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쓰레기가 되는 삶들 : 추방의 불가피성
모든 딱딱한 것들이 녹아 사라지는 유동하는(liquid) 세기를 관할하는 핵심적인 규칙에 대해 말해야 할 때, 그 첫 자리에 ‘추방령’을 올려두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때의 ‘추방’이 가지는 함의는 공동체의 규칙을 위반한 자를 단순히 ‘밖으로 쫒아내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조르조 아감벤과의 만남은 오늘날의 ‘추방’이란 무언가를 자신에게 인도하도록 만드는 권한이자 자신을 내버리는 자의 자비에 위탁되는 것임을, 다시 말해 추방은 배제되는 동시에 포함되며 해방되는 동시에 포획당하는 것이라는, 새로운 사유의 영역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날 수 없게 한다. 추방은 공동체의 규칙을 위반했을 때 부여되는 징벌이라는 예외적인 규율 체계가 아니라 외려 원초적인 정치적 관계로써 우리들의 삶을 주관하는 핵심적인 조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외가 규칙이 된 상황, 이른바 추방의 불가피성. 1
만약 주권권력의 작동방식을 독창적인 관점으로 독해하고 있는 아감벤식의 논의가 즉각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면 ‘지구는 만원이다’라는 익숙한 표현을 떠올려 볼 것을 요청하고 싶다. 이 표현은 이미 상투적인 수사의 영역을 넘어 현실을 적확하게 담지하고 있는, 가공할만한 위력을 가진 것으로서의 위상을 새롭게 획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그문트 바우만의 예리한 지적처럼 오늘날 전세계의 방송을 장악하고 있는 ‘리얼리티 TV 쇼’야말로 우리들의 삶의 공간이 언제나 ‘정원초과’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 누구도 추방을 피해갈 수 없다는 사실은 비단 TV 쇼에 국한되지 않는다. 매주, 혹은 매 순간 그 누군가가 사라져야만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원리를 유포하는 ‘리얼리티 TV 쇼’는 추방이 금지라는 위반과 맺고 있던 기왕의 관계 고리가 무용해졌음을, 다시 말해 ‘정당한 추방’ 따위는 이제 사라졌다는 것을 일상적인 감각 속에서 습득케 한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이가 사라져야만 하는 ‘리얼리티 TV 쇼’가 승자독식을 근간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맨얼굴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당위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던 ‘지구화’의 의미를 재사유해야 할 필요성을 요청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원초과’라는 원칙이 바뀌지 않는 한 인간의 삶은 잠정적인 쓰레기의 지위를 벗어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쓰레기가 되는 삶’에 내적 원리 따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바우만의 비유가 보여주듯 어딘가를 밝히기 위해서 다른 곳은 더욱 어두워지는 것처럼 지구화라는, 오늘날 우리들의 삶이 놓여 있는 지반에서 어떤 것이 창조되려면 다른 어떤 것은 쓰레기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2 인간의 ‘계획’과 ‘설계’가 지속적으로 수행될 수 있는 것은 쓰레기가 되는 삶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지 않은가. 3
2. 버려야 적합해지는 개념 : 공동체
추방이 세계를 지배하는 유일한 규칙으로 작동한다는 것은 모두의 삶이 잠적적인 쓰레기의 지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정은 오랫동안 논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요한 쟁점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공동체’에 대한 사유를 멈추어선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류가 삶과 죽음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던 것처럼, 또한 사유가 언제나 삶과 죽음의 문제를 경유해서 제각각의 행로들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함께(com)’라는 문제 또한 모든 말(word)의 잠정적인 접두어의 역할을 해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내밀하고 사적인 문제에 천착할 때에도 인류는 언제나 ‘함께’라는 더듬이로 방향을 가늠하며 사유의 첫발을 내딛어오지 않았던가.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공동체(community)의 어원인 라틴어 커뮤니타스(communitas)는 ‘가치 있는 무언가를 함께 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특정한 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결합이 매번 ‘가치’와 ‘함께’의 범주를 제한하거나 말소시켜버리는 데 있다고 하겠다. 인류의 수많은 재앙의 설계자가 공동체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리라.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공동체의 파괴나 해체를 목적으로 하는 사유에 힘을 모아야 한단 말인가. (특정) 공동체의 해체야말로 공동체가 오랜 시간동안 자행해왔던 것이었음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여전히 반복해서 돌아오는 ‘어떤 공동체인가?’라는 물음과의 대면을 피할 수 없다. 이에 대해 블랑쇼가 ‘밝힐 수 없는 공동체’라고 응답한 것은, 또한 낭시가 ‘무위의 공동체’나 ‘마주한 공동체’라고 대답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 역설적인 사유 속에 지금까지 우리가 ‘공동체’라고 불러왔던 것과는 다른 관계가, 불가능으로써만 가능한 새로운 공동체의 형상에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경로를 마련해볼 수 있지 않을까. 4
