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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글쓰기 : 애도(불)가능성에 관하여

by 종업원 2012. 8. 15.


1. 죽음 앞의 응답


오래전부터 썩어가는 시체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시체는 그것을 목도하는 사람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파멸시킬 수 있는 폭력의 증거였으며 우리 모두가 그 같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음을 현시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시체를 땅에 묻기 시작한 것도 죽음이 세계를 폐허로 만들 수 있는 폭력의 상징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죽은 사람은 그를 죽인 폭력과 한 패가 되어 죽음의 전염병을 만연시키려고 한다고 생각했기에 사람들은 죽음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들을 땅속에 묻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무덤은 죽음이 사실 ‘죽음에 대한 의식’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을 의식한다는 것이야말로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지을 수 있는 중요한 증표라고 한 이는 바타유(Georges Bataille)였다.[각주:1]


죽음과의 대면은 시체라는 고통의 대상, 혹은 폭력의 증거에 노출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 테지만 우리는 그것이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죽음은 ‘침묵’과의 대면이기도 하다는 사실말이다. 죽음 앞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은 ‘침묵’과 마주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저 침묵은 우리로 하여금 눈앞의 죽음에 응답해야 할 의무를 자각케 한다. 죽음에 대한 응답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분명한 증표일 터, 때문에 죽음 앞에서의 응답은 죽음의 영역과 삶의 영역을 구분하는 표식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응답은 역설적이게도 자신 또한 죽음 앞에 노출되어 있는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동시에 환기시킨다. 살아 있음에 대한 표식이 죽음과 맞닿아 있으며 죽음 앞(front)에 놓여 있음의 증표가 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여기서 매일 밤 죽음을 유예시키기 위해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던 ‘세헤라자데’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죽음과 대면하지 않았다면 ‘세헤라자데’의 이야기는 천일동안 지속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천일동안 끝나지 않던 그 이야기는 ‘세헤라자데’ 홀로 만든 것이라기보다 죽음과 함께 만든 것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죽음의 심연 앞에 노출되어 있는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직시함으로써 그러한 유한성을 연기(延期)하려는 열망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언제나 죽음과 대면해 있으며 죽음 너머를 향해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죽음의 심연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죽음이 가까이에 있는 한 이야기는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저 부패하고 있는 시체들은 죽음이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며 우리로 하여금 어떤 말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다시 말해 ‘유언’을 남길 것을 종용한다. 이 유언이 죽음 앞의 응답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것을 추도문이라 바꿔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저 썩어가는 시체들이 있는 한 죽음의 심연이 아가리를 벌리고 우리에게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에 대한 응답을, 추도문을, 유언을, 이야기들을 멈출 수 없다.





2. 너를 삼키(지 못하)다


죽음 앞의 추도문은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분리하는 애도 작업에 다름 아니다.[각주:2] 시체가 썩기 전에 우리는 그들을 ‘관’ 속에 넣어 밀봉해버린다. 그리고 깊은 땅속에 묻고 그와의 관계를 서서히 분리시켜 간다. 시체가 썩기도 전에 우리는 서둘러 그 앞을 떠나는 것이다. 부패하는 시체는 공포의 대상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애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기도 한 셈이다. 그러나 때때로 그 시체가 썩지 않고(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삶과 더욱 밀착되거나 다시금 새로운 삶을 유지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영화 <수취인불명>(김기덕, 2001)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보자. 영화의 후반, ‘창국 모(母)’는 논두렁에서 꽁꽁 얼어 죽은 자신의 아들을 발견하지만 그를 땅에 묻거나 화장하지 않고, 자신이 먹어버린다. ‘창국’의 시체는 썩지 않는다. 썩기 전에 먹어버림으로써 ‘창국 모’의 ‘살’이 된다. ‘나’와 분리되지 않고 내 안에서 나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이를 타자를 자아의 내부에 위치한 일종의 지하 납골당 안에 안치하는 것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자아가 자신의 내부에 ‘합법적 묘소’를 마련함으로써 타자의 시신을 안치하고 이를 통해 이미 상실된 타자의 죽음 이후의 삶을 계속 유지시키고, 더 나아가 자신의 동일성을 이 타자의 죽음 이후의 삶과의 동일화로 대체시키는 것이다.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애도 작업이 본질적으로 타자를 상징적, 이상적으로 내면화하는 것, 곧 타자를 자아의 상징 안으로 동일화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정상적인 애도, 성공적인 애도는 타자의 타자성을 제거하기에 그것은 타자에 대한 심각한 (상징적) 폭력을 함축하고 있다고 했다. 따라서 애도가 타자에 대한 존중, 타자에 대한 충실한 기억을 목표로 하는 이상, 정상적 애도는 실패한 애도, 불충실한 애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의 논의를 좀 더 참조해보자. 




