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자 여기로 오라
이 찬 저녁 강가로
세계는 물로 흐르고
저 강물은 결코 길을 잃지 않는다네.
―김두수, <저녁강> 중에서
1. ‘강’의 줄기와 ‘말’의 줄기
‘은둔자’ 혹은 ‘세기의 음유 시인’이라 불리는 가인(歌人) 김두수가 2002년에 발표한 ≪자유혼≫(리버맨 뮤직, 2002)에 수록되어 있는 <저녁강>을 다시 듣는다. 삶의 비의를 감춘 듯한 그의 낮고 깊은 저음은 강의 흐름을 좇고 있다. 강의 흐름 위에 제 목소리를 얻어두었으니 목소리는 저 자신도 모르는 소리를 찾아 흘러갈 것이다. 김두수가 노래하고 있는 저 강은 세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찾은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아니다. ‘강물은 결코 길을 잃지 않는다’는 전언을 존재의 비의(秘意)와 세계의 신비가 감추어진 곳, 다시 말해 현실을 초월한 공간을 지칭하는 것으로 읽어서는 곤란하다. ‘길을 잃은 자’가 ‘강’쪽으로 발을 옮긴다는 것은 단순히 세속의 상처를 위무하는 초월적인 공간으로의 진입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강’은 현실 ‘너머’의 공간이 아니라 ‘길’이 있는 곳, 바꿔 말해 내가 걷기 전에 누군가가 걸었던 곳을 의미한다. 그렇다. 강 주변에는 사람이 산다. ‘강물은 결코 길을 잃지 않는다’는 전언의 알짬은 ‘그곳에 사람이 산다’는 데 있는 것이다. 1
어디서 당했는지
가까스로 도망쳐온 듯하다
쫓기고 쫓기다 간신히 강을 건너
주저앉은 짐승처럼 잔뜩 웅크려
엎드린 앞 산, 중턱 옆구리께
외딴 불빛 새어 나온다
···(중략)···
거기, 그가 산다
―이덕규, 「강 건너 불빛」 부분, <<시작>>, 2007년 겨울호
“거기, 그가 산다”는 사실이 상처받은 이들을 강 쪽으로 이끈다. ‘불빛은 강 건너(저 너머)에 있지 않은가’라고 탄식조로 묻는다면 ‘바로 저기에 불빛이 있지 않은가!’라고 답하리라. 김두수의 <저녁강>을 이덕규의 「강 건너 불빛」과 겹쳐서 읽을 때 ‘강물은 결코 길을 잃지 않는다’는 문장이 품고 있는 의미의 내부로 들어가 강으로부터 ‘사람이 사는 곳으로 흘러들어갈 수 있는 길’이라는 의미를 캐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캐낸 문장은 어느새 ‘말의 줄기’를 만들어 ‘강은 통째로 길이다’ 2는 문장을 한쪽으로 내어 놓는다. 천천히 제 몸을 뒤척이며 강의 줄기는 말의 줄기가 흘러들 수 있는 길을 튼다.
2. ‘지킨다’와 ‘쓴다’의 교호(交互) : ‘낙동강 파수꾼’, 소설가의 다른 이름
요산(樂山) 김정한(金廷漢, 1908~1996) 문학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부산 문학의 거두’라는 명명보다 ‘낙동강 파수꾼’이라 부르는 것이 보다 많을 것을 현시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김정한 문학의 밑절미를 ‘강’에서 찾을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 터이다. 김정한을 일러 ‘낙동강 파수꾼’이라고 하는 것은 표면적으로 ‘낙동강’이라는 국지적 공간에 대한 애착과 그곳을 지키고자 하는 사명감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우선 낙동강에 대한 이와 같은 표면적인 의미로부터 보편적인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경로를 마련하는 데 집중할 것이다. 우선, 김정한을 지역 문학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작가라 칭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부산’ 지역이라는 국지적 경계의 범위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정언명제를 실천하는 작가로 명명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해보자.