모리스 블랑쇼는 공동체라는 말 속에 병적인 전체주의의 기원이 감추어져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것은 공동체라는 범주, 그 언어적 규약 체계가 갖는 한계로부터 비롯되는 것인 바, 공동체 속에는 내재적인 인간성의 원리가 가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절대적으로 내재적인 존재로 규정한다는 것은 이들의 결집이 결국 내부적 완결성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을 뜻하며 그것은 외부의 단절, 바꿔 말해 외부를 절멸시킬 때 비로소 구성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전체주의의 역사, ‘우리’를 살해해온 그 역사는 이러한 동일성의 집단으로 환원되는 공동체가 만들어온 것이지 않은가. 장-뤽 낭시 또한 세계의 목표 상실, 전지구적 내전 상태, 모든 것이 같아지는 일반적 등가화가 무제한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지금’(세계world를 상실한 세계화globalization로서의 현재), 절대전능의 힘과 괴물처럼 되어버린 동일자의 현전을 다시 긍정하는 급격한 도약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경고한다. 그가 ‘공동체’라는 말이 아닌 ‘같이-있음’이나 ‘공동-내의-존재’, ‘함께-있음’과 같은 볼품없는 표현들을 더 선호하게 된 것은 공동체라는 말을 어쩔 수 없이 충일한 것, 나아가 실체와 내면성으로 부풀려진 것으로 인지했기 때문이며 그것이 ‘인종성’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유에까지 이어져있었기 때문이다. 낭시는 인간은 타자들과 공동으로-존재(etre-en-commum)하는 존재라고 보며, 그 유한성 때문에 언제나 외부에-있는(ex-position) 누군가와 함께-현존(com-paraitre)하는 존재라고 본다. 5 “‘공동체’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다시 말해 ‘우리’를 정당화하기 이전에, 나아가 ‘우리’라고 명확히 말하기도 전에, 하나의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졌다.”(장-뤽 낭시, 앞의 책, 131쪽) 문제는 존재가 6이미 ‘공동으로-존재하는 것’임에 불구하고 ‘공동체’가 우리의 존재 근거인 그 ‘우리’를 파괴한다는 데 있다.
야만의 세기가 우리에게 물려준 유일한 유산, 혹은 마지막 유언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를 과도하게 신뢰하지 말라는 경고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무엇이 ‘우리’이며 어디까지가 ‘우리’인가? 이 물음은 또 다른 물음이라는 필연적인 우회로를 거쳐야만 한다. ‘우리’가 아닌, ‘우리’ 밖에서, ‘우리’일 수 없는, 그러나 이미 우리 안으로 들어와 우리와 연루되어 있는 이들의 목소리.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3. 결핍의 원리
블랑쇼는 ‘어떤 공동체도 이루지 못했던 이들의 공동체’, ‘부재의 공동체(communauté d’absence)’라는 바타유의 독특한 공동체 논의를 이어 받아 모든 인간 존재에는 근본적인 결핍의 원리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존재의 결핍은 완전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결핍은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늘 ‘초과’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핍은 어떤 충만함을 보여주는 모델과의 비교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결핍은 결핍을 해소시킬 수 있는 것을 찾지 않으며 오히려 초과를, 채워질수록 심해지는 결핍의 초과를 추구한다. 의심할 바 없이 결핍은 [나에 대한 타자의] 이의 제기contestation를 요청한다. 이의 제기는 고립된 나로 인해 생겨난다. 이의 제기는 그 위치로 인해 나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자인 하나의 타자로의(또는 타자 자체로의) 노출을 항상 유도한다. 만일 인간 실존이 근본적으로 부단히 의문에 부쳐진 실존이라면, 인간 실존은 그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만을 끌어낼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 실존이란 의문은 항상 꼬리를 물고 이어질 것이다(자기 비판이란 분명 타자의 비판에 대한 거부이며, 결핍에 대한 권리를 보전 하면서 스스로 충만해지는 방법이고, 따라서 지나치게 가치가 부여된 자신 앞에서 스스로 낮아지는 것일 뿐이다.)