그런 점에서 본다면 납골로서의 실패한 애도야말로 타자의 온전한 보전이라는 점에서 성공한 애도, 충실한 애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데리다는 이 역시 충실한 애도일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자아 내부에 타자가 타자 그 자체로서 충실하게 보존되면 될수록 이 타자는 자아로부터 분리된 채 자아와 아무런 연관성 없이 존재하게 되며,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입사에서보다 더 폭력적으로 타자는 자아와 관계에서 배제되기 때문이다. 

이런 분석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애도의 필연성 및 불가능성이라는 역설 또는 이중 구속이며, 이는 주체가 근본적으로 식인주체라는 점을 보여준다. 타자와의 관계 이전에 그 자체로 존재하는 자아, 주체, 우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자아, 주체, 우리는 항상 이미 타자의 입사나 합체를 통해서 비로소 자아, 주체, 우리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상적 애도라는 관념이 전제하는 것처럼 타자로부터의 완전한 분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실패한 애도라는 관점이 전제하는 것처럼 타자의 완전한 합체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자크 데리다, <<법의 힘>>에서 진태원의 「용어해설」, 문학과지성사, 2004, 194쪽




타자로부터의 완전한 분리도 완전한 합체도 불가능하다는 데리다의 논의에 따른다면 타자(시체)와 관여하지 않는 주체는 없다고 할 수 있다. 현존하는 주체는 부재하는 유령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언제나 이들과 함께 하고 있는 셈이다. 삶이 언제나 죽음을 통하거나 그것과 함께 할 때 비로소 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성란의 「여름의 맛」(≪작가세계≫ 2009년 여름호)에서 인물들이 찾아다니는 ‘맛’은 이 같은 애도(불)가능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어느 여름 낯선 이국땅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와 함께 먹은 복숭아 맛을 잊지 못하는 ‘그녀’와 암에 걸려 죽음을 목전에 둔 ‘김 선생’이 다시 맛보고자 하는 ‘콩국’, 이들은 ‘그 맛’에 붙들려 있다. 그리고 오랜 시간 ‘그 맛’을 찾아 헤매지만 어디에서도 찾지 못한다. 그때의 복숭아 맛은 ‘그녀’의 일상을 뒤흔들어 놓고 ‘김 선생’은 오래전부터 맛있는 음식이라곤 먹어보질 못했다. 이들의 헤매임은 ‘그 맛’을 다시 만나기 위함일까,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일까. “주문은 걸렸는데 주문을 건 사람의 행방을 알지 못하니 주문을 풀 방법도 알 수 없었다”(26쪽)는 ‘그녀’의 토로를 다음의 두 장면과 겹쳐서 읽어보자. 



복숭아에서 흘러내는 과즙이 손바닥의 손금을 타고 흘러 꺾인 손목 아래로 뚝 떨어졌다. 팔꿈치까지 진득한 물이 흘러내리기도 했다. 과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그녀는 허겁지겁 복숭아를 베어 물었다. “맛있다.” 아무도 없는 산책로에서 두 사람이 복숭아 먹는 소리만 울렸다. 베어물고 씹고 흘러내리는 과즙을 쪽쪽 소리나게 빨아 먹었다. 다 씹기도 전에 꿀꺽 소리나게 복숭아를 삼켰다. 

―하성란, 「여름의 맛」, 22쪽(강조-인용자)



산입구에는 등산객들을 상대로 노점상들이 서 있었다. 촌 여자들은 콩국을 팔았다. 커다란 젓갈통이었다. 그 안에 콩국이 가득했다. 커다란 얼음 덩어리가 서서히 녹고 있었다. 아버지가 플라스틱 바가지로 콩국을 떠서 내게 주었다. 간간했다. 무언가 차갑고 미끄러운 것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나는 그것이 작은 물고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쳤던 것처럼 콩국은 비릿했다. 