‘낙동강 파수꾼’을 풀어쓰면 낙동강을 지키는 이쯤의 의미를 가질 텐데, 주의해야할 점은 이때의 ‘낙동강’이라는 고유명사 속에는 지리적인 의미와 함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보편적인 속성 또한 함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낙동강 파수꾼’이란 명명 속에는 ‘사람이 사는 곳을 지키는 이’라는 의미가 내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김정한을 가리키는 ‘낙동강 파수꾼’이라는 별칭이 이러한 의미를 가질 때, ‘지킨다’는 의미에 대해 고찰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지킨다’는 태도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의 고수라던가 당대의 변화를 부정하는 보수적이고 편향적인 입장을 표명하는 것만으로 환원될 수 없다. 김정한에게 ‘지킨다’는 태도는 ‘쓴다’라는 작가 의식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격랑을 피하지 않았던 작가들이 대개 그러하듯 이때 ‘쓴다’라는 동사는 ‘듣고’(타인의 대한 공대), ‘주워 모으는’(세속을 걸으며 수집하는) 행위와 호응한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쓰고, 무엇을 듣고 주워 모으는가. 금방 사라져버릴 아무 것도 아닌 따라지들의 이야기, 한차례 격랑에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져버리는 가난뱅이들의 이야기를 주워 모으고 쓴다. 연필처럼 지워지기 쉬운 이들에게 존재의 무게 추를 달아주기 위해 ‘쓰는 이’란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듣고(恭待) 모으는 행위가 수반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소설가란 ‘사람이 사는 곳을 지키는 이’를 달리 칭한 것이라 하겠다. 3
이십 년이 넘도록 내처 붓을 꺾어 오던 내가 새삼 이런 글을 끼적거리게 된 것은 별안간 무슨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서가 아니다. 오랫동안 교원 노릇을 해오던 탓으로 우연히 알게 된 한 소년과, 그의 젊은 홀어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그들이 살아오던 낙동강 하류의 어떤 외진 모래톱―이들에 관한 그 기막힌 사연들조차, 마치 지나가는 남의 땅 이야기나 아득한 옛 이야기처럼 세상에 버려져 있는 데 대해서까지는 차마 묵묵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정한, 「모래톱 이야기」, <<文學>> 제 6호, 1966, 10(조갑상·황국명·이순욱 엮음, <<김정한 전집>> 3권, 작가마을, 2008, 10쪽) 4
‘기발한 생각’과 ‘묵묵할 도리 없음’이 맞서고 있는 위의 대목은 김정한의 문단 복귀작으로 더욱 유명해진 작품의 도입부에 해당한다. 가령, “이야기꾼들이 곧잘 쓰는 <우연성>이란 것을 아주 싫어하는 나지만, 그날 저녁 일만은 사실대로 적지 않을 수가 없다.”(「모래톱 이야기」, 22쪽) 등과 같은 대목에서도 「모래톱 이야기」가 여타의 소설들과는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낙동강 하류의 이야기란 기막힌 사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의 땅 이야기나 아득한 옛 이야기처럼 세상에 버려져 있는 이야기를 주워 모은 것이다. “나는 꿈 같은 생각만으로써 글을 쓰는 버릇을 배우지 못했다. 발로써 쓰고 싶다.” 5 6는 다짐에서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기발한 생각’과 ‘묵묵할 도리 없음’의 맞섬이 곧 ‘(꿈)생각’과 ‘발’의 갈등에 다름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발로써 글을 쓰고 싶다는 저 전언에서 고고학자적 태도를 상기시킴과 동시에 자신이 딛고 있는 지반을 매번 환기하겠다는 작가 의식을 읽어낼 수 있다. 그 지반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구조를 포함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낙동강 파수꾼’이라는 명명에서 ‘지역’을 읽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국지적인 범위를 한정하는 협의(狹義)의 ‘지역’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지역’을 명명하고 구획해온 근대화의 논리와 정면으로 대응함으로써 ‘지역’의 문제가 근대의 문제이자 세계의 문제임을, 더 나아가 ‘사람의 문제’라는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영역에 대한 탐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7
3. 강이라는 ‘사이 공간’ : 법의 경계, 인간의 경계
따라서 김정한 소설에 있어 ‘낙동강’의 의미는 ‘사람이 사는 곳의 이야기’라는 맥락 위에서 독해될 필요가 있다. 그가 지키고 있는 것은 ‘강’이 아니라 강으로부터 만들어진 ‘삶-터’이기 때문이다. 강 주변에서 삶을 길어 올리는 이들처럼 그 또한 ‘강-삶터’로부터 이야기를 길어 올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강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 강과 육지 사이에 만들어지는 ‘공간’에 있다고 하겠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모래톱’이나 ‘조마이섬’으로 형상화되어 있는 데, 육지도 아니고 강도 아닌 그 ‘사이 공간’이 함의 하는 바에 김정한 소설의 요체가 있다. 그곳은 국가의 논리(육지의 법)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공간이다. 이 조건은 평화와 재앙, 이 둘을 모두 포함한다. 자연의 법칙에 의해 조성된 모래톱, 진펄, 갯벌 등은 그 자체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터가 된다는 점에서, 아울러 국가의 법이 항시적으로 미치지 않는 곳이라는 점에서 평화롭다. 그러나 법 밖에 놓여 있는 탓에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달리 말해 언제라도 법의 침입에 의해 주거지를 박탈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재앙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김정한 소설에 있어 강 주변, 그 ‘사이 공간’은 ‘삶-터’임과 동시에 ‘배제된 상태로 포함’되어 있는 역설적인 공간인 것이다. 8