―모리스 블랑쇼, <밝힐 수 없는 공동체>, 22쪽
채워질수록 심해지는 결핍의 초과, 나에게 이의 제기를 하는 것으로서의 결핍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나’의 존립이 나의 너머로부터, 나의 바깥에서 이미 들어와 있는 ‘타자’에 의한, ‘타자와 함께’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바꿔 말해 ‘나’는 1인칭 단수가 아닌 1인칭 복수라는 것이다(낭시). 그것은 ‘무엇’의 나눔을 목적으로 하고 ‘무엇’에 기초한 공동체가 아니라 ‘나’와 타인 사이의 모든 종류의 만남의 근거에 있는 나눔(partage), 어떤 ‘무엇’의 나눔이 아닌, ‘우리’의 실존(‘우리’의 있음 자체)의 나눔, 나눔의 전근원적인 양태를 가리킨다. ‘우리’가 함께 있는 것은, 함께 있어야 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무엇’ 때문이 아니며, ‘무엇’을 나누기 위해서도 아니다. ‘우리’가 함께 있는 궁극적 이유와 목적은 다만 함께 있다는 데에 있다. 함께 있음의 이유와 목적은 ‘함께 있음 그 자체’이다. ‘무엇’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음 자체를 나눔, 다시 말해 ‘나’와 타인의 실존 자체가 서로에게 부름과 응답이 되는, ‘우리’의 실존들의 접촉. 7
요컨대 존재의 결핍은 존재의 유한성을, 내재적 완결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는 언제나 존재 바깥에 기대고 있기에 존재의 완결성을 방해하는 결핍이야말로 존재의 지반이자 근거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나’의 충만함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타자의 이의 제기, 그것은 ‘나’ 스스로가 존립할 수 있다는 믿음의 근거로 기능해왔던 ‘자율성’에 대한 이의 제기라고 할 수 있다. 자율성은 분명 ‘나’를 중심으로 하는 완결된 세계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동력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이러한 자율성의 강조, 그것의 신화화는 1인칭 서사의 회로를 더욱 강화하는 탓에 이미 연루되어 있는 타자와의 관계를 삭제시켜버린다는 데 있다.
4. 전 지구적 배우가 된다는 것
주디스 버틀러는 폭력에 노출되어 있으면서 폭력과 공모할 수밖에 없는 전 지구적 상황에서 폭력을 정당화하는 1인칭 서사를 탈중심화 할 다른 의미, 다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그것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어떤 것을 겪으면서 자신이 자신과 하나가 아니라 자기 밖에 있음을 알게 되는 순간으로부터 포착되는데, 우리가 이미 묶여 있는 존재들임을 환기시키고 우리가 우리의 주인이 아니게 되는 그런 순간으로서의 슬픔. 버틀러는 사적 감정의 범주에 묶여 있던 ‘슬픔’을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로 쟁점화 한다. 슬픔이 복잡한 수준의 정치 공동체의 느낌을 제공하고, 무엇보다 우리의 근본적인 의존성과 윤리적 책임감을 이론화하는 데 중요한 관계적 끈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가 제어할 수 없는 어떤 상실의 경험은 우리가 이미 우리 너머, 우리의 삶이 아닌 다른 삶에 이양되어 연루된 것임을 의미하기에 나를 붙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내가 항상 알게 되는 게 아니라면, 그리고 내가 상실한 다른 사람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항상 알게 되는 게 아니라면, 이런 박탈의 국면이 바로 나의 무지, 즉 나의 일차적 사회성의 무의식적인 자국이 드러나는 국면이라는 것이다. 이는 완전한 자율성을 가진 개인이란 없으며 인간은 항상 자기 아닌 자에게 열려 있을 수밖에 없다는 낭시의 논의를 다시금 환기시킨다. 인간은 자유의 존재가 아니라, 그가 향해 있는 타인에 의해 제약된 존재, 하지만 그 제약으로 인해 비로소 의미에 이를 수 있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 말이다. 8
통제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상실을 겪으며 우리는 우리의 취약성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가 우리 아닌 바깥의 삶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관념적이거나 도덕적인 판단으로부터 연유하지 않는다. 블랑쇼가 지적한 것처럼 자기 비판이란 타자의 비판에 대한 거부이며, 결핍에 대한 권리를 보전 하면서 스스로 충만해지는 방법이기에 그것은 자신 앞에서 스스로 낮아지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양심의 가책(bad conscience)이 나르시시즘의 부정적 판형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버틀러는 우리 스스로를 우리 밖에 배치하는 일이 신체적 삶으로부터, 다시 말해 신체의 취약성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 주장한다.
