아니라 뜻을 함께 했던 동료였다. “산을 내려가면 내년에 용두산공원에서 만납시다”(48쪽)라고 한 약속은 ‘미래라는 불확실한 바다에 안전한 섬 하나를 세우는 일’이었을 것이다. 2바깥으로 내몰렸던 이들에게 약속은 새로운 관계를 세우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이지 않았을까. 3
그가 원했던 평등한 세상은 이념에 무게 중심을 둔 것이 아니라 ‘정동적 평등’을 가리키는 것이라 봐야 한다. 한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동등한 수준의 사랑, 돌봄, 연대를 경험하고 이를 박탈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주장하며 캐슬린 린치와 그의 동료들은 이를 ‘정동적 평등’이라 말한 바 있다. 사랑과 관심, 배려를 비롯한 정동적인 측면이 인간 생존에서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것인데, 돌봄은 육체적 생존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일생에 걸쳐 타인을 느끼고 돌볼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에 무척 중요하다. 이러한 협조적인 정동 관계는 인간의 근본적인 상호의존성을 표현한다. 4『아무것도 아닌 빛』을 ‘돌봄 서사’로 읽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주변을 보살펴왔던 조향자의 삶 또한 ‘희생’이나 ‘헌신’이 아닌 돌봄을 수행한 삶으로 설명할 수 있고, 응당 그런 지위를 누려야 한다. 늙고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국가로부터 집을 빼앗기고 시설(장수원)로 추방당하는 참담한 여정을 따라가는 이 소설은 돌봄과 정동적 평등이 무너지는 오늘의 세상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이는 『아무것도 아닌 빛』이 돌봄 체계가 무너지고 있는 오늘의 풍경을 그려내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는 걸 짐작케 한다. 모두가 마스크를 써서 얼굴을 가린 탓에 서로를 알아 볼 수 없고, 어디든 옆자리는 커다란 X표가 가로막고 있다. 이 또한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시대 풍경을 그린 것이라기보다 옆, 이웃, 곁이 사라지고 있다는 걸, 다시 말해 정동적 불평등의 역사가 지속·확장되고 있음을 기록한 것으로 봐야 한다.
자신의 집에서 하루를 묵고 간 안재석이 깜빡 잊고 놓아둔 모자를 들고 밖으로 나온 조향자가 아파트를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자신이 사는 905호를 904호와 906호 사이에 있는 집이라 여긴다. 5904호도 떠나고 906호도 떠났다. 그 뒤로 누구도 이사를 오지 않는다. 이사를 오더라도 벽 너머로 싸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는 없다. 이웃이 없기에 자신이 사는 집도 찾기 어렵다. 안재석의 삶을 뒤쫓아 그의 궤적을 그려낼 때 마침내 드러나는 건 조향자의 보이지 않는 돌봄이었다. 그 돌봄에 기대어 안재석은 삶과 기억을 이을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경찰이 찾아와 조향자에게 안재석의 사진을 보여주며 아는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사실혼 관계라 거짓말을 했던 것 또한 누군지 뚜렷하게 말하기 어렵지만 어딘가에 있을 ‘한 사람’이 “큰 나무처럼 그늘도 만들어주고 이정표도 되어주기를 바랐”(238쪽)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읽은 독자라면 ‘아무것도 아닌 빛’이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를 일으켜 세운 돌봄의 다른 이름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 빛이 지금도 여전히 깜빡이고 있다는 것과 함께 말이다. 깜빡이기 때문에 곧 사라질지도 모른다. 깜빡이기 때문에 아직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빛』을 통해 쓰이지 않은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면 빨치산과 디아스포라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았던 돌봄과 정동적 평등에 관한 역사일 것이다.
「강을 따라, 깜빡이는 궤적을 따라
―정영선의 『아무것도 아닌 빛』(강, 2023)을 돌봄 서사로 읽어야 하는 이유」
⟪문학/사상⟫ 8호(산지니, 2023)에 기고
『아무것도 아닌 빛』을 두 벌째 읽었을 때 비로소 이야기가 내게 도착했는데, 쌓아둔 이야기가 두꺼워서 적어도 네 벌은 읽어야 서평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글을 쓰는 내내 초조했지만 이렇게 단단하고 깊은 소설을 쓰는 이가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게 든든했다. 파르티잔(빨치산)에 대한 이야기로 글매듭을 짓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한 게 못내 아쉽다. 안재석만이 아니라 조향자가가 걸어온 길 또한 파르티잔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건 정영선 소설가가 소설을 써온 길과도 닿아 있다는 걸 말해두고 싶었다. 글을 발표한 뒤 산지니 출판사에서 마련한 정영선 작가와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 토론자로 초대 받았는데, 막바지 시간에 글에는 넣지 못했지만 칼 슈미트가 쓴 『파르티잔』에서 뽑아둔 문장을 낭독했다. 작가에게 건네는 말이면서 그 자리에 있던 작가들과 또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비유적인 의미에서 ‘인간이라는 것은 투쟁자라는 것’이며, 철저한 개인주의자는 바로 자신의 책임 아래 투쟁하고, 그가 용기가 있다면, 자기의 위험 아래서도 투쟁한다. 이 경우 그는 바로 일인 일당적인 당파 구성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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