이러한 상황은 김정한 소설 속에서 국가 폭력의 형태로 반복해서 형상화된다. 가령, “넘실거리는 강기슭 갯벌이 이 고장 사람들의 생명선”이며 “먼 조상때부터 이 강변의 모래톱과 진펄에 매달려 살아왔” 9지만 “옛날 일인들의 소유로서 <휴면법인재산>인가 뭔가가 되어 있는 그 평지밭들이, 별안간 <농업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어떤 유력자에게로 넘어간다는 소문이 마침 자자”해지자 “근대화 두 번만 했으면 집까지 뺏아갈 거 앙이가!”(같은 책, 69쪽)라는 탄식까지 터져나오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이 갈등을 ‘국유지’와 ‘사유지’의 대립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사유지’ 또한 국가가 보장하는 법적 체계를 통해 구획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땅을 소유하는 것’과 ‘땅에서 사는 것’ 사이의 갈등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 대립항은 한쪽의 승리를 통해 해소되는 것이 아닌 오직 ‘대립의 형식’을 통해서만 존립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땅의 소유권’이 확립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삶의 터를 일구어 놓았던 이들을 ‘추방’해야 한다. 그 ‘추방’을 통해 비로소 ‘땅의 소유권’이라는 법적인 체계가 구축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김정한 소설에 있어 ‘강-삶터’는 추방과 소유권(법적 체계)이 대립하고 있는 ‘생명’을 둘러싼 ‘정치’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10
막스 베버(Max Weber)는 국가를 일정한 영역 안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 행사의 독점을 실효적으로 요구하는 인간 공동체라 명명함으로써 국가가 ‘폭력과 관련된 운동’임을 논증한 바 있다. ‘국민국가’란 폭력 행사의 독점을 요구하는 집단과 이를 강요당하는 사람들의 관계가 하나의 공동체로 재편성되었을 때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라 규정할 수 있다면, 국가가 무엇인지 생각한다는 말은 ‘폭력이 조직화되고 집단적으로 행사되는 구조를 고찰하는 것’이라 정리해볼 수 있겠다 11. 사정이 이러할 때 김정한 소설 속에서 강 주변에 모여 사는 이들은 ‘버려진’ 그 땅에서 ‘배제됨으로써 포함되는 삶’을 살고, 그와 같은 경계 영역을 통해 법적 체계는 구획된다. 여기서 말하는 경계 영역은 ‘강’이라는 공간에 국한되지 않는다. 극심한 가뭄에도 수리조합(水利組合)의 혜택을 못 받는 농민들이 사는 ‘도둑골’(「축생도(畜生道)」)이나 전염병 환자들이 내버려져 있는 ‘3등 병실’(「제 3병동」), 고속도로와 동물원 건설로 인한 강제철거로 살고 있던 곳에서 쫓겨나와 사는 ‘토굴’(「굴살이」), 들어갈 감방조차 없는 나환자들이 맨 손으로 일군 ‘인간단지’(「인간단지」), 평지에서 떠밀려 풀도 잘 나지 않는 왕모래 등성이에 군집해 있는 ‘판잣집’(「산거족」), 화물선을 타고 국경을 넘어 수출되는 계절노동자들이 있는 ‘오끼나와’(「오끼나와에서 온 편지」) 등 김정한 소설의 상당수는 삶과 죽음, 법의 안과 밖이 맞물려 있는 ‘경계 영역’을 주요 공간으로 하고 있다. 이 경계 영역을 ‘내버려지거나’ ‘배제된 공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 터, 문제는 이러한 내버려짐과 배제가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생명 권력(bios power)의 권한이 현시되고 있는 장소라는 것이다. 따라서 김정한 소설이 구축하고 있는 경계 영역은 ‘생명’과 ‘인간의 범주’에 대한 질문에까지 육박해간다. 김정한의 소설이 반복해서 제출하고 있는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저류에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이고도 긴급한 문제제기가 수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12
➀ 가축병원이란 데는 소위 일반 병원과는 달라서, 까다로운 문간도 없고, 그저 허름한 갈대발만이 드리워져 있을 뿐이었다. 아마 개나 돼지 같은 짐승을 끌고 들어가기 쉽게 하기 위함이라 싶었다. ···(중략)··· 바우가 얼른 말을 못내고 어름대니까, 그는 갑갑한 듯이 발 틈으로 바깥 달구지 쪽을 흘끗 내다보며, “돼집니까?” 하였다. ···(중략)··· “머라 캐도 좋심더. 빨리 좀 보아 주이소!” 바우는 매달리는 소리를 했다. ···(중략)··· “사람은 병원엘 가야 합니다. 여기서는 개나 돼지 같은 짐승밖에 보지 않습니다.
―김정한, 「축생도(畜生道)」, <<世代>> 63호, 1968, 10(<<전집>> 3권, 115~116쪽)
➁ 이 따라지 목숨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시청에서는 거기에도 통·반을 만들었다. 통·반은 만들어졌지만, 쓰레기차, 거름차가 안 올라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 수도는 올라오질 않았다. 아침저녁이면 물을 찾아서 헤매는 여인들이 동이를 들고, 이고, 온통 산길을 메우듯 날뛰었다.
―「산거족(山居族)」, <<月刊中央>> 34호, 1971. 1(<<전집>> 4권, 118쪽)
➂ 마침 흑산이란 그녀의 개가 별안간 그녀의 무릎 위에 앞발을 털썩 얹어 놓으며 무어라고 꿍꿍거렸다. 아마 뭔가를 재촉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와 개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나는 뜻하지 않고, 후줄근하게 늘어진 런닝샤쓰의 목깃 밖으로 드러나 뵈는 밤순이의 피부에, 이상스런 생채기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중략)···흑산이가 꼬리를 치면서 먼저 굴속으로 쏙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가 이내 따라 들어갔다. 개처럼 기어서. 그려나 즈로스를 입지 않은 것을 나는 그때야 비로소 알았다.