신체는 도덕성, 취약성, 행위주체성을 함축한다. 즉 피부와 살 때문에 우리는 다른 이들의 시선에 노출되며 또 접촉과 폭력에도 노출된다. 신체 때문에 우리는 행위주체가 되고 이 모든 것들의 도구가 되어야 하는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중략)··· 신체에는 항상 공적인 차원이 있다. 공적 영역에서 사회적 현상으로 구성되는 나의 신체는 나의 것이며 또 나의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타자들의 세계에 배당된 신체는 타자들의 자국을 지니고 있고 사회적 삶의 도가니 안에서 형성된다. ···(중략)··· 나의 “의지”의 형성보다 먼저인 이 점을 내가 부인다고 해도, 내가 내 옆에 가까이 두겠다고 선택하지 않은 타자들과 나를 나의 신체가 연결한다.
―주디스 버틀러, <폭력, 애도, 정치>, 앞의 책, 55쪽.
이는 우리의 행위가 자생적인 것이 아니라 조건화된 것임을 의미하는 바, 이때 행위주체성(agency)이 다름 아닌 타자에 대한 응답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음을 자각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모두가 폭력의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 각자가 부분적으로 우리의 신체의 사회적 취약성에 의해 정치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신체적 취약성은 극복되거나 해소해야 할 것이 아니라 취약성 그 자체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버틀러는 우리가 정복당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상실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해 사유함으로써 정치가 무엇을 함축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기 시작한 것처럼, 우리는 취약성을 경청하고 심지어 취약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신체적 취약성에 대한 자각은 나의 존재가 다른 이들과 이미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그 관계가 자의적으로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지시한다. 그런 점에서 신체적 취약성에 대한 자각은 자기 완결적인 1인칭 서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경로를 마련한다. 버틀러는 그것을 다른 줄거리가 전개되는 장에서 각각의 배역을 맡은 ‘전 지구적 배우’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의 신체가, 그로부터 비롯되는 행위가 다른 이와 연루되어 있으며 타인의 행위, 혹은 그들의 고통이 나와 무관하지 않음을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전 지구적 배우가 된다는 말의 의미일 터이다.