―하성란, 34쪽(강조-인용자)



꿀꺽 삼켜버린 것,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버린 것은 복숭아나 콩국 속의 우뭇가사리만이 아니다. “맛은 맛이 아니라 추억”(35쪽)이라는 ‘김 선생’의 말은 그들이 삼킨 것은 다시는 반복할 수 없는 시간이며 곁을 떠나버린 대상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녀’는 그 남자와의 짧은 만남의 시간을 “베어물고 씹고 흘러내리는 과즙을 쪽쪽 소리나게 빨아” 먹고 “다 씹기도 전에 꿀꺽 소리나게” 삼켜버렸다. 항암 치료를 거부한 엄마를 묻고 내려오는 길에 마신 ‘콩국’,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지 못한 한 소녀가 더운 여름 날 산 아래에서 마신 것은 ‘콩국’만은 아닐 것이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 것은 엄마와 함께한 모든 시간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그녀’와 ‘김 선생’은 상실된 대상으로부터 분리되지 못하고 그것들로부터 헤어나지 못한다. 온전한 나로도 합일된 우리도 아닌, 반복 불가능한 시간의 주문에 걸려 ‘지금’과 ‘그때’를, ‘나’와 ‘너’ 사이를 헤매고 있는 것이다. 「여름의 맛」은 ‘나’와 ‘너’가 결코 분리될 수도 합체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 애도(불)가능성을 환기시킨다. ‘나’와 ‘너’는 그렇게 언제나 분리된 채로 함께 있을 수밖에 없음을 작가는 달콤한 복숭아와 비릿한 콩국의 ‘맛’을 통해 섬세하게 형상화 하고 있다. ‘그 맛’을 찾아 헤매는 소설 속의 인물들에서 언어를 통해 세계를 재현하는 소설가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3. 노동의 세기와 ‘유통기한’의 기율 


하성란의 「여름의 맛」이 ‘그 맛’을 찾아가는 서사의 축 위에 애도(불)가능성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면 김숨의 「럭키슈퍼」(≪문학동네≫ 2009 여름호)는 ‘침묵’해야만 하는 존재들에 둘러 싸여 있는 화자의 공포와 애도(불)가능함에 대해 이야기 한다. <자전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탓에 소설의 주요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는 ‘럭키슈퍼’를 과거의 실제적인 공간으로 간주할 수도 있겠지만 그 공간이 어떤 강력한 체제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해볼 때, 다시 말해 ‘유통기한’이라는 질서의 규정력이 주관하고 있는 ‘럭키슈퍼’는 김숨 소설의 전체를 관통하는 공간의 의미 또한 동시에 지닌다는 사실을 강조해두고 싶다. 


김숨은 ‘노동의 세기’라고 할 수 있을 저 70년대와 80년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에게 노동의 세기는 애도불가능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누구나 ‘슈퍼(super)’해져야만 했던 시절(개발의 논리와 88올림픽), 그 속에서 오지 않는(을) ‘럭키(lucky)’를 한없이 기다려야만 했던 이들의 거처인 ‘럭키슈퍼’라는 공간은 유통기한이라는, 허용된 기간 동안만 ‘유통’을 허락했던 폭압적 세계의 메타포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것은 존재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기간이 어떤 획일화된 질서에 의해 규정된다는 뜻일 텐데, 그런 점에서 ‘유통기한’은 죽음이 아닌 ‘쓸모없음’의 규약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곳에는 죽음이 없다. ‘쓸모’와 ‘쓸모없음’만 있을 뿐이다. 유통기한이 지난 물품은 시체처럼 썩어 사라지거나 일정한 절차에 의해 폐기되지 않는다.[각주:3] 다만 누군가의 부주의나 유통기한 따위에 신경을 쓸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이들이 집어갈 때까지 먼지를 뒤집어쓰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각주:4] ‘슈퍼’하지 못하기에 ‘럭키’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이들의 공간에는 유통기한이 지난 것들로 넘쳐난다. ‘슈퍼’한 곳은 더욱 ‘슈퍼’해지고 ‘슈퍼’하지 못한 곳은 ‘슈퍼’라는 이상향을 꿈꾸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밖에 없다. 손님이 없어도 무작정 가게를 지키고만 있어야만 하는 ‘나’처럼, ‘럭키슈퍼’에 있는 모든 것들은 ‘슈퍼’하지 않기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의 유통기한이 지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다. 노동의 세기는 ‘쓸모’의 극대화에 집중하던 시절로 기억되어왔지만 우리는 김숨이라는 소설가를 통해 그것이 ‘쓸모없음’과 등을 맞대고 있었던, ‘쓸모없음’으로 귀결되어버리는 공포의 시절이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유통기한이 3년을 훨씬 넘은 ‘아빠’는 노동의 세기의 폭압성을 체현하고 있는 존재에 다름 아니다. 그가 노동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 그의 유통기한 또한 동시에 시효를 만료해버린다. 그러나 그는 썩지 않는다. “유통기한이 한참 지나버린 간장”처럼 먼지를 뒤집어쓰고 ‘럭키 슈퍼’의 모퉁이에 구겨져 ‘있다’. 아빠는 유통기한이 지나버렸기에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350쪽) 종일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것들에 둘러싸여 그들이 유통되는 순간을 기약없이 기다려야만 하는 ‘나’ 또한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주변에는 도무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쓸모 있는)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쓸모를 가질 수 있을 때 ‘나’는 쓸모를 획득할 수 있고 그때서야 비로소 유통기한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게 안에는 오늘도 팔리지 않아, 유통기한이 지났거나 거의 다된 물건들과 나만 남는다.”(365쪽) 버리지도 못하고 팔지도 못하는 물품들 속에 유통기한을 넘긴지 가장 오래된 ‘아빠’가 있다. 