―「굴살이」, <<現代文學>> 177호, 1969. 9(<<전집>> 3권, 242~243쪽)
인용 ➀의 ‘바우’가 병든 아내를 달구지에 ‘싣고’ 여러 병원으로부터 퇴짜를 맞고 찾아간 곳이 가축병원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돼집니까?”라고 무심히 묻는 수의사의 물음은 비단 ‘바우’에게만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김정한 소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에게도 향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람답게 살아가라’라는 김정한의 정언명제가 함의하는 바가 무엇인지 보다 뚜렷하게 드러난다. 김정한이 남긴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전언은 계몽적인 목소리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에 대한 희구와 요청이라고 봐야 한다. 마치 맑스(Karl. Marx)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했을 때 그 비판이 종교에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라는 아편에 매달려야만 견딜 수 있는 삶의 조건을 문제 삼은 것처럼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전언은 사람답게 살 수 없는 이 땅의 현실에 대한 강렬한 비판이자 그러한 현실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요청이었던 것이다. “사람은 병원을 가야한다”는 수의사의 저 당연한 말이야말로 ‘병원’으로 갈 수 없는 삶의 조건이 폭로되는 자리이며 그 ‘(생존의) 문턱’에서 우리는 ‘벌거벗은 삶(bare life)’이 오늘날의 ‘인간의 조건(human condition)’임을 자각하게 된다. 그것은 인용 ➁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쉼 없이 ‘구획’하고 ‘계획’하는 힘은 단순히 대상의 포섭을 위한 것이 아닌 ‘배제를 통한 포섭’의 방식, 다시 말해 무언가를 자신에게 인도하도록 하며 자신을 내버리는 자의 자비에 위탁되는 ‘추방’의 형식을 정확하게 현시한다는 것이다 13. 14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정언명제는 사람과 동물을 가르는 ‘문턱’에 대한 질문을 함의하고 있다. 저 가축병원에는 사람과 동물을 구분할 수 있는 ‘문턱’이 없다(“가축병원이란 데는 소위 일반 병원과는 달라서, 까다로운 문간도 없고, 그저 허름한 갈대발만이 드리워져 있을 뿐이었다”). 인용 ➂의 ‘밤순이’가 개처럼 토굴 속으로 ‘기어들어갈 수 있는 것’ 또한 ‘문턱’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토굴에 사는 한 여성이 개와 성적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는 「굴살이」에서 속옷을 입지 않은 여성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은 ‘관음적인 것’이라기보다 “고층건물이 날로 늘어가는 도시에 아직도 토굴 속에 사는 사람”(220쪽)의 연원을 추적하는 ‘고고학적인 것’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고고학적인 시선을 통해 “아직도 토굴 속에 사는 사람”에서의 ‘아직’이라는 부사가 가리키는 것이 “고층건물이 날로 늘어가는 도시”에 향해 있다는 것, ‘아직’의 본뜻은 ‘~때문’이라는 구조적인 이유나 원인과 분리될 수 없다는 혜안을 제공 받을 수 있게 된다. 15
이처럼 김정한의 소설에서 형상화되고 있는 ‘경계 영역’은 ‘문턱’이 없는 공간이라 바꿔 불러도 좋다.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정언 명령을 사람과 동물을 구별할 수 있는 ‘문턱을 만들어라’는 계몽적이고 지사적인 언사로 환원해버릴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이란 무엇인가’라는 보다 근원적인 질문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정언명제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 있게 된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식으로 말하자면 인간 개념은 한 인간의 선험적 성질이나 자질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존재의 평등한 관계를 가리킨다. 이 정의가 존재론적인 주장인 동시에 정치적 열망을 구성하는 것처럼 김정한이 ‘삶-생명’의 ‘경계 영역’에서 쉽게 지워지거나 말소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채록(採錄)’ 하는 그 행위가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정언명제에 함의되어 있는 바를 실천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양식에 다름 아닌 것이다. 16
4. 잉여의 말, 흘러넘치는(excess) 노래
사실 나는 그물을 가지고 구름 잡는 듯한 이야기는 자신이 없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먼 옛날의 인류 생활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도처에서 열심히 고분을 파헤치듯이, 나는 오늘날의 우리들의 진실의 한 부분을 알아보기 위해, 지난 여름 강원도의 탄갱지대를 몇 군데 돌아다닌 일이 있다.
―「오끼나와에서 온 편지」, <<文藝中央>> 1977년 겨울(<<전집>> 4권, 268쪽).
침수된 강 주변에서, 주소지로 ‘등록’되지 않은 여기저기를 살피며 발로 쓴 그의 글이 건저올리고 캐낸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사람의 말’에 다름 아니다. “어떻게 해서 벌거벗은 생명은 폴리스에 거주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이 “어떻게 해서 생명체가 언어를 가지게 되었는가” 17라는 질문과 정확히 대응하는 것일 때 김정한에게 있어 소설 쓰기란 말할 수 없는 자들이나 말을 박탈당한 자들의 ‘먹는 입’에 ‘말하는 입’을 기입하는 작업이라 바꿔 불러도 좋다.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정언명제는 ‘생존’(먹는 입)이 ‘정치’(말하는 입)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함의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김정한 소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말하는 입’보다는 ‘먹는 입’에 집중하고 있는 이들처럼 보인다 18. 그런 점에서 ‘법적 체계’로부터 ‘삶-터’를 침탈당한 이들을 ‘말하는 입’이 봉쇄된 자들이라 바꿔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추방’이 공동체의 규칙을 위반했을 때 부여되는 징벌이 아니라 외려 원초적인 정치적 관계로써 우리들의 삶을 주관하는 핵심적 조건이라는 점을 다시금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법적 체계가 ‘말하는 입’을 추방하는 것이 아니라 외려 ‘먹는 입’을 탄생시킨다는 것과 조응한다. ‘먹는 입’과 ‘말하는 입’ 사이의 경계를 끊임없이 결정하려는 반복을 ‘정치적 삶’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입이 봉쇄된 자’들의 그 ‘먹는 입’에 어떤 목소리가 ‘말소된 형태’로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먹는 입’과 ‘말하는 입’ 어느 쪽과도 일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정치’(말하는 입)와 ‘폭력’(먹는 입)은 대립 관계가 아니라 쌍둥이라는 것이다 19. 20
목소리가 ‘말소된 형태’로 포함되어 있는 것, 그것은 김정한의 소설에서 ‘노래’로 형상화되어 있다.