‘우리’는 어떻게 만들어지며, 무엇이 ‘우리’인가라는 앞선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렇게 물어보자.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라는 범주를 회의하게 하고 우리를 와해시키는가. 우리가 우리로만 있을 수 없게 만드는, 우리를 찢고 들어오는 어떤 목소리. 그것은 언어화되지 않았지만 거부할 수 없고 응답해야만 하는 것인데, 이 비언어적이고 비가시적인 목소리는 우리를 강화하고 확장하는 관계 체계, 다시 말해 의사소통 구조에 대한 문제제기에 다름 아니다. 언어화될 수 없지만, 아니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소통 규약을 찢고 들어오는 비언어적 목소리, 혹은 타자의 얼굴. 9
5. 불가능한, 공동체
무엇이 나로 하여금 나의 순수함과 완결성을 보장하는가.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가치 있는 무언가를 함께 하는 ‘우리’의 행위를 자명한 것으로 만드는가. 언어 체계가, 소통의 구조가 ‘나’의 내적 순수성을, ‘우리’의 완결성을 정초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러나 소통(communication)이 합일을 목적으로 하는 것일 때 ‘우리’의 형상은 ‘나’의 반복, ‘나’의 확장에 지나지 않는다. 공동체가 이러한 자기대화(內省)를 통해 구성되는 것이라면 ‘타자’는 다만 공동체의 동일성을 강화하기 위해 요구되는 존재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소통이 무언가를 주고받는 교환을 의미한다고 할 때, 그것은 오직 나와 규칙을 공유하지 않는 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때 소통의 기반이 되는 것은 수신자와 발신자 사이의 대칭성이 아니라 비대칭성에 있다고 하겠다. 수신자가 보내는 메시지를 발신자가 정확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외려 이 둘이 아무런 ‘관계’도 맺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소통에 있어 대칭성이라는 것은, 흔히 말하는 ‘잘 통한다’는 것은 내가 말하고 내가 듣는 독백에 불과하다. 그러니 소통(교환)은 외려 소통되지 않는 지점에서 비로소 시작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요컨대 소통은 ‘나-우리’의 구조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자기환원적인 구조를 위태롭게 만든다.
가라타니 고진이 대화를 ‘목숨을 건 도약(salto mortale)’이라고 말한 것 또한 ‘타자’를 공동체의 규칙을 공유하는 이가 아닌 커뮤니케이션·교환에서 나타나는 위태로움을 노출시키는 존재로 봤기 때문이다. 상품의 가치가 사전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환된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처럼 ‘말이 대화 상대자를 향고 있다는 것’은 화자에게는 ‘무엇을 의미한다’라는 특수한 내적 경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가라타니는 대화를 내부에 갇혀 있는 ‘말하고―듣는’ 관계가 아니라 나 자신이 믿고 있는 확실성을 붕괴시키는 ‘가르치고―배우는’ 관계라고 한 것이다(가라타니 고진, 송태욱 옮김, [탐구 1] 새물결, 1998).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 그리하여 나 자신의 확실성을 잃게 만드는 존재를 가라타니는 ‘타자’라고 했다. 이러한 ‘타자’는 우리로 하여금 공포와 불안을 야기한다. 공동체의 규칙을 공유하고 있지 않기에 공동체의 규칙을 회의하게 만드는 외부로서의 타자. 타자는 언제나 공동체를 위태롭게 만들지만 그것이 ‘공포’의 의미만을 가질 때, 그 존재는 공동체로부터 살해당하고 말 것이다. 반면 우리가 타자를 살해할 수도 있다는 불안을 없애버리지 않는다면 자기보존을 목적으로 하는 폭력이 윤리적으로 정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예컨대 발신자가 된다는 것은 수신자가 될 수 있다는 가정을 전제할 때 가능한 것처럼 타자로부터 살해당할 수도 있다는 공포와 타자를 살해할 수도 있다는 불안을 동시에 떠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타자는 언제나 공동체 밖에서 오고, 공동체 밖에 있다. 타자는 공동체를 파괴하고 훼손하며 찢어버린다. 레비나스식으로 말해 타자의 얼굴은 우리 ‘밖에서’ 우리의 유한성의 테두리를 깨뜨리고 우리의 삶에 개입한다. 그것은 공동체의 전체화와 전체성의 승리를 방해한다. 그러나 타자를 피하거나 제거해야할 대상―바꿔 말해 공동체 내부로 포섭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외려 우리가 이미 우리 아닌 다른 것과 연루되어 있으며 타인에게 노출되어 있고, 그에게 매달려 있는 자라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조건임을 잊지 않을 때, 어떤 공동체의 형상이, 불가능하기에 가능으로 열릴 수 있는 그런 ‘공동체’의 형상과 조우할 수 있지 않을까.