‘나’의 공포는 자신 또한 ‘아빠’나 팔리지 않는 가게의 물건처럼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인간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겠지만 실은 그보다 더 큰 공포는 ‘침묵’과의 대면에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루 종일 유통기한이 지나는 시간을 ‘침묵’ 속에서 고스란히 겪어내야만 하는 ‘나’의 공포는 ‘침묵’ 그 자체로부터 비롯된다기보다는 그 ‘침묵’에 아무런 응답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그들의 ‘침묵’에 대해 그 어떤 응답도 하지 못한다는 것, 그 공포가 김숨으로 하여금 저 ‘노동의 세기’를 벗어날 수 없게 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 어쩌면 저 ‘침묵’이, 그 응답불가능함이 김숨으로 하여금 소설을 쓰게 했고 또 계속해서 소설을 쓰게 만드는 동력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껏해야 감자만한 찰흙으로, 나는 아빠의 얼굴을 빚기로 한다. 찰흙이 조금밖에 없으니 아빠의 얼굴을 아주 작게 빚어야 할 것이다. (···중략···) 가장 먼저 얼굴을 빚고, 눈썹을 빚는다. 얼굴 중간에 두 눈썹을 떡하니 붙여넣는다. (···중략···) 입을 붙여넣어야 할 자리를 코가 차지해버려 입을 붙이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입을 이마에 붙여넣을 수도 없다. (···중략···) 나는 고민을 하다가 귀 자리에, 입을 냉큼 붙여넣는다. 두 귀도 빚어서 붙여넣고 싶지만 찰흙이 그새 다 떨어져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귀 자리에 입이 떡하니 붙어 있으니, 입이 꼭 귀 같다. 

텅 지어서인가, 이마가 사하라 사막만큼 광활해 보인다. 

자, 지금부터가 하이라이트!

나는 마침내 이마에 유통기한 날짜를 조심조심 새겨넣는다. 샤프 끝으로 꾹꾹 눌러가며. 

2005. 11. 13

―김숨, 「럭키슈퍼」, 354~355쪽



‘나’가 찰흙으로 빚은 ‘아빠’의 얼굴에는 ‘입’이 없다. 김숨의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멀리서 돌아온 무기력한 아버지(<<백치들>>, 랜덤하우스중앙, 2006), 강도 높은 노동에 마모되어가는 아버지(<<철>>, 문학과지성사, 2008), 쓸모없는 일에 열중하는 아버지들(「바위」, ≪실천문학≫ 2008년 겨울호)은 하나 같이 ‘침묵’ 하고 있다. 그 침묵 앞에서 어떤 것도 응답해줄 수 없는 참담함, 그 ‘공포’가 김숨 소설의 저류에 흐르고 있는 주조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침묵하고 있는 이는 온전한 형체를 가질 수 없다. ‘나’가 아빠의 얼굴을 빚을 때 “입을 붙여넣어야 할 자리에 코가 차지해 입을 붙이지 못한”(354쪽) 것은 찰흙이 부족해서만은 아니다. 나는 아버지를 재현해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침묵’은 어떠한 표상도 마련해주지 않는다. 그것을 ‘나’와 ‘너’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알려주지 않는 것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가 ‘너’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식을 하나도 갖지 못한다는 것만큼 공포스러운 것이 또 어디있겠는가. 그러나 그보다 더 공포스러운 것은 아무런 응답을 하지 못하는/않는 ‘나’로 인해 그 침묵이 더욱 깊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는 예감에 있다.