➀ 뒤기미 사공아 뱃머리 돌려라우리님 오시는데 마중 갈까나아이고 데고 성화가 났네.옛날의 구성진 가락이 용케도 그대로 흘러나왔다. ···(중략)··· 그러자 이번에는 눈이 좀 튀어나온 노인이 미처 받는다.뒤기미 나리는 눈물의 나리임을랑 보내고 난 어찌 살라노아이고 데고 성화가 났네.
―「뒷기미 나루」, <<창작과비평>> 15호, 1969. 12(<<전집>> 3권, 258쪽).
➁ 이마까라 나끼다샤, 얀톤 고랴샤또,미나도니 쯔꾸마데, 얀톤 고랴샤또,나까나꺄 나란노쟈, 얀톤 고랴샤또,(이제부터 울기―즉 부르기 시작하면 항구에 닿을 때까지 안 울고는 못 배긴다는 뜻)
―「산서동(山西洞) 뒷이야기」, <<創造>> 창간호, 1971, 9(<<전집>> 4권, 178쪽)
인용 ➀은 ‘뒷기미 나룻가’ 주변의 모래톱 밭뙈기 하나에 외딴 집을 짓고 사는 박노인 일가의 비극적인 연대기를 덤덤하게 그리고 있는 「뒷기미 나루」에 등장하는 ‘노래’다. 강이 만들어준 삶-터가 이들에게는 “<제 7천국>”(253쪽)과도 같은 곳이었지만 그 장소는 법적 체제에 무방비로 침탈당하고 만다. 이들이 ‘백중날’ 키우던 강아지와 보리쌀을 용왕님께 바치던 강 앞에서 함께 ‘이어 부르던’ 흥겨운 노래의 기저에는 징용에 끌려간 뒤 대동아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던 노인의 슬픔이 서려 있다. 뒷기미 나루는 자립적인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제 7천국>”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아들과 딸들이 징용에 끌려가던 길목이기도 했다. 그 슬픔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을 가지지 못한 ‘입이 봉쇄된 자’들이 부르는 노래는 ‘개별자’로부터 흘러넘쳐 ‘우리’에게 이어진다 21. 이 노래야말로 ‘몫 없는 자들의 정치화’가 수행되는 자리이며 ‘우리’라는 범주를 회의하게 하고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로만 있을 수 없게 만드는, 우리를 찢고 들어오는 어떤 목소리라고 할 수 있겠다 22. 23
예컨대 2006년 봄, 캘리포니아의 주요 도시에서 ‘불법’ 거주자의 권리 보장을 요구하는 대규모 거리 시위에서 불리어진 노래를 두고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노래를 부르는 행동은 자유의 표현이자 권리를 향한 호소”이며 “거리라는 공간의 틀을 다시 짜고, 법적으로 금지된 바로 그 순간에 집회의 자유를 실천하는 행위”라고 논한 바 있다. 거리에서 울려 퍼지던 그 노래야말로 ‘수행적인 정치학’이라는 것이다.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권리를 부여받지 못한 사람들이기에, 이들의 노래는 지배적 언어를 바꾸어내고 권력관계를 다시 쓰게 한다. 인용 ➁를 염두에 둘 때 ‘입이 봉쇄된 자’들이 부르는 노래는 단순히 ‘우리’(민족/국가)의 언어만을 변화시키는 것에 국한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노동의 고됨과 타향살이의 설움이 각인되어 있는 한 일본 선로수(線路手=보선공원)의 노래를 채집하여 한국어로 새긴다는 것, ‘이제부터 울자’는 그 ‘노래-울음’은 민족이나 국가라는 경계에 속박되지 않는다. 24
「산서동 뒷이야기」의 주요 인물인 ‘에리에상’은 부상을 입고 철도 일을 그만 둔 후 개펄 농민이 되어 ‘ㄹ군’ 농민 봉기사건에 단 한사람뿐인 일본인 가담자이다. 그런 이유로 해방 뒤 일본으로 돌아갈 때는 동리 사람들이 부산 부두까지 가서 전송을 한다. 그가 참가 했다는 농민봉기란 양산군 농민봉기사건을 말하는 것이고 그가 농사 짓던 곳이 바로 ‘메깃들’이다. 「산서동 뒷이야기」는 경부선 철길과 메깃들이라는 배경을 뒤로 한 일제시기의 농민운동을 통한 새로운 한일관계를 정초할 수 있는 하나의 되새김이다. 노래가 단순히 민족의 언어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오는 셈이다. 가령, ‘에이에상’의 아들 ‘이리에 나미오’의 발화, “아부지는 돌아가고 오마니는 살아 있이무니더. 모도 안부 존하라 캅디더.”(「산서동 뒷이야기」, 175쪽)와 같은 ‘기이한 말’은 일본어와 한국어, 그리고 경상도 사투리의 경계를 넘어 서로 뒤섞여 흘러넘친다. 25
김정한 소설에 등장하는 노래들은 ‘몫 없는 자들의 몫을 돌려주는 수행적인 정치학’이라는 점에서 침탈의 방식만을 강구하는 법적 체계 아래, 산 속에서 물길을 내어 삶-터에까지 물을 ‘흘러넘치게’ 한 「산거족」의 ‘산수도’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흘러넘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한 사람의 목소리를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집단의 노래는 구습(口習)을 통해 오랜 시간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기에 한 사람의 목소리로 감당할 수 없다. 그럼에도 개별자들은 그 노래를 부름으로써(agency), 그리하여 ‘흘러넘침’으로써 (존재의) 흐름과 연대를 지속한다. 아울러 ‘흘러넘친다’는 것은 어떠한 체계 위를 범람하는 것을 의미한다. 노래는 체계와 불화할 수밖에 없다. 특히 김정한이 채록(採錄)하고 있는 민간 노래는 근대화, 더 정확하게 말해 ‘민족-국가’ 시스템과 불화할 수밖에 없다. 26