<<신생>> 2010년 봄호에 기고
- 1. 조르조 아감벤, 박진우 옮김, <<호모 사케르>>, 새물결, 2008, 223쪽. [본문으로]
- 2. 지그문트 바우만, 함규진 옮김, <<유동하는 공포>>, 산책자, 2009. [본문으로]
- 3. 지그문트 바우만, 정일준 옮김, <<쓰레기가 되는 삶들―모더니티와 그 추방자들>>, 새물결, 2008, 41쪽 [본문으로]
- 4. 모리스 블랑쇼 · 장-뤽 낭시, 박준상 옮김, <<밝힐 수 없는 공동체 / 마주한 공동체>>, 문학과지성사, 2005 [본문으로]
- 5. 이는 논의의 맥락이 상이한 것처럼 보이는 바우만의 다음과 같은 언급과 정확하게 겹치는 것이기도 하다. “공동체라 일컬어지는 것의 경계는 마치 몸의 외부 막처럼, 신뢰와 자상한 보살핌을 쏟을 영역과 위험과 의심과 항시적 감시를 할 황야의 영역을 나누도록 되어 있다. 몸과 공동체라 일컫는 것은 공히 내부는 융단 같고 외부는 뾰족한 가시철망 같다.” 지그문트 바우만, 이일수 옮김, <<액체근대>>, 강, 2009, 293(강조-인용자). [본문으로]
- 6. 이진경은 공동체에 관한 블랑쇼와 낭시의 역설이 피상적이고 불충분하다고 지적한다. 그들의 논의는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시도가 공동체를 배반하거나 그 시도를 실패로 몰고 갈 수 있음을 경고하는 통념적 비판에 머물 뿐 아니라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시도 바깥에 공동체를 설정함으로써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시도 자체가 지닌 난점을 회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공동체를 구성하는 문제 바깥에서, 실패하며 되돌아오는 공동체 바깥에서 실패할 수 없는 존재론적 공동체를 정의하려는 것, 공동체가 없는 곳에서 공동체를 정의하려는 것은, 공동체의 피안(彼岸)에서 그것의 이데아를 발견하려는 또 하나의 신학적 시도”(이진경, 「코뮨주의와 특이성」, 고병권 · 이진경 외, <<코뮨주의 선언>>, 교양인, 2007, 152쪽)에 다름 아닐 수 있다고 지적하며 이진경은 이것이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어떠한 운동도 없이, 실천적 지향성 없이 공동체를 개념화하려는 시도 자체가 지니는 근본적 한계를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존재론적 공동체의 잠재성을 좀 더 능동적/실천적으로 밀고 나가는 것으로서의 ‘구성적 공동체’에 관한 논의에 대해서는 <<코뮨주의 선언>>에 실려 있는 글들을 참조. [본문으로]
- 7. 박준상, <장-뤽 낭시와 공유, 소통에 대한 물음>, <<밝힐 수 없는 공동체 / 마주한 공동체>> 역자 해설, 139~141쪽. 몇 대목을 문맥에 맞게 변형해서 인용했음을 밝혀둔다. [본문으로]
- 8. 주디스 버틀러, 양효실 옮김, <폭력, 애도, 정치>, <<불확실한 삶 : 애도와 폭력의 권력들>>, 경성대학교출판부, 2008, 57쪽. [본문으로]
- 9. 레비나스에 의하면 ‘타자의 얼굴’은 자기환원적인 방식으로 구축되는 공동체를 위태롭게 만든다. 왜냐하면 타자의 얼굴은 언어와는 다른 것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타자의 얼굴이 가시적인 영역 너머에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의 시각, 다시 말해 이성적 범주로 포착되지 않는다. 버틀러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레비나스의 얼굴 개념이 일으키는 가장 지속인 오해, 다시 말해 그것이 보여질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가정으로부터 그가 벗어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얼굴의 의미에 단어를 부여하려 한다고 해도, 얼굴은 그에 해당하는 어떤 단어도 작동하지 못하는 그런 것일 게다. 얼굴은 일종의 소리, 의미를 뺀 언어의 소리, 모든 의미론적 의미의 전달에 선행하고 그런 의미의 전달을 제한하는 발성의 기층언어(substratum)인 것 같다.” 주디스 버틀러, <불확실한 삶>, <<불확실한 삶 : 애도와 폭력의 권력들>>, 앞의 책, 184쪽. 레비나스의 ‘얼굴’ 개념을 둘러싼 쟁점에 대해서는 콜린 데이비스, 김성호 옮김, <<엠마누엘 레비나스―타자를 향 욕망>>, 다산글방, 2001, 250~258쪽을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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