미술실 창틀 위에서 말라가는 동안, 아빠의 얼굴은 비명이라도 내지르듯 쩍쩍 갈라지고 터진다. 그리고 그런 아빠의 얼굴을, 그 어떤 얼굴이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아빠의 얼굴보다 열 배는 커다란 그 어떤 얼굴이. 고작 한 입 거리밖에는 안 되는 아빠의 얼굴을 당장이라도 삼켜버릴 듯, 입을 우악스럽게 벌리고서는. 그 어떤 얼굴이, 그러니까 그 어떤 얼굴이······” 

―김숨, 355쪽



지금, 저 노동의 세기와 무관한 이가 있다면 저들의 ‘침묵’에 답하지 않아도 좋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모두는 ‘유통기한’이라는 기율을 확정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타자의 침묵으로부터 공포를 느끼는 것은 그들의 ‘침묵’과 ‘죽음’에 우리가 깊숙이 관여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의구심과 실은 직·간접적으로 관여 하고 있다는 뼈아픈 자각에서 연유한다. ‘아빠’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보며 당장이라도 삼켜버릴 듯 우악스럽게 벌리고 있는 저 얼굴은 ‘권력자’의 얼굴만은 아닐 것이다. “그 어떤 얼굴”은 ‘침묵’에 아무런 응답도 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얼굴이기도 한 것이다. 김숨에게 있어 소설을 쓴다는 것은 이 ‘침묵’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일 것이며 그것은 곧 ‘침묵’에 대한 나름의 응답에 다름 아닐 것이다. 김숨은 ‘침묵’하고 있는 자의 ‘말’을 대신해주거나 그들에게 말할 수 있는 ‘입’을 붙여 넣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이마에 새로운 날짜의 유통기한을 새겨 넣을 따름이다. 그것이 비록 유통기한이라는 기율을 전복시키지는 못하겠지만 말할 수 없음을 대변(對辯)하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음’ 그 자체를 보여줌으로써 타자의 침묵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최소한의 말’을 직조해내는 것, 그것은 곧 가까스로 내뱉는 응답에 다름 아니다. 한없이 마모되어 쓸모 없어진 이들이 지나온 노동의 세기를 배회하는 김숨의 소설이 윤리적 지평에까지 가닿을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4. 부패하지 않는 죽음, 끝나지 않고 반복되는 이야기 


어쩌면 정작 두려운 것은 죽음 후의 썩어가는 육신이 아니라 ‘산주검(undead)’[각주:5]이나 ‘살 수 없는 삶(unlivable lives)’[각주:6]을 살아가는, 결코 썩지 않는 (비)존재들과의 대면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썩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들을 저 차가운 땅속에 묻어버릴 수 있겠는가! 제 형체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침묵’하고 있기에 어떤 관계를 맺어야할지 가늠하기 힘든, 재현불가능한 존재들 앞에서 공포는 극에 달한다. 



나는 문득 고개를 훌쩍 돌리고 가게 안을 들여다본다. 창백한 형광등 불빛 때문일까. 진열대 위의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그저께도, 그끄저께도 팔리지 않은 물건들이 박제 처리된 짐승이나 벌레처럼만 보인다. 속을 싹 긁어내고 방부제 처리를 한, 썩지도, 변형 변색되지도 않은 박제들 말이다. 소고기를 말린 것이라는, 혁대처럼 납작하고 질겨 보이는 육포는 섬뜩하기조차 하다. 