여기서 우리는 김정한 소설을 관류하고 있는 주저음이란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그것은 일본이라는 제국주의자나 미군정의 강압에 대한 저항이 아니며 근대화라는 절대명제로 삶-터를 약탈하고 초토화시킨 폭압적인 법적 체계만도 아니다. 그 주저음은 사람의 ‘숨결’이다. 그들이 부르는 ‘삶-노동’의 노래다.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유일한 흔적을 쉼 없이 흐르는 저 강이, 저 경계 영역이 증명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김정한이 일평생을 낙동강 근처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장소 사랑’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 강을 끼고 사람들의 굴곡진 삶 또한 더운 물살을 만들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김정한 소설의 제목에 ‘사람’과 ‘삶’, ‘생명’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 빠지지 않고 들어가 있는 것 또한 이러한 맥락으로 접근해볼 수 있다.
따라서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정언명제는 곧 ‘말의 문제’와 연관된다. 강 주변이 삶-터라는 것, 그곳이 포함이면서 배제된 구조에 의해 주권적 질서가 구획되는 경계라고 할 때, 김정한이 강 주변에서 버려진 이야기를 주워 모은다는 것은 곧 ‘먹는 입’과 ‘말하는 입’의 구획 및 위계화를 극복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김정한의 소설을 ‘지역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서울 놈들’이라는 종속적인 권력 관계를 폭로하는 데 열성인 지사적인 작가 태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법과 폭력의 문제를 사유할 수 있는 구체적인 내용을 국지적인 장소를 통해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때의 지역문학은 중앙집권적 국가에 맞서고 있는 것에 국한되지 않으며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과 ‘생명권력(bios-power)’이라는 당대의 문제로 진입할 수 있는 중요한 경로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5. 지금-여기, 삶과 폭력이 흐르는 곳 : 정치의 장소
길 한 켠에 쌓여 있는 재첩껍질 27, 갈대 숲으로 둘러쳐진 곳에서 흘러나오는 더운 김. 그곳 가까이에 강이 있다. 더 가까운 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 강이 있는 곳에 사람이 산다. “물고기가 있는 곳에 사람이 산다”고 했던 한 시인의 전언 또한 ‘강’과 ‘생명’의 줄기로부터 건져낸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에 대한 논의는 필연적으로 땅(삶-터)과 연관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은 곧 ‘장소’에 대한 논의와 직결되어 있다. 이를 두고 발생하는 갈등은 표면적으로는 ‘땅의 소유’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겠지만 궁극적으로 ‘인간다운 삶’에의 희구와 몫 없는 이들에게 자리를 만들어주는 행위로 수렴된다. 김정한 소설의 요체가 ‘강’이라는 장소, 그 경계 영역에 있다는 것, 그것이 인간의 조건에 대한 물음에 다름 아니라는 점은 우리로 하여금 그 소설의 중심에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의 문제가 내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단하게 한다. 28
“저기 여객선이 정박한 곳 있죠? 저기가 우리 집이었어요. 다 사라졌어요.”
―지아장커(賈樟柯)의 영화 <스틸 라이프(三峽好人)>(2006)의 한 대목
2000년 된 도시가 2년 만에 헐렸다. 그 수몰된, 여전히 수몰되고 있는 양쯔강의 쌴쌰(三峽)라는 장소에 아내를 찾는 사내와 남편을 찾는 아내가 찾아든다. 아내가 써 놓고 간 주소는 이미 댐 건설로 물에 잠겨버렸고 그 ‘삶-터’에는 유람선과 관광객으로 가득하다. 삶의 터전은 물 밑으로 사라지고 그 형상은 10위안 짜리 인민화폐에 희미한 흔적으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스틸라이프>의 원제는 ‘세 협곡에 사는 좋은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삼협호인(三峽好人)이다. 협곡 아래의 ‘삶-터’가 물에 잠겼으니 (좋은) 사람들의 행방 또한 찾을 수가 없다.
지아장커의 <스틸라이프>가 댐 건설로 상징되는 현대 중국의 발전 이면에 삶과 관계의 파괴를 조명하고 있는 것처럼 ‘강’으로 가는 것은 필연적으로 ‘둑’을 향한 것일 수밖에 없다. 강으로 간다는 것은, 바꿔 말해 사람이 사는 영역으로 간다는 것은, 더 정확하게 사람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강이라는 원천적인 조건(평등)과 둑이라는 개발(조에zōē와 비오스bíos 혹은 ‘먹는 입’과 ‘말하는 입’의 위계화)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산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여기, 강이 흐르고 있다. 그것은 이곳에 삶이, 폭력이 지속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금-이곳이 바로 ‘정치의 장소’에 다름 아닌 것이다.
<<작가와사회>> 2011년 봄호에 기고
- 1. 여기서 말하는 세속(世俗)이란 ‘길 밖에서 길을 찾는 행위’가 아니라 ‘길 안에서 새로운 길을 뚫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세속을 뚫고 나가는 방식은 그 이데올로기들을 피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어떤, 숯처럼 정화된, 혹은 너무 잘 닦아 속이 훤히 비치는 이데올로기를 선택함으로써 그 세속을 마지막까지 밀어붙이는 것이다.” (김영민, <<동무론-인문연대의 미래형식>>, 한겨레출판사, 2008, 185쪽) 세속의 구조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동무론>>을 비롯하여 김영민의 여러 저작에서 확인할 수 있다. 최근의 성과로는 <<세속의 어긋남과 어긋냄의 인문학>>(글항아리 2011)을 참조. [본문으로]
- 2. 이 문장은 권경인의 시 「깨어있는 시간」(<<변명은 슬프다>>, 창비, 1998)에서 “산은 통째로 길인 것을”이라는 구절을 변용한 것임을 밝혀둔다. 이 변용을 포착한 출처는 다음과 같다. 김영민, <<동무론>>, 한겨레출판사, 2008, 181쪽 [본문으로]
- 3. 소설과 소설가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지 마련이고 더군다나 소설의 밑절미가 되는 ‘체험’의 형식 자체가 완전히 달라져버린 오늘날의 사정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소설가’의 함의가 전 시대를 포괄하는 것은 아니다. [본문으로]
- 4. 이 글에서 인용하는 김정한 소설은 조갑상 · 황국명 · 이순욱이 함께 엮은 <<김정한 전집>>(작가마을, 2008)을 판본으로 하며 이하 <<전집>>이라 표기하겠다. [본문으로]
- 5. 구모룡은 「요산문학을 읽으며 생각한 민족문학의 방법」(<<지역문학과 주변부적 시각>>, 신생, 2005)에서 「모래톱 이야기」를 ‘버려지는 이야기들 찾기’, ‘구체적인 터에 내재한 역사성 알기’, ‘박진 묘사에 의한 인물과 환경 그리기’라는 맥락으로 분류하고 김정한의 그와 같은 ‘민족지적 글쓰기’를 통해 ‘민족문학’의 새로운 방법에 대해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는 「21세기에 던지는 김정한 문학의 의미」(<<창작과비평>> 141호, 2008, 가을호)에서 보다 심화된 형태로 개진되고 있다. [본문으로]
- 6. 김정한, 「먼저 하고 싶은 이야기」, <<사람답게 살아가라>>, 동보서적, 1985, 33쪽 [본문으로]
- 7. 황국명은 김정한 소설의 ‘낙동강’이라는 장소 정체성을 ‘행위 주체와 장소의 관계나 주체에 대한 지역 공간의 영향’ 등을 포괄하고 있는 ‘지리적 상상력’이라는 개념을 통해 논한 바 있다. 자세한 내용은 「낙동강과 김정한 소설의 지리적 상상력」(<<문학도시>> 63호, 2006, 3-4월호)을 참조. [본문으로]
- 8. 이 거리는 자발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율적으로 강제된 것에 가깝다. 육지에 삶의 터전을 가질 수 없는 빈민들이 강쪽으로―삶의 환경이 열악한 곳으로―밀려나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9. 김정한, 「평지」(<<창작과비평>> 10호, 1968. 5), <<전집>> 3권, 68쪽 [본문으로]
- 10. 김만석의 「상속받은, 문학에 관하여—요산과 향파의 문학적 성취와 문학관의 활용」(‘비非’발표 원고)은 김정한의 소설을 ‘생명’을 갈취하는 근대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생명’을 옹호하는 문학적 성취라 평가함으로써 그의 소설이 사라져버린 ‘정치’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김만석은 김정한 소설 속의 ‘추방’이라는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탐색함으로써 그 소설이 법의 은폐성을 드러내고 ‘정치’의 문제를 탐구하도록 촉구한다고 주장한다. 필자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김정한의 소설을 ‘몫 없는 자들의 정치화’라는 문제틀로 접근하고 있는 논의는 김만석의 글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이 ‘非 발표’ 원고가 좀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본문으로]
- 11. 카야노 도시히토, 김은주 옮김, <<국가란 무엇인가―국가의 본질에 대한 역사적 고찰>>, 산눈, 2010, 8쪽 [본문으로]
- 12. 앞의 책, 16~36쪽 [본문으로]
- 13.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명제가 제시되는 소설의 대목은 다음과 같다. “사람답게 살아가라!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불의에 타협한다든가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이 갈 길은 아니다.” 「산거족」, 130쪽 [본문으로]
