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5. 24
한 사람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하루종일 그이를 생각하다가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한달이 지난다. 그럴 때 하루는 너무 길지만 한달은 너무 짧다. 1년 6개월 전쯤에 달리는 길에 챙긴 신용카드와 아파트 음식물 쓰레기통 카드를 어딘가에 떨어뜨렸다는 걸 집에 도착할 때쯤 알아차린 적이 있다. 달리기 전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그 카드를 허리춤에 넣어두었는데 지퍼를 잠그지 않았나보다. 두 카드 모두 재신청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달렸던 길을 훑으며 다시 되돌아 갔다. 20분쯤 지나서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는데, 빈손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먼길을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축쳐진 몸과 마음을 이끌고 계속 걸었다. 택시를 타고 달렸던 곳까지 가서 거기서부터 집까지 되짚으며 걸어오는 방법도 있었다. '이런 일로 택시를 타고 싶지 않아'라는 마음 때문에 걷는 거였지만 그건 멍청한 고집일 뿐이다. 그렇게 풀죽은 마음으로 걷는 동안 이 궁상맞은 어리석음이 궁핍함과 이어져 있겠다싶어 속으로 여러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낫개역을 지나 다대포역으로 가는 길목 바닥에 포개어진 채 놓인 카드 두 장을 발견했다. 늦은 시간이고 걸어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는 길이라 달리다가 떨어뜨린 그대로 카드가 놓여 있었다. 맞아, 이런 까닭 때문에 달렸던 길을 되짚어 걸어야겠다 생각했었지. 조금전까지 어리석음과 엮여 있던 마음이 끈기를 통해 얻은 기쁨으로 옮겨간다. 어리석음과 궁핍함과 기쁨이 한 자리에 모였구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이 이야기를 j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이라면 이 궁상맞음을 이해해줄 거야, 터무니 없는 어리석음에 맞장구쳐주겠지, 그리고 내가 주운 이 기쁨을 선뜻 나누어줄 수도 있겠지. 유난히 미소가 환한 그이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j에겐 그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지금은 연락조차 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달릴 때 입는 반바지 허리춤에 음식쓰레기통 카드와 신용카드를 챙길 때 j를 떠올릴 때가 있다. 궁상맞고 어리석기에 주울 수 있는 기쁨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음악을 듣다가 가끔 이 노래와 나만 덩그러니 남았구나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노이즈캔슬링 기능이나 좁은 차안 탓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혼자서 가만히 웃음짓는 일을 떠올리는 것처럼, 바닥에 굴러다니는 작은 돌멩이 하나를 주워 마치 소중한 것인냥 호주머니 속에 넣어두는 것처럼, 이곳까지 정확하게 불어온 바람을 먼곳에서 보낸 편지처럼 반갑게 맞이하는 것처럼. 좋아했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자주 들었던 음악이 내가 낳고 키운 아이가 짓는 웃음처럼 오롯이 내게 보내는 축복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소중히 여겼던 마음이 씨앗이 되어 싹을 틔우고 어느새 아름드리 나무가 되어 내게 넉넉한 그늘을 내어주는구나. 밥을 지어 먹다가도 마치 이 끼니가 내가 키운 작물을 수확한 듯한 착각이 들 때도 있다. 밥을 먹는다기보단 밥을 껴안는듯한 느낌이다. 길을 걷다가, 책을 읽다가 '여긴 너와 나만 있구나' 싶은 마음이 될 때, 스스럼없이 껴안을 수 있다. 언젠가 내게 달릴 때 들으라며 음악 파일을 여러곡 보낸 준 이가 있었다. 버스에서 내가 바삐 걸어가는 걸 보았다고도 했다. 그 모습이 사슴 같았다며 조심히 달리라는 짧은 편지와 함께. 그때 전해받은 음악을 들으면서도 많이 달렸지만 유독 야마시타 타츠로를 들을 때면 그이가 생각난다. 처음 듣는 노래였는데, 시작하자마자 단박에 빠져들었다. 그이에 대한 호의와 호감과 이어진 마음도 함께였겠지. 그 곡목은 잊었지만 그 가수 목소리는 기억했기에 이후에 야마시타 타츠로가 부른 노래 두어곡을 휴대폰에 넣어다니며 종종 듣는다. 느긋하고 유연하며 매끈해서 들을 때마다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 오늘 그 노래가 흘러나와서 오랜만에 그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 사람 음악이 나올 때면 종종 너를 떠올린다고.
오랫동안 기쁜 마음으로 들었던 음악처럼, 걸어도 걸어도 끝나지 않는 길을 신나게 누렸던 걸음처럼, 곁으로 다가가 기대면 조용히 속삭여주는 책처럼 너와 나만 덩그러니 남았을 때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지을 수 있을까, 포근히 껴안을 수 있을까.
https://www.youtube.com/watch?v=hTPCqW4h1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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