―김숨, 363쪽



썩지 않는 (비)존재들 앞에서 우리는 추도문을 욀 수가 없다. 그것과는 다른 응답이 필요한 것이다. 부패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죽음이 눈앞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과의 경계를 설정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썩어가는 시체 앞에서의 응답이라는 기왕의 이야기 방식이 바뀌어야함을 의미한다. 모든 죽음이 ‘생생하게’ 죽어 ‘있기에’ 도무지 죽음을 감각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소설은 썩지 않는 죽음 앞에서 씌여지는 것이라고 해도 좋다. 일찍이 박민규는 「카스테라」(≪문학동네≫ 2003년 겨울호)에서 “냉장고를 통해, 비로소 인류는 부패와의 투쟁에서 승리한다”라며 그곳을 “하나의 세계”라고 명명했다. 이 “환상적인 냉장술”에 의해 우리는 더 이상 부패하지 않는 세계 속에서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우리가 썩지 않는, ‘생생한 죽음’과 함께 살아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죽음의 방식이 달라졌으므로 애도의 방식, 죽음 앞의 응답, 요컨대 이야기의 형식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부패하지 않는 세계는 냉장의 흐름처럼 기계적 순환과 반복이 계속되는 세계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반복되는 일상을 강박적일 정도의 비슷한 패턴으로 그려내고 있는 편혜영의 소설을 새롭게 읽어낼 수 있는 독법 앞에 서게 된다. 무한히 반복되는 일상과 그것의 순환에 대한 집착의 저류에는 부패하지 않음에 대한 공포가 잠복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일상이 반복되는 양상을 건조하게 그려내는 편혜영의 소설이 그 어떤 소설보다 섬뜩하게 느껴지는 것 또한 부패하지 않는 것과 대면함으로써 발생하는 공포라고 해도 좋다.[각주:7] 편혜영의 소설에서 확인되는 반복은, 예컨대 쉬지 않고 글을 쓰고 있는 이의 작업물이 실은 흰백지에 똑같은 단어를 빼곡하게 적어넣는 행위임을 발견했을 때의 섬뜩함과 다르지 않다. 더 공포스러운 것은 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치지도 않고 그 반복을 일상화한다는 것, 습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편혜영의 건조하고 마른 문체는 이 같은 세계 인식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편혜영의 「통조림공장」(≪문학동네≫ 2009년 여름호)은 그 자체로 부패하지 않는 세계에 다름 아니다.[각주:8] ‘생생한 사체’들을 만들어내는 통조림공장에서 “깡통에 넣어 밀봉할 수 있는 것의 종류에는 한계가 없다”(264쪽).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된 공장장의 말처럼 그들은 밀봉된 깡통으로 세상을 알아간다. 그러나 밀봉된 깡통을 만드는 과정은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일이기에 그들 중 누군가가 사라진다고 해도 그의 부재는 현실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심지어 사라진 공장장의 아내조차 “내가 귀국한다고 갑자기 남편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잖아요”(262쪽)라며 그의 부재를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따름이다. 그녀는 “만약 시체가 발견된다면 그때 가겠어요”(263쪽)라고 말하지만 공장장은 끝내 발견되지 않는다. 그는 어디로 간 것일까? 아니 그의 시신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통조림공장 한켠에 쌓여 있는 어느 깡통에 일정한 크기로 분쇄되어서 밀봉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공장장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통조림공장의 모든 일이 순조로우며 아무도 그의 상실을 애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다. 부재를 상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 그것을 애도하지 않는다는 것, 통조림공장의 또 다른 직원이 실종된다고 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들 약간의 시차를 두고 공장장의 일과와 식사가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열심히 일했고 고분고분 살았지만, 어쩌면 그래서인지도 모르지만, 씹고 있는 통조림의 맛처럼 삶이 너무 자명해진 느낌이었다. 미래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지나버린 것 같았다. 지나버린 미래는 공장장의 현재와 다름없을 거였다. 

―편혜영, 「통조림공장」, 259쪽


똑같은 일이 반복되지요. 저는 하루 종일 밀봉만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꽁치 대가리를 치고 어떤 사람은 내내 생선 뱃속에 손가락을 넣어 미끈거리는 내장을 빼내요. 하루 종일 생선에 소금을 쳐 간을 하고, 하루 종일 깡통을 박스에 포장하기도 해요.특별한 건 없군요. 그러면 재미있는 건 뭡니까?(···중략···)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거예요. (···중략···) 벨트 앞에 서서 그저 익숙한 각도대로 몸을 움직이기만 하면 돼요. 생각이 탈수되고 몸이 기계의 일부가 되어가는 거죠. 왠지 뿌듯하죠. 자랑스럽지는 않지만. 