- 14. 근원적인 정치적 관계가 외부와 내부, 배제와 포함 사이의 비식별역으로서 예외 상태를 의미하는 ‘추방령’이라는 논의에 관해서는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의 <<호모 사케르—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박진우 옮김, 새물결, 2008)을 참조 [본문으로]
- 15. 여기서 지칭하는 ‘가축병원’은 단지 「축생도」라는 소설에 국한되지 않는다. ‘3등 인간’, ‘염병’이나 ‘호열자’에 걸린 환자보다 더 무서운 ‘가난이라는 병’에 결려 있는 사람에게는 “세상이 바로 병원과 같은 것이기도”(「제 3병동」, <<新東亞>> 53호, 1969. 10, <<전집>> 3권, 146쪽) 하기 때문이다.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때의 ‘세상의 병원’이란 “나환자들이 들어갈 감방은 없었다”(「인간단지」, <<月刊中央>> 25호, 1970. 4, <<전집>> 4권, 30쪽)는 구절이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격리’가 아닌 ‘추방’을 원리고 하고 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 16. 주디스 버틀러·가야트리 스피박, 주해연 옮김,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산책자, 2008, 58쪽 [본문으로]
- 17. 조르조 아감벤, 앞의 책, 44쪽 [본문으로]
- 18. ‘먹는 입’과 ‘말하는 입’이라는 개념쌍은 김항의 <<말하는 입과 먹는 입—‘종언의 시대’의 종언과 새로운 사유의 모색>>(새물결, 2009)에서 빌려왔다. [본문으로]
- 19. ‘말’은 저 멀리 날아가버리고 오직 사는 문제(생존)만이 존재를 잠식한다. “결국 귀에 남는 것은 무슨 단지 단지 하는 새로운 말뿐이고, 청년이 말하는 <먼 앞날>보다 우선 코 앞에 다가 있는 <사는 문제>가 더 절박했다.” 「평지」, 76쪽. [본문으로]
- 20. 김항, 앞의 책, 15~42쪽 [본문으로]
- 21. 김정한의 소설을 ‘걸으며’ ‘다시 쓰고’ 있는 조갑상의 ‘글-걸음’에 의하면 뒷기미 나루는 밀양강과 낙동강의 삼각지점에 있으면서 밀양군 상동면과 김해군 생림면을 마주보고 있다고 한다.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곳, 나루를 건너 삼랑진읍에서 대처로 나간 탓에 숱한 사연이 서린 곳일 거라는 필자의 언급은 「뒷기미 나루」의 비극적 서사와 조응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조갑상의 <<이야기를 걷다>>(산지니, 2006)를 참조할 것. 소설을 빌려 부산을 ‘읽고-쓰고-걸으며’ 구축한 이 지난한 작업의 중요성은 거듭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본문으로]
- 22. 「모래톱 이야기」의 ‘갈밭새’ 영감이 “하기싸 시인들이니칸에 훌륭하겠지요. 머리도 좋고······. 선생도 시인 아입니꺼. 그런데 와 우리 농삿군이나 뱃놈들의 이바구는 통 안 씨능기요? 추접다꼬? 글 베린다꼬 그라능기요?”(「모래톱 이야기」, 28쪽)와 같은 발언을 한 후 육자배기 가락으로 고시조를 노래한 것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본문으로]
- 23. 김대성, 「불가능한 공동체」, <<신생>> 42호, 2010년 봄호, 167쪽 [본문으로]
- 24.주디스 버틀러, 앞의 책, 64~67쪽 [본문으로]
- 25. 조갑상, 앞의 글, 264쪽. ‘메깃들’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김정한의 수필 「메길들」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김정한에게 있어 ‘메깃들’이라는 장소에 관한 기억은 다음과 같다. “또 한 가지 내 머릿속에 폭풍같이 되살아 오는 것은 이 들에 싸움이 벌어졌을 때의 일이다. 그것도 어느덧 30년이 가까웠나 보다. 동척(東拓) 상대로 이 들에서 불기 시작한 그 용감한 양산 농민투쟁! 순식간에 경찰서를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하고 죽이고 죽고 하던 숨막히던 싸움이었다. 여름 방학에 고국에 돌아왔다가 권토중래하려는 이 고장 농민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신통하지도 못한 유세(遊說)에 나섰다가 덜그럭 붙들려 욕만 톡톡히 당하던 기억이 새롭다. 비록 그것이 내가 학업을 중단한 꼬투리의 하나가 되었다 하더라도 결코 후회되지 않는 오늘의 심경이다.” 김정한, 「메깃들」, <<낙동강 파숫꾼>>, 한길사, 1978, 200쪽 [본문으로]
- 26. 김정한 소설의 노래가 한 사람의 목소리를 넘어선다는 것, 그것은 자기 완결적인 1인칭 서사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사유의 경로를 마련하는 것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 27. “골목자기에는 군데군데 재첩 껍질이 쌓여 있어서, 강가 마을이란 것을 곧 알려 주었다. 낡은 한옥이 삼십여호 모여 있는 듯한 이 엄궁이란 부락은 비스듬한 산 발치에서 낙동강을 향해 자리 잡고 있었다.” 「슬픈해후」, <<12人 新作小說集 · 슬픈해후>>, 1985. 7(<<전집>> 4권, 305쪽) [본문으로]
- 28. 게다가 갈대를 엮어 울타리까지 두르고 보니, 제법 더운 김이 나는 듯도 했다.” 「뒷기미 나루」, 247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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