―편혜영, 266~267쪽



통조림공장을 지배하고 있는 질서는 모든 과정이 동일한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생각도 삶도 통조림처럼 동일하게 밀봉된다. 그리하여 “생각이 탈수되고 몸이 기계의 일부가 되어가는” 것이다.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에 재미를 느낀다는, 뿌듯함을 느낀다는 공장 직원의 대답은 현대사회의 단면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는 대목에 다름 아니다. “산 것을 죽여서 가공한 후 죽지 않게 밀봉처리하는 것, 그러니까 죽은 것을 상하지 않게 가공처리하여 동일한 상태로 보관하는”(268쪽) 것을 핵심으로 하는 밀봉기술은 ‘죽음을 죽지 않게’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통조림공장, 아니 죽음을 죽지 않게 밀봉하는 세계 속의 삶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지나버린”, 통조림의 맛처럼 획일화되고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 중심에 밀봉된 죽음, 다시 말해 죽음과 대면할 수 없다는 사실이 놓여 있다. 사체는 밀봉되어 생생한 죽음을 살고 우리는 그 죽음 앞에 설 수 없다. 그들을 애도할 수 없는 것이다.


편혜영의 소설은 획일화된 현대사회의 단면을 예리하게 간파하는 데만 있지 않다. 부패를 막는 밀봉의 기술은 대상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죽음과 대면할 수 없음을, 그럼에도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는 애도(불)가능성을 의미한다. 저 반복되는 패턴의 소설들은 애도(불)가능한 세계 속의 이야기가 끝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어떻게 우리가 이야기를 끝낼 수 있겠는가.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산주검(undead)들과 함께 있는데 말이다.



≪작가와사회≫ 2009년 가을호에 기고




  1. 1. 바타유에 의하면 죽은 사람을 오늘날처럼 경건한 의식을 통해 매장하는 관습은 중기구석기 시대의 말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그 일은 선사시대의 역사가들이 소위 지적 인간, Homo sapiens(그 전에는 노동인간 Homo faber이었다)라고 부르는 인간이 나타난 시기의 일이며, 네안데르탈인이 소멸되고 나서 오늘날의 우리와 같은 인간이 나타나기 직전의 일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조르주 바타유의 <<에로티즘>>(조한경, 민음사, 1989)을 참조. [본문으로]
  2. 2.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증 Trauer und Melancholia」(1917)이라는 논문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에 대신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것, 즉 조국, 자유, 어떤 이상 등의 상실에 대한 반응을 애도라고 일컬으며 애도작업이란 자아에게 이제 대상이 죽었다고 선언하면서 자아에게는 계속 살아가는 것이 좋다고 부추김으로써 자아로 하여금 대상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프로이트, 「슬픔과 우울증」(<<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윤희기·박찬부 옮김, 열린책들, 2003)을 참조 [본문으로]
  3. 3. 김숨 소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특히 노동자들) 대개 사회로부터 폐제(廢際/foreclose)된다. [본문으로]
  4. 4. “똑똑한 미정 아줌마와 달리, 유통기한이 지난 물건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유통기한을 살피지 않을뿐더러, 어쩌다 살피더라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 먹고 죽지만 않으면 된다는 게, 그들의 신조라도 되는 듯. (···중략···) 그들은 철로 저 너머에 사는 사람들로, 그들의 직업은 생노가다이거나 파출부이거나 백수건달이다.” 김숨, 「럭키슈퍼」, 352쪽 [본문으로]
  5. 5. 살아 있지도 죽지도 않은 비(非)존재이며, 그러한 (비)존재의 형용이자 움직임을 의미하는 ‘산주검’에 관해서는 복도훈의 논의(「산주검undead」, ≪문학과사회≫ 2007년 가을호)를 참조. [본문으로]
  6. 6. 인간(the human)과 연관된 규범적인 개념들이 배타적인 과정을 통해 법적·정치적 위상을 중지당한 일단의 ‘살 수 없는 삶’을 생산하는 양태에 관해서는 주디스 버틀러의 논의(「무기한 구금」, <<불확실한 삶 : 애도와 폭력의 권력들>>, 양효실 옮김, 경성대학교출판부, 2008)를 참조 [본문으로]
  7. 7. 영화 <샤이닝 The Shining>(스탠리 큐브릭, 1980)의 한 장면 [본문으로]
  8. 8. 부패하지 않는 세계는 반복을 ‘생산하는 공간’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으며 편혜영의 다른 소설에서도 이 같은 공간을 빈번하게 확인할 수 있다. 가령, 대도시 주변에 똑같은 모양으로 즐비해 있는 전원도시(「사육장 쪽으로」)나 복사물을 만들어내는 복사실(「동일한 점심」), 일정 기간을 주기로 파견되는 위성도시(「토끼의 묘」) 등을 떠올려볼 수 